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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감정의 오감도(五感圖)

김유진 소설집 『여름』

 

 

박인성 朴仁成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필요한 문장들과 다시 서사하기: 김중혁 윤성희 박형서의 최근 소설들에 대하여」 「경험의 파괴 이후의 서사」 등이 있음. clausewize@naver.com

 

 

2031삶에 대한 이성적 이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적인 것들이 만드는 풍경이 있다. 우리 내면을 비추는 그 풍경 속에서만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들 또한 존재한다. 감각적인 것들이 우리 몸에 내린 뿌리라면, 이름 모를 감정들은 그 양분 속에 열매 맺는다. “수백 수천개의 모서리가 만들어내는 질감, 경계가 희미한 형태들이 주는 모호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감정을 가진 형태들을 풍경이라 부릅니다”(여름, 77면) 같은 구절은 김유진(金柳) 특유의 세계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리라. 정물처럼 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관찰, 쓸쓸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관계의 지평에서 출현하는 이러한 풍경은 또다른 우리 자신이다. 가장 먼 곳으로부터 와서 가장 절실하게 우리를 사로잡는, 이름 없는 감정이라는 우리 자신의 얼굴.

김유진의 두번째 단편집 『여름』(문학과지성사 2012)은 대단한 서사나 비()일상의 모험을 다루지는 않는다. 단정한 시선과 목소리로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을 따름이지만, 이 이야기들이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적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위해 삶을 번역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언어의 무력함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활자화된 말들은 커튼에 수 놓인 규칙적인 무늬처럼 의미 없는 것들”(우기, 111면)이라면, 때때로 언어는 그러한 무의미한 무늬들이 퍼져나가는 파문(波文) 속에서만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사물로서의 풍경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태어난 해의 여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 그해 여름의 풍경에 대해서는 조금 말할 수 있겠군요.”(여름, 84면)라는 언술은 김유진의 소설적 언어가 삶에 대한 통찰과 상동적임을 알게 해준다.

「바다 아래서, Tenuto」에서 노년의 K가 오랫동안 먼 기억 속에 있었던 자신의 유년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그가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었”(12면)던 일상 속에서 다시금 마주치는 풍경들을 온전히 객관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능한 풍경 앞에서 관찰자로 머물고자 했음에도 그는 이내 감각적인 것들의 내면화 속에서 결국 “자신이 아끼는 풍경의 일부가 되”(34면)는 경험에 이른다. 기억은 차츰 무뎌지지만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삶이란 그러한 풍경들을 언제고 발견해낸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통해 “뒤늦게 감정을 배우고 있”(32면)다는 점이다. 언어도, 이해도 아닌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감정의 풍경, 풍경의 감정이 존재한다.

「희미한 빛」에서 서술자가 “B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용인해야 할지 감당할 수 없었”(54면)던 것처럼, 『여름』의 인물들은 타인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일부 체념하고 있다. 그러나 사물과 자연물이 내면의 풍경을 형성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몰이해와 체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자로서의 삶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언제나 뒤늦게 감정의 열매들을 맺는다. 또한 그 결과물을 기존의 언어로 손쉽게 이름 붙이고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김유진이 만들어낸 풍경의 독특함은 삶이나 관계의 풍성함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앙상함, 혹은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의 내면으로 낙하하는 와중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눈이든, 비든,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내린다는 것이 중요했다.”(121면) 사물들뿐만이 아니라, 낙하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입체적 풍경이 가능해진다. 낙하한다는 것은 타인의 이해 없이 저 홀로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언어는 그처럼 홀로되는 경험 속에서만 새롭게 깨어나는 감각들이 통과하는 투사체다. “나는 공간을 가진 자음들, 이를테면 ㅇ, ㅎ, ㅂ, ㅁ, ㅍ 같은 자음들이 가진 빈 곳을 채우며 시간을 보냈다.”(A, 157면) 구멍 뚫린 언어와 구멍 뚫린 마음. 마음의 풍경은 그처럼 차라리 공백에서, 타인이 이해할 수도, 양도할 수도 없는 형상으로 낮은 곳에서부터 자라나 이윽고 우리 자신과 눈을 맞출 것이다. “고목처럼 서 있는 늙은 내가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나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눈은 춤춘다, 146면)

김유진이 그려낸 내면의 풍경에 의해 새롭게 우리가 배워나가게 될 감정은 애초에 구획되지도 명명되지도 않는 형태로 우리 삶에 정위(定位)한다. 존재의 무의미성과 불가해함에서 솟아나는 명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내면의 감정을 우리 자신의 얼굴로 마주하게 한다. 이처럼 『여름』은 감각적인 것들의 풍경을 직조함으로써 새롭게 시적인 소설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감각적 미문(美文)으로서가 아니라 소설적 언어에 대한 질문으로서, 최근의 한국소설의 문학적 시도에서도 흔하지 않은 위치에서 김유진이 뿌리를 내린 소설적 풍경이 기대된다. 감각적인 것들, 시적인 것들을 통해 자라난 소설적 언어가 소설 그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는 풍경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