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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초원민주주의와 유목제국주의

김형수의 『조드』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1. 두 물음

 

초원의 푸른 늑대 테무진1)이 몽골 내부를 통일하고 칭기스 칸으로 추대된 1206년에서 마무리된 『조드』(자음과모음 2012)의 책등에는 ‘김형수 장편소설’이 뚜렷하다. 굳이 엄밀함을 가장하면, 두개의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조드』는 한국문학인가? 『조드』는 소설(novel)인가?

김형수(金炯洙)의 몽골 역시 방현석(邦賢奭)의 베트남, 유재현(劉在炫)의 캄보디아, 그리고 전성태(全成太)의 몽골처럼 위기에 함몰한 민중문학의 출구로서 선택된 문학적 장소다.2) 그런데 『조드』에는 한국/한국인이 완벽히 부재한다. 그런 예로 내전 이후의 캄보디아를 탐사한 유재현의 연작 『시하눅빌 스토리』(창비 2004)가 없지 않지만, 한국 상품들이 출몰하기도 하고, 캄보디아에 파견된 북조선 군관을 주인공으로 하는 편도 있어, 『조드』에 비하면 양반이다. 김형수의 『조드』는 뜻밖에도 자의식이 가장 엷은 편이어서 오히려 젊은 소설가 강영숙(姜英淑)의 『리나』(문학동네 2011)와 통하는 바 없지 않다. 어린 탈북자 리나의 파란만장한 도정을 그린 이 장편은 최서해(崔曙海)의 「탈출기」(1925) 새 버전이거니와, 그럼에도 그 지향은 해방운동에서 최종적 가능성을 꿈꾸는 「탈출기」와 비연속적이다. 과연 『리나』의 세상(=소설) 안에 구원의 희망은 없다. 중국을 떠돌다 한국행을 의도적으로3) 포기한 채 몽골로 넘어가는 데서 마무리되는 『리나』는 탈출 그 자체가 목적으로 된 기이한 탈출기다. 그리하여 작가는 끈덕지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지명, 모든 국명을 지운다. 우리 시대의 보편적 불모성을 환유하는 상징으로 삼으려는 작가의 충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고의적 무국적화란 탈북의 소비와 멀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4)

물론 『리나』의 유사-무국적성은 『조드』와 다르다. 『조드』에 등장하는 모든 장소는 터주(genius loci)의 영성(靈)을 둘러쓰고 세심히 특화되어 몽골의 위대한 지리를 화엄(華嚴)한다. 『조드』는 몽골에 바쳐진, 한국어 최고의 오마주다. 이 작품에 대한 몽골인의 열광은 대단하다. “소설 『조드』가 칭기스 칸의 전쟁영웅담을 그린 케케묵은 이야기였다면, 유목민들의 현란한 기마술과 속도전을 미화하는 전술・전략의 병법서였다면, 몽골의 신화이자 역사인 『몽골비사』를 가공한 역사소설에 불과했다면, 그건 수많은 몽골서사 중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드』는 첫 장부터 전혀 다른, 매우 새롭고 독특하면서도 유목민의 생각과 삶이 고스란히 재현된 완벽한 ‘유목’소설이었다.”5) 이 작품은 몽골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을 압도한다. 몽골에 대한 경의가 전경화한 『조드』에서 김형수는 한국 작가라기보다는 몽골 작가다. 강영숙이 의식적으로 무국적이라면, 김형수는 슬그머니 국적을 이월한다.

그럼 『조드』는 몽골문학인가? 물론 아니다. 이 작품이 한국어로 씌어졌다는 점에 새삼 유의할 것인데, 더구나 이 소설의 한국어는 얼마나 각별한가. “새끼 밴 암소처럼 걸음이 더딘 말띠 해, 서력으로 1174년 정월의 일이다.”(134면) “말 등뼈 산 안쪽에는 커다란 내장을 구겨넣은 것처럼 둥글고 작은 등성이가 여러 겹 포개져 있었다.”(145면) “점점 사나워지는 돌개바람에 어둠이 유리처럼 조각난 것 같았다.”(1139면) “먼저 죽은 세상의 아들은 모두 어머니의 눈 속에 남는다……”(1210면) “하늘에서 별빛이 거미줄을 타듯이 반짝이며 내려오고 있었다.”(1266면) “어머니 안에는 언제나 그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있었다.”(1290면) “밤이 깊으면 대지는 귀를 닫는다. 그 고요 속에서 메르키드의 노래가 숨질 것이다.”(1335면) “눈 덮인 광야란 외부가 없는 감옥과 같다.”(263면) “달리는 말 위에는 스승이 없다.”(2147면) “칸! 땅 위의 모든 암컷에게는 수컷을 경쟁시키는 슬기가 있습니다.”(2234면) “어찌하여 당신의 미래를 공격하는 겁니까?”(2255면) “얘야, 물이 법이야. 물을 마셨으면 그곳의 법을 따라야 해.”(2273면) “오늘은 바람마다 그림자가 지는구려.”(2297면) 몽골과 몽골인과 몽골어의 알맹이를 움키려는 노력이 한국어로 이행하는 순간의 스파크가 눈부시다. 한국어의 영토가 새로이 개척되었다. ‘불신의 자발적 정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 상태로 몽골이란 대상에 어린아이처럼 스민 그 마음결로부터 세계사를 진동한 팔백여년 전 몽골초원의 역사(役事)를 한국어로 파지한 『조드』라는 문학적 사건이 출현한 역설이 종요롭다.

