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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장편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창비 여름호 특집을 읽고
이경재 李京在
문학평론가. 평론집 『단독성의 박물관』이 있음. ssmart1@hanmail.net
1. 장편소설 논의의 현재
2007년 여름 『창작과비평』이 특집으로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라는 장편대망론을 펼친 이후로 단편 위주의 문학 제도와 관행이 개선되고 문예지와 싸이버 공간에 연재 기회가 늘어나면서 장편소설이 양적으로 급팽창했다.1) 이것은 “한국문학의 ‘안’(작가와 비평가와 독자)과 ‘바깥’(출판시장)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2)에 가깝다.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양적 팽창에 걸맞은 질적인 성과가 가시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문학 환경의 미비는 오히려 장편소설의 질적 수준 미달의 진정한 원인을 가려주는 환상의 장막이었는지도 모른다.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특집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는 최근의 경향을 중심으로 장편소설의 현상과 의미, 나아가 한계와 전망까지 짚어본 기획이다. 백지연(白智延)의 「장편소설의 현재와 가족서사의 가능성」은 장편소설의 역사에서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소재인 ‘가족’이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문학에 수용되고 있는지, 이러한 가족서사가 가져온 한국 장편소설의 혁신 가능성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꼼꼼하지만 담대한 글이다. 허윤진(許允溍)의 「분노와 경이」는 환상문학론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사랑이 지니는 그 심각한 중요성을 진지하게 설파한 실험적인 글이다. 김동수(金仝洙)의 「아름다운 것들의 사라짐 혹은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은 프랑스에서 주목받고 있는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소설을 검토하여 한국 장편이 나아갈 소중한 가능성의 한 방향을 제시한 역작이다. 본고는 지난호 기획 중에서도 총론 격으로 쓰인 한기욱(韓基煜)의 「기로에 선 장편소설」을 집중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지난 5년간의 장편소설론의 전개 양상을 검토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논점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한기욱은 장편소설이 나아갈 방향으로 “근대의 장편소설을 근거지로 삼되 ‘탈근대적 상상력’을 근대의 경계를 뚫고 새 길을 개척하는 일종의 전위대로 활용”3)하자고 제안한다.4) 새로운 시대의 장편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를 수행할 핵심적인 전략으로 “근대 장편소설이 내장한 근대성찰의 풍부한 지적 자산과 탈근대적 상상력의 결합”5)을 제시하는 것이다. 근대완성과 근대극복이라는 이중과제론의 문학적 버전이라 할 만한 주장으로서 논의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한기욱의 논의에서 초점은 ‘근대의 장편소설’과 ‘탈근대적 상상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모아진다. 한기욱 스스로도 “장편소설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은 채 어떻게 그 미래를 논할 수 있겠는가”6)라고 자문한다. 이 대목에서 한기욱은 자신의 논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평단에서 가장 볼 만한 장편소설론으로 평가받는 신형철(申亨澈)의 평론(「‘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 『문학동네』 2010년 봄호)을 8면에 걸쳐 분석하고 있다. 한기욱은 신형철의 장편소설론이 “‘윤리학적 상상력’(장편소설의 의제 설정과 해결을 가능케 하는 문학적 판단 기능),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장편소설의 기본 문법), ‘서사윤리학’(윤리학적 상상력을 분석·평가할 수 있는 관점), 세개의 핵심 개념”7)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한기욱은 자신의 장편소설론을 펼쳐 보이기 위해 신형철의 장편소설론을 하나의 매개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의 논의에서 신형철의 장편소설론은 다방면에서 부정당한다. 먼저 바디우(A. Badiou)의 진의를 왜곡할 소지가 농후한 ‘윤리학적 상상력’이라는 명칭의 부당함을 지적한 후, 장편소설의 기본 문법으로 제시된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은 독창적인 걸작 장편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족쇄가 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실제 독법에 있어 작가의 의도에 휘둘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에 집착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비평감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신형철 장편소설론의 ‘명칭’ ‘기본 문법’ ‘작품에의 적용’ 모두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기욱의 비판 속에서 살아남는 신형철의 장편소설론은, 장편의 기본적인 상상력인 ‘의제 설정과 해결을 가능케 하는 문학적 판단 기능’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기욱이 생각하는 장편소설의 상(像)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의 인용문 속에 압축되어 있다.
