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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수박 『사람 냄새』, 보리 2012

김성희 『먼지 없는 방』, 보리 2012

화가 난다

 

 

최규석 崔圭碩

만화가 mokwa77@hanmail.net

 

 

7567건강하고 착했던 딸이 삼성반도체에 입사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백혈병으로 쓰러졌다. 아버지는 ‘이 큰 회사’와 불화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표를 쓰고 산재 요구를 거두는 대신 딸의 치료비를 약속받는다. 딸은 죽었고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를 도와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지는 도움을 받을 만한 곳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가 아는 세계에서는 정당도 언론도 근로복지공단도 ‘이 큰 회사’와 불화하고 싶어하지 않았다.(『사람 냄새』)

삼성반도체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남편이 백혈병에 걸렸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아내는 아이들 아빠가 죽은 지 2년여가 지나서야 그 죽음이 산업재해일지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제야, 아무런 의심 없이 일했던 반도체 생산공정 하나하나가 인체에 해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철저하게 깨끗했던 그 생산환경이 상품을 위한 것이었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먼지 없는 방』)

남은 가족들은 아마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알았더라도 세상 망치려는 족속이거나 자신과는 상관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이 큰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허영만도 강풀도 아닌,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었을 김수박, 김성희라는 두 작가를 만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엮어냈다. 두 작가는 깊이 듣고, 성실하게 공부하고, 집요하게 그렸다. 르뽀문학의 전통이 일천한 환경에서, 르뽀만화는 더욱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두 만화가는 묵묵히 새로운 길 하나를 닦았다. 그 용기와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최근 취재에 기반한 논픽션 만화들이 간간이 나오고는 있지만 만화가들에게 르뽀라는 장르는 여전히 낯설고 힘든 영역이다. 대부분의 만화가가 전문적인 취재기법을 배운 적도 없거니와 오랜 기간 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건도 아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글이나 영상매체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인물의 복장, 주거공간, 기계의 생김새 등의 세세한 부분—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야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생산설비처럼 익숙지 않은 소재라면 그림쟁이의 고생은 몇배가 된다.

평자였더라면 그 고생이 두려워서 슬쩍 건너뛰었을 법한 장면을 두 작가는 참으로 집요하게, 죽은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노동을 했는지 독자에게 한점도 빼지 않고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려낸다. 특히 김성희는 반도체업체 신입사원의 교육용 자료로 써도 모자람이 없어 보일 만큼 생산공정을 성실하게 묘사한다. 처음에는 ‘뭘 이렇게까지 자세히 보여주나’ 싶었다가 그 과정을 지겹도록 보고 나니 60여명의 죽음이 그제야 실감이 난다.

책을 읽는 내내 화가 난다. 산재신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약속했던 알량한 치료비마저 떼어먹는 국내 최대기업이나, 그 너른 품 안에서 기생하는 언론이나 병원, 국가기관에 대한 화는 아니다.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고, 상식이란 관계의 유지를 위한 인간 공통의 계약서다. 그래서 관계에서 벗어나면 상식은 행동을 제약하지 못한다. 대다수 인간은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나빠질 수 있는 만큼 나빠지고, 우리는 자본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허용했다. 오래전에 계약서를 찢어버렸을 그들에게 인간취급 해달라는 항변은 포식자의 아가리 앞에 놓인 초식동물의 생존권 선언처럼 공허하다. 그래서 삼성에, 국가에 화내고 싶지 않다.

1등 기업에 딸이 들어갔다며 기뻐하던 부모의 얼굴에 화가 난다. 회사에서 금지를 하는데도 기어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으쓱해하며 시내를 활보하는 갓 스물 어린 소녀들의 순박한 자부심에 화가 난다. 기껏 몇십분 들렀다 가는 VIP들은 완전무장을 하고서야 들어오는 작업공간에서 하루 종일 마스크 한장 달랑 쓰고 일했던 그들의 무던함에 화가 난다. 치료비를 줄 테니 사표를 쓰고 산재신청을 하지 말라는 회사 관계자에게 고맙다며 산에서 딴 송이를 들려보내는 그 순진함에 화가 난다. 이 화가, 몹쓸 짓을 하고 도망친 성폭력범은 놔두고 되레 봉변을 당한 여성에게 왜 밤늦게 돌아다녔느냐고 나무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화가 나는 건 어쩌지를 못하겠다.

과자를 주겠노라 아이들을 꼬이는 어른을 경계하라 가르치면서 그 아이들을 죽일지도 모르는 기업에 대해서는 누구도 가르치지 않는다. 기업이 유포하는 자랑스럽고 선한 이미지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도록 방치하고 동조하고 있다. 성폭력이나 유괴를 예방하는 교육이 세상 모든 어른에 대한 증오를 심는 것이 아니듯, 산재를 예방하는 교육이 기업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당할 폭력을 미리 알려야 한다. 알지 못하면 폭행을 당하는 순간에도 제 몸이 상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이 사회는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들만 길러내고 있다.

폭력에의 감수성이 거세된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경계의 저편 멀찍이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본다. 죽음을 지나고서야 그것이 폭력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들의 오열은 그 죽음이 어째서 폭력에 의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고립된다. 그들이 마주선 그 간극을 좁혀야 한다. ‘이토록 성실하고 순박한 노동자들에게 저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라는 절규도 그만 듣고 싶다. 그 순박함이 자신을 죽이고, 그 순박함이 타인의 죽음을 그저 ‘딱한 일’로 여기게 한다. 억울한 죽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순박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스스로를, 서로의 삶을, 그것이 깨어지기 전에는 돌아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화가 난다.

이 두권의 책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급적이면 아직 노동을 시작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고 세상에 상존하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익히고 세상에 발을 딛기를 권한다. 그래야 서로를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