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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상황극 시대의 서정시
김승일 시집 『에듀케이션』
최현식 崔賢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평론집 『말 속의 침묵』 『시를 넘어가는 시의 즐거움』 『시는 매일매일』 등이 있음. chs1223@inha.ac.kr
여기, 50여편의 상황극으로 구성되지만 최후에는 하나의 장편극으로 절합되는 시집이 있다. 『에듀케이션』(문학과지성사 2012)이 그것인데, 반교육적이며 반인간적인 상황과 언어가 내부에 들끓는다. 당신은 과연 “홀에 모인 여러분”을 향하여 “내 생일”과 “장례식”에 “모두 모이진 않았다”며 “안 죽을걸 씨발”(「홀에 모인 여러분」)이라고 패악을 부릴 수 있는가. 존재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행사에서 명랑한 축하와 정중한 애도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에 반하는 행위는 “수치를 나눠 갖기 위해 싸”(「방관」)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치’로의 길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새로운 “실재를 상상하”는 능산(能産)적 “상징”(「객관적인 주체」)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나 상황극은 “학교에 가는 양아치”(「부담」)의 겉멋 든 자기변론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장편극의 끝자락에서 “우리들은 서로에게/가르쳐줄까//지금 막 우리들이 알게 된 것을”(「홀에 모인 여러분」)이라고 묻는 김승일(金昇一)의 전략은 탁월하다. 그것은 ‘대본’ 속 대사(허구)이기 전에 우리를 피의자이자 한계상황으로 맥락화하는 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에듀케이션』이 현대적 ‘감정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의미의 피의자이며 무슨 일로 한계상황에 처해진 것일까? 『에듀케이션』의 골간은 친밀성의 존재(특히 부모와 친척)에 의해 성장이 중지된 소년들의 결사(結社)에 있다. 3~4인의 불행한 (청)소년들로 구성된 ‘도롱뇽 조합’은 “유년 시절에 학대당한 경험”과 “맞고 자란 우리들의 취향”을 “굉장한 공감대”(「같은 과 친구들」)로 삼는 아이러닉한 집단이다. 이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거나 저항하지 않으며 독자적 미래를 고뇌하는 아웃사이더의 기질도 거의 부재하다는 점에서 유희적이며 퇴행적인 존재일 수 있다.
물론 만사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더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었다”(「같은 과 친구들」)라고 판단하는 사유정지의 습벽은 일종의 극적 장치겠다. 발랄한 소년들의 자존감을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홀에 모인 여러분」)라는 한마디로 벌거벗은 예외상태로 밀어넣는 것이 오늘날 자본의 윤리고 국가의 도덕이다. “그래요, 나는 알아요, 공포가 꿈을 지속시키는 것을”(「난 왜 알아요?」)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존재의 어둠은 따라서 잠깐의 암전이 아니라 일체의 무대원리이다.
『에듀케이션』에서 소년들이 학대의 경험 끝에 고아가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부모세대의 죄에 대한 판별과 함께 소년들의 구제 가능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승일은 학대당한 기억은 기입하되, 그들의 과거 행적은 공백으로 남긴다. 또 현재의 행동과 상황의 기록에는 열심이되, 등장인물의 심리정황에는 일부러 게으르다. 극(劇)과의 교섭 결과겠지만, 특권적 현재의 가시화는 과거에 대한 불신과 미래의 불행을 전면화·자동화하는 편집증적인 시간을 낳는다. 탈주선 없는, 한계상황의 무대(현실)에서 좀비(“미아, 고아, 사마귀들”, 「사마귀 박스」)처럼 떠돌아야 하는 ‘도롱뇽 조합원’(「조합원」)의 숙명은 이렇게 결정된 것이다.
『에듀케이션』의 가장 치밀한 극적 장치는 ‘죽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은 존재의 본원성이나 내밀성으로 진입하는 일회적 사태로 발생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소년들의 불행과 추방을 자동화하는 상황 장치로 나타난다. 곳곳에 출몰하는 죽음들이 소년들의 불행과 맥락없는 “비행(非行)”, 위악적인 “소꿉놀이”(「홀에 모인 여러분」)에 대한 질문과 회의마저 봉쇄하는 경향은 그래서 발생한다. 주관적 서사와 정서의 요청으로 일괄 삽입되는 ‘계산된 죽음’은 거기 결박된 소년들의 공포와 좌절을 몇몇 유형으로 계량화하는 형국을 피하지 못한다. “지하철 선로로 뛰어”든 자의 죽음을 “나는 평범함보다는 평평함이 좋아”(「멋진 사람」)로 특수화했으나, 이를 소년들의 고유성으로 충분히 전신(轉身) 또는 번역하지 못한 것도 이와 관련된 한계이겠다. 소년들의 부고가 오히려 그 죽음의 아우라를 박탈하며 “단어를 만들어서 나는 죽”(「홀에 모인 여러분」)이는 게임의 언어화로 돌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에듀케이션』이 문학사에 거의 유례없는 죽음의 전략을 구사했음에도 소년들, 아니 그들의 페르소나인 우리의 깊은 내면을 비켜간다면, ‘죽음’이 “캄캄한 가능성”(「화장실이 붙인 별명」)의 장치로만 소환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승일은 「연출 입장에서 고려한 제목들」을 계속 계상해갈 작정이라면, “선잠 자는 전봇대”를 잊지 않을 일이다. “더 많이 질문하기 위해 그들은 서서 잔다”(「선잠 자는 전봇대」)는 전봇대의 생리는 기계화된 죽음의 상황극 속에 그 허구성을 뒤집는 ‘산〔生〕 죽음’을 파종하는 지혜에도 친절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