장편소설이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들의 구체적 삶이 먼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유일무이한 단독자로서 그 개인의 삶, 그 개인이 타자와 맺는 관계, 주위의 자연이나 사물과 맺는 관계의 진실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밀고나가면 그것이 시대현실에 대한 물음에 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출발점은 한 개인의 삶의 진실을 다루는 ‘작은 이야기’지만 어느덧 그것은 세계와 시대현실의 ‘큰 이야기’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장편소설은 역사와 잠시 별거할 수는 있어도 아주 이혼할 수는 없는 형식이며, 이 형식에 문학의 역사적·인식론적 기능이 크게 의존한다.8)
‘단독자로서의 개인에 대한 관심’ ‘윤리에 대한 집요한 성찰’ ‘시대현실에 대한 물음’이야말로 이 시대의 장편소설이 갖춰야 할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기로에 선 장편소설」에서도 한기욱은 이 시대의 확실한 문학적 성취로 김애란(金愛爛)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을 꼽으며 위의 인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한기욱은 『두근두근 내 인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위의 세가지 요소가 작품 속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지만, 이 작품이 과연 ‘시대현실에 대한 물음’에까지 가닿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9)
한기욱은 장편소설에 대한 논의를 펼칠 때마다 김영찬(金永贊)의 장편소설론을 비판의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는다. 따라서 한기욱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영찬의 논의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김영찬은 장편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로 “세계에 대한 주체의 태도로서 대결의 자의식”10)을 꼽고 있는데, 2000년대 문학에는 이러한 ‘대결의 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다. 그의 논의는 대결의 자의식이 있는 ‘근대문학’과 대결의 자의식이 결여된 ‘근대문학 이후’를 구분하는 2단계론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근대문학’과 ‘근대문학 이후’ 그리고 앞의 두 단계를 ‘불가능하지만 불가피하게 종합’한 ‘근대문학 이후의 이후’를 구별하는 3단계론으로 보아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문학은 “근대문학을 향한 우울의 태도를 가슴 한켠에서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 이후 계속되어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모색”11)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김영찬이 다가올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는 근대문학에 대한 ‘애도’와 ‘우울’이 분리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이다.12)
김영찬은 최근 신인들의 소설에서 포스트-IMF시대 한국소설이 잊어왔던 “불화와 대결의 자의식이 조금씩 구조적·의식적 제약을 거슬러 힘겹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13)에 주목한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과정을 통해 “소통과 공감, 공유와 연대의 시대감각”이 드러났으며, 이 시대감각이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장르로서 장편을 호출하는 것”14)이라 판단한다. 따라서 지금의 젊은 작가들은 “미학적 자기완결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지향을 놓지 않은 채 그것을 장편이라는 장르 속에서 풀어보려는 시도”16)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영찬이 자신을 비판하는 한기욱에 대해 “‘덜 읽기’의 (무)의식적 욕망”14)에 이끌리고 있다고 한 지적은, 바로 자신이 설정한 세번째 단계를 한기욱이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한기욱과 김영찬이 장편소설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내세우는 것은 시대현실과의 밀접한 관련성이다. 한기욱은 2000년대 소설을 평하면서 “시대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주도하면서 구체적 삶에서 힘을 얻는 소설 장르 특유의 활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지는 못했다”17)고 비판한다. 김영찬 역시 “장편이란 시대와 호흡하는 장르이며 그런 의미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불가피하게 근대의 문제와 맞서야”18) 한다고 본다. 김영찬은 지금 장편이 시대의 감각과 동떨어져 시대의 정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否認)”19)과 관련되며, “소통과 공감이란 현실적 삶의 토대에 대한 감각의 공유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20)이라고 주장한다. 김영찬이 김형중(金亨中)의 장편 논의21)를 언급하며 브리꼴라주나 입체소설 같은 형식의 소설이 지닌 문학적 성취를 결정하는 것은 그 형식의 기발함이나 새로움이 아니라 그런 형식적 표현이 가까스로 이르게 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한 치’의 통찰”22)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김영찬이 장편소설을 평가함에 있어 시대현실과의 관련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잘 드러난다.
필자 역시도 장편소설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시대현실과의 관련성에 있다는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방식으로 현실을 담아낼 때, 작품의 질적인 성취는 물론이고 독자와의 소통과 공감 역시도 좀더 넓고 깊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몇몇 작가들은 현실과 관계맺을 때만 가능한 소설의 풍부한 인식론적・정서적 역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문학과 현실의 새로운 관계맺기에 성공하고 있다.
2. 장편소설에서의 ‘재현’과 ‘환기’의 문제
오노레 드 발자끄(Honoré de Balzac)의 『고리오 영감』(1835)의 마지막이, 라스띠냐끄가 뻬르 라셰즈 묘지의 언덕에서 빠리를 내려다보며 “이제부터는 빠리와 나의 대결이야!”라고 외치는 장면으로 끝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계에 대한 대결의 자의식’이야말로 장편소설을 가능케 하는 기본 정신임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지금의 한국문학에서 이와 관련해 매우 예외적이며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는 작가는 김사과이다. 김사과는 최근 소설에는 “세계에 대한 관심도, 변화에 대한 의지도 없”으며 “리얼리즘이 빠져 있다”23)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문제로 수만명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자신은 소설을 통해 “그것을 쳐다보고 싶고, 그것을 기록하고 싶고, 그걸 개선하고 변화시키고 싶다”24)는 세계와의 대결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김사과의 『테러의 시』(민음사 2012)가 담고 있는 동시대 현실의 진폭은 매우 넓다. 주인공 제니는 ‘막장의 오디세이아’라 불릴 만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시대의 문제적인 지점들을 전전한다.25) 그 여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가 다양하게 다루어진다. 별다른 희망 없이 자격지심만으로 자기를 갉아먹는 젊은 세대, 껍데기만 남은 중년의 고달픈 삶, 불법이민자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 공산주의는 악마의 사상이라고 설교하며 물질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가리지 않는 세속화된 종교, 남성중심주의와 기존 사회에의 적응만을 강조하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 입주민의 삶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도시개발과 철거, 우리 안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식민주의, 사회적 약자를 향해 가해지는 가공할 폭력 등이 빼곡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폭과 깊이는 단편으로서는 불가능한 장편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제목에 드러난 ‘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장편소설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김사과는 전통적인 장편소설의 재현 방식, 즉 사건들의 짜임새 있는 인과관계에 바탕해 한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방식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다. 이것은 제니와 리가 매주 서울 시내의 교회를 돌며 돈을 받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잘 나타난다. 제니와 리의 이야기는 거듭될수록 더욱 비참해지고, 더욱 슬퍼지고, 더욱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한마디로 이야기는 거듭할수록 그럴듯해”(176면)지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를 반복할수록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며, 그들의 과거는 “대형 교회의 거대한 스크린 속, 그리고 에이치디 카메라의 메모리 안에서만 존재”(177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잘 짜인 이야기 속에서 삶의 진실은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형식 면에서 전통적인 소설과는 다른 실험적인 기법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단문으로만 일관하는 문장, 외국어의 무자각적인 사용, 시와 같은 행갈이, 희곡과 같은 대사 차용 등이 그것이다. 띄어쓰기를 자의적으로 구사하여 낯선 효과를 내고, 몇몇 어구의 반복을 통하여 리듬을 창출하기도 한다. 또한 현재시제로 일관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러한 특징은 대부분 산문보다는 시적인 것과 관련된다. 특히 1부와 3부에서는 특정할 수 없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환각과 현실이 뒤죽박죽된 온갖 묵시록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말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의 유명한 말에는 수정을 가해야 할 것 같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불가능해진 것은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시를 통해서는 수용소의 견딜 수 없는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환기할 수 있으나, 사실주의적 산문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가 불가능하다고(혹은 정확히 말해 야만적이라고) 선언할 때, 이 불가능성은 가능한 불가능성이다. 시는 그 정의상 언제나, 직접 말할 수 없는 것, 오직 넌지시 암시될 수만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가면 이는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음악은 가닿을 수 있다는 오래된 경구와도 통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이 일종의 역사적 예감처럼 아우슈비츠의 불안과 악몽을 그 일이 있기도 전에 분명히 표현해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26)
제니의 삶이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고통의 극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니는 자신을 강간하는 아버지 밑에서 ‘돼지처럼’이 아니라 ‘돼지’로 자랐다. 그녀는 처음에 이름도 없는 ( )이다. 제니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다.”(33면) 제니에게는 엄마, 돌아갈 집, 친구, 주민등록증, 여권, 나라, 가족, 직업 등이 없고, 조선족, 중국말, 중국, 서울, 불법, 섹스 클럽, 돈, 나라, 국민, 지위, 고향, 맛, 프랑스, 독일, 일본, 혁명, 학생, 노동자, 젊음, 신좌파 같은 말도 모른다. 하나의 값싼 불량상품이 되어 세상을 전전하는 그녀에게는 폭력과 폭력, 그리고 폭력만이 이어질 뿐이다.
이러한 제니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 김사과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일정한 틀로 제니가 겪는 고통을 배열하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김사과에게는 지금의 고통이 가져다주는 분위기나 느낌 그 자체를 정직하게 표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제니의 삶을 중심으로 지금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등장하는 방법은 재현이 아니라 환기이다. 재현이란 ‘말할 수 있는 것’(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 데 반해, 환기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사과는 모호한 이미지, 분위기만으로 충만한 비유, 내면에 바탕한 추상을 통해 현재의 악마적인 현실에 걸맞은 내적 형식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세상의 폭력과 공포가 객관화된 형상으로는 불가능한 실감의 차원에서 독자에게 전달되는 일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으며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제니는 “텅 비어버렸다”(180면)고 이야기된다.27) 이 문장 바로 뒤에 제니는 “이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같은 면)라고 자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제니가 보여주는 ‘텅 빈 상태’야말로 김사과가 『테러의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원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제니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완벽하게 죽은 존재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몫 없는 자들’(part of no part)에 해당한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나름의 몫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 속에서 적절한 자리를 배당받지 못한 존재이다. 씨몬 베유(Simone Weil)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한 이들의 위치야말로 지젝이 “사회의 진리가 발생하는 지점”28)이라고 한 자리에 해당한다. 무(無)로 수렴되는 제니를 통해 한국사회의 근원적인 적대와 극단의 폭력성은 그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그들의 위치에서 발생한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의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총체적인 무시이다. 그것은 파국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가는 현실이라는 폭주기관차를 정지시키는 일에 해당한다. 테러의 시의 3부는 서사와 묘사, 현실과 환각, 과거와 현재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처럼 뒤엉켜 흘러내린다. 일종의 묵시록인 이 대목에서는 온갖 이미지와 환영을 통해 김사과 식의 전망이 드러나고 있다. 제니가 거쳐온 모든 것들은 파괴된다. 페스카마를 연상시키는 서울 남서부의 한 재개발공사 현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붕괴되고, 집창촌으로 쓰이던 서울 동북부의 낡은 아파트에서는 난투극으로 사람이 죽는다. 정박사는 자신의 집에서 목을 매달고, 대형 교회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목사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죽는다. 제니와 리의 머리 위로 모래가 폭우처럼 퍼붓는 상황에서 피투성이의 제니와 리는 “완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그래서 더이상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다시 시작할 수 없도록, 그리하여 모든 게 진짜로 텅 비어버릴 때까지”(218~19면) 서로를 으깬다.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그 순간 리는 “그들이 가까이 왔어”(219면)라고 속삭인다
지금의 세계는 완전히 사라져야 하며, 그 모래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의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반(反)동일시는 물론이고 비(非)동일시의 태도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無)동일시에 가까운 전략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태도는 현존하는 권력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현란한 지적 유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와 관련해 지젝이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사행동에 대해 지젝은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29) 김사과는 『테러의 시』를 통해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길한 수동성’을 고수하고 있는 중이다.
3. ‘장편소설의 논픽션화’가 아닌 ‘논픽션의 장편소설화’
공감과 소통을 전제로 성립하는 장편소설을 위해서는 현실과 관계맺는 독특한 방식에 대한 고민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실제 발생한 문제적인 사건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독자가 절실하게 느끼는 삶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룸으로써 시장에서의 공유 폭을 한껏 넓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방식으로 창작된 장편소설은 현실 고발, 독자들과의 공감 확장, 리얼리티의 창출 등에서도 일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호기심 위주의 소재주의나 흥미를 우선시하는 감상주의에 함몰되는 상황은 경계해야 한다. 김예림(金艾琳)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화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밝히고 있다.
『도가니』처럼 요구에 직접 따르는 것 또는 이 요구체계 자체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길일 수는 있다. 하지만 문학이 이런 식으로 정위되고 마는 특유의 구조 자체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발언할 수 있는 힘은 역시나 중요하게 느껴진다. 현실과 문학 사이의 문턱 없는 순환노선, 즉각적인 응답체계의 속도에서 벗어날 때, 문턱 없음과 응답 강박이 드러내는 미적·현실적 척박함의 근원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30)
현실의 사건을 문학에 가져올 때, 김예림이 지적하고 있는 ‘현실과 문학 사이의 문턱 없는 순환노선’과 ‘즉각적인 응답체계의 속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요소다. 그러나 많은 평자들의 우려처럼 지금의 장편소설이 여전히 현실성과 그에 바탕한 교감 능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우려보다는 “난만한 부조리의 지대, 인권의 사각지대, 부실한 존중 구조의 지대에서, 모순과 부정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데 열심인 문학”이 지닌 “나름의 진정성”31)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싶은 마음이다.
손아람의 『소수의견』(들녘 2010)은 구체적인 사건을 소설화할 때 우려되는 ‘문턱 없음과 응답 강박’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공공의 문제를 문학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용산참사에 바탕한 장편소설이다. 일례로 홍재덕 검사가 수사자료 열람 요청을 거부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용산참사로 기소된 철거민들의 재판에서 검찰은 총 1만여쪽의 수사기록 중에서 자신들의 수사 결론에 반하는 3천여쪽의 기록은 제출하지 않았다.32)
아현동 철거현장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뒤이은 법정공방을 핵심으로 다룬 이 소설의 대부분은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이 법정은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을 다루는 개별화된 시공간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정치적 대결이 벌어지는 첨예한 전선이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은 우리 시대의 가장 비극적이면서 징후적인 사건인 용산참사를 가져와 독자와의 공감대를 만들면서, ‘법의 공정성’이라는 시대의 핵심적인 의제를 설정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유현산의 『1994년 어느 늦은 밤』(네오픽션 2012) 역시 좋은 참조의 대상이다. 이 작품은 1994년 가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지존파 사건에서 핵심적인 모티프와 기본 서사를 가져왔다. 지존파라는 이름에 지레 흥분하여 이 작품을 엽기적인 소재에 기댄 흥미 위주의 스릴러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범죄의 양상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낳은 당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범죄의 양상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초점은 그 배후에 감춰진 원인과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데 맞추어져 있다.
후일담이나 강남 문화를 전시하기 위한 배경으로만 등장하곤 했던 1990년대는 이 작품을 통해 공장이나 탄광에서 죽어라 일만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암울한 청춘들을 위한 시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나아가 작품 속 세종파의 절망과 분노를 낳은 자유주의와 경제주의의 문제는 지금의 시대현실을 성찰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요소이며, 어느새 1990년대는 지금 우리가 겪는 여러 문제와 폭력의 기원적 시공간으로 새롭게 의미부여된다. 또한 소설 속의 세종파가 제기하는 폭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필요성 역시 지나치기 힘들다. 세종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주관적 폭력의 극한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독자는 세종파라는 괴물을 보며 그러한 괴물을 만든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의 괴물성 역시 성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괴물성이야말로 오늘날의 폭력이 지닌 본질적인 속성이다. 『1994년 어느 늦은 밤』이 제기하고 있는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은 지존파라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구체성과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소수의견』이나 『1994년 어느 늦은 밤』 모두 작가의 깊이있는 문제의식에 의해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이 여러가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금의 시대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에 문학적 감동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장편소설이 지닌 가치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에서 가져온 소재나 인물이 작가의 문제의식에 의해 얼마나 시대의 정곡에 다가갈 수 있느냐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장편소설의 논픽션화’가 아니라 ‘논픽션의 장편소설화’이다.
4. 그들이 가까이 왔어
오늘날 장편소설은 작품의 질적 성과는 물론이고, 독자와의 소통과 서사성의 회복도 동시에 요구받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현실과의 연관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지난 세기 한국문학에서 소설이 현실과 관계맺는 양식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뚜렷했다. 곧 당대 현실의 객관적인 재현을 목적으로 전형적 인물과 세부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객관을 담보해줄 수 있는 보편타당한 제3의 시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창공의 별과도 같은 입장을 확보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관념이나 스타일의 반복은 지금의 현실과는 무관한 물신화된 관념론을 소설적으로 번안하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진정한 장편소설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시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물론이고, 그러한 성찰의 결과물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자기만의 고유한 방법론적 탐구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것은 시각의 확보가 안 되니까 스타일이라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전망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우선은 순심(純心)으로 구체적인 삶과 시대의 명암을 절실하게 응시하고, 그에 바탕해서 새로운 미학적 형식을 창출하자는 간절한 제안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군의 작가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데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다.33)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본 김사과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김사과는 산문적인 견고함으로 시대의 리얼리티를 재현하기보다는 시적인 목소리로 시대의 실재를 환기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현실이 가하는 폭력과 공포를 ‘몫 없는 자들’이 느끼는 실감의 차원에서 이미지나 비유 혹은 분위기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김사과가 그려내는 대상은 현실과는 무관한 가상의 공간으로 치닫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가상의 공간이야말로 시대현실이 부과한 심리적 실재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현실과의 관련성은 더욱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손아람이나 유현산의 경우에서도 시대현실과 호흡하기 위한 새로운 문학적 고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문학의 기로에 당당하게 서 있는 신인류를 만나왔는지도 모른다. 『테러의 시』에서 마지막으로 울려온 속삭임인 “그들이 가까이 왔어”라는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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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벌어진 장편소설 창작을 위한 문학 환경의 변화와 이에 따른 양적 팽창에 대해서는 정여울 「장편 르네상스 시대의 명암: 장편소설 활성화를 둘러싼 몇가지 쟁점들」(『자음과모음』 2010년 겨울호)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2) 한기욱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현단계 소설비평의 쟁점과 과제」, 『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216면. 이하 인용에서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로 표기.
3) 한기욱 「기로에 선 장편소설: 장편소설과 비평의 과제」,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226면. 이하 인용에서 「기로에 선 장편소설」로 표기.
4) 이 제안은 근대와 탈근대의 절묘한 조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근거지’와 ‘전위대’라는 비유에서도 드러나듯이 ‘탈근대’보다는 ‘근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또한 한기욱은 장편 논의에서 여러차례 근대 장편소설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탈근대적 상상력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 바 있다. 김형중의 2단계론을 비판하는 자리에서도 “흔히 ‘19세기 사실주의’라는 딱지가 붙는 19세기 장편소설의 최상의 작품들은 이미 근대의 벼랑까지 간, 혹은 그 너머를 본 예술이다”(「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221면)라고 말한다. 「기로에 선 장편소설」에서도 “사실은 빼어난 장편소설이 내장한 근대성찰의 지적 자산 속에는 이미 과거 여러 시대의 탈근대적 상상력이 응축되어 있다”(226면)는 확신을 보여준다.
5) 「기로에 선 장편소설」 226면.
6) 같은 글 227면.
7) 같은 글 232면.
8)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227면.
9)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인 ‘탈근대적 상상력’의 정체는 한기욱의 논의에서 친절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기로에 선 장편소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밤은 노래한다』보다 고평하고 있는 『원더보이』에서의 초능력 아이라는 화자 설정, 기발한 언어유희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10) 김영찬 「문학 뒤에 오는 것」, 『비평의 우울』, 문예중앙 2011, 39면.
11) 김영찬 「끝에서 바라본 한국근대문학」, 같은 책 33면.
12) 따라서 ““‘근대문학’ 이후”를 살아간다고 규정함으로써 ‘근대문학’이 내장하고 있는 풍부한 자산—그중에서 가장 값진 것은 근대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과 통찰—을 이 새로운 예술적 기획에 활용하기 힘들어진다는 것”(「기로에 선 장편소설」 223면)이라는 한기욱의 비판이 김영찬의 가슴에 와닿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13) 김영찬 「문학 뒤에 오는 것」 49면.
14) 김영찬 「공감과 연대—21세기, 소설의 운명」,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303면.
15) 같은 글 306면.
16) 같은 글 295면.
17)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207면.
18) 김영찬 「공감과 연대—21세기, 소설의 운명」 301면.
19) 같은 글 307면.
20) 같은 글 308면.
21) 지난 5년 장편소설에 대한 중요한 입장을 제시한 또다른 평론가로는 김형중을 들 수 있다. 김형중은 “복잡한 서사, 중층적 성격 묘사, 사건들의 거대한 인과관계, 한 사회의 총체적 조망”(「장편소설의 적: 최근 장편소설에 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253면)을 갖춘 근사한 장편소설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의 본질적인 원인은 세계가 “더이상 유기적이고 인과적인 인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사회의 총체적 조망은 더이상 불가능할 만큼 모호하고 파편적”(같은 글 256면)인 것과 관련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율리시즈』 같은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장편소설 역시 모레띠(F. Moretti)가 말한 브리꼴라주로 규정하는 김형중이 보기에 “굳이 장편소설 개념을 특권화하는 것은 현실에 부합하지도 않고 권장할 만하지도 않”(「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소설 쓰기: 2011년 여름, 한국 소설의 단면도」, 『문학과사회』 2011년 가을호 223~24면)은 현상이다.
22) 김영찬 「공감과 연대—21세기, 소설의 운명」 305면.
23) 김사과 「하루키와 나」, 오늘의문예비평 엮음 『불가능한 대화들』, 산지니 2011, 115면.
24) 같은 글 117면.
25) 제니는 모든 것이 모래인 도시에서 자라나 서울 외곽에 있는 불법 섹스 클럽으로 팔려간다. 이후 섹스 클럽의 손님이던 정박사의 가정부가 되었다가 영국에서 온 불법체류자 리와 빈민촌 ‘페스카마 15호’에서 생활한다. 페스카마 15호가 철거된 이후에는 고시원으로 쫓겨난다.
26)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27~28면.
27) 제니의 상상적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리는 “동물로 키워진 인간들의 특징은 특징이 없다는” 것이며, 자신은 “그저 텅 빈 기분”을 느끼고 제니의 얼굴은 “언제나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28) 슬라보예 지젝, 앞의 책 306면.
29) 같은 책 9~10면.
30) 김예림 「‘존중’ 없는 사회의 대중문화, 그 욕망과 미망에 대한 단상: 『도가니』와 『완득이』를 중심으로」, 『문학과사회』 2012년 여름호 163면.
31) 같은 글 163면.
32) 박래군 「‘용산참사’로부터 생각하는 인권」, 『실천문학』 2009년 여름호 221면.
33)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졸고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실천문학사 2012)의 2장 ‘재현을 둘러싼 아포리아들’에서 미숙하게나마 진행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