 

 

2. 악마론과 영웅론

 

칭기스 칸 서사는 악마론과 영웅론으로 표나게 갈라진다. 대체로 근대유럽은 그 침략의 기억을 일방적으로 과장함으로써 악마론에 기울었으니,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6) 그런데 르네상스시대의 작가와 탐험가들은 칭기스 칸과 몽골을 높이 찬양했으니,7) 모험적 시민의 시기에는 영웅론, 식민주의적 부르주아 시기에는 악마론으로 그네를 탔던 모양이다. 그때그때 유럽의 내적 요구 따라 칭기스 칸의 상()도 요변을 면치 못한 바이지만, 2차대전 때 독일과 소련에서 일어난 몽골 붐은 양분론을 넘어선다. 탱크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Blitzkrieg)이 몽골의 기병전을 응용한 전술이라는 점도 흥미롭거니와, 소련이 러시아군을 격파한 몽골 별동대의 깔까(Kalka)강 전투(1223)를 모범으로 독일군을 소련 땅 깊숙이 끌어들여 각개격파하는 전술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던 것8)은 더욱 그렇다. 알다시피 소련은 몽골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곳이기에 그 증오가 가장 극적이거니와, 오죽하면 그 시기를 ‘몽골의 멍에’(Mongol Yoke, 1237~1480)라고 지칭할까. 그럼에도 기나긴 지배의 기점으로 되는 깔까강 전투의 교훈을 독일 반격에 활용했으니 참으로 ‘역사의 간지(奸智)’다.

결국 소련은 (외)몽골을 지배한다. 혁명(1921) 이후, 실제로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편입된 몽골에 대해 소련은 철저히 억압적이었다. 칭기스 칸 탄신 800주년 행사(1962)를 준비하던 투무르오치르가 돌연 숙청당한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듯,9) 그때 칭기스 칸은 금기였다. 소련이 해체되고(1991), 몽골이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이행하면서(1992), 칭기스 칸은 다시 몽골로 귀환하였으니, 무려 70년에 긍하는 그 시절을 ‘소련의 멍에’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중소분쟁의 와중에 몽골 논쟁이 발생했다. 19644월, 소련의 기관지 『쁘라우다』(Pravda)가 칭기스 칸을 비난하자 몽골의 지배 덕분에 더 높은 문화를 알게 되었으니 소련은 몽골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중국이 반박한 것이다.10) 사실 원(, 1271~1368)을 달가워하지 않는 한족의 중국도 몽골 악마론에 가깝다. 그리하여 몽골에 대해 중국 역시 식민적이었다. 20세기 내내 러시아와 중국은 칭기스 칸의 고향을 나누어 갖는 협정—전자는 고비사막의 북부漠北인 외몽골을, 후자는 그 남부漠南인 내몽골을 차지한다—을 유지해왔던 터다.11) 마치 무주공산의 상징조작 대상으로 전락한 칭기스 칸의 운명이 기구하다. 몽골의 침공에 떨었던 유럽과 중국에서 부풀어오른 악마론의 속내는 사실 영웅론과 멀지 않다. 악마론이란 증오로 위장된 영웅론이거니와, 요컨대 악마와 영웅은 하나다. 악마를 응징한다는 명분 아래 바로 그 악마(=영웅)의 뒤를 따라 아시아 또는 약소국을 침략한 자기 분열이 무섭다.

이에 비하면,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로서 인도와 일본에서 다시 발견된 칭기스 칸은 악마론이 배제된 영웅론이다. “유럽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어리석다. 그러나 아시아의 위대함을 잊는 태도 또한 어리석다.” 이 성숙한 균형 속에서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칭기스 칸에 푹 빠진 네루(J. Nehrū)12)의 내면은 단박 짐작되거니와, 일본은 어떠한가? 몽골인・한족/고려인으로 이루어진 혼성군의 일본침략을 ‘원구(元寇)’라고 낮추면서도 칭기스 칸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높이는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 중에서도 압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 무장 미나모또노 요시쯔네(源義經, 1159~89) 전설이다. 홋까이도오(北海道) 개발이 개시된 에도(江戶)시대 초기에는 에조찌(蝦夷地, 오늘의 홋까이도오)를 정복하고 대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다시 만몽(滿蒙) 붐이 고조된 메이지(明治) 후기 내지 타이쇼오(大正) 시대에는 몽골로 건너가 칭기스 칸이 되었다는 황당한 이바구13)로 발전하니, 그 적층성의 팽창주의가 놀라울 뿐이다. 몽골에 대한 증오를 내장한 ‘원구’와 그 수령은 숭배하는 칭기스 칸 붐은 결국 한통속이다. 전자로부터는 카미까제(神風)가 일본을 구원한다는 국가주의가 기원하고,14) 후자로부터는 초원의 낭만주의로 위장한 침략주의가 종작없이 나부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논의 역시 침략주의와 분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결국 기왕의 칭기스 칸론은 네루를 예외로 하면 거개가 영웅=악마론으로 수렴됨을 면치 못할 터이다.

칭기스 칸을 전유/소비하려는 이처럼 분분한 논의 속에서도 한국은 그동안 적요했다. 아마도 식민지 경험 탓이겠지만, 한국에서 몽골은 고려를 유린한 악마의 군단일 뿐이다. 항몽사관에 정지된 채로,15) 수교(1990) 이후 몽골의 현재와 이산가족처럼 해후한 한국은 당황한다. 살아 있는 몽골과 접촉하면서 한국인들은 자신이 타락한 몽골인임을 금세 눈치채게 마련이지만, ‘침략자’ 몽골과 오늘의 몽골 사이에는 다리가 없다. 과연 몽골의 현재에서 칭기스 칸의 과거를 투시한 김형수는 어떤 다리를 놓은 것인가?

 

 

3. 초원민주주의의 역동

 

이 작품은 악마론이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영웅론도 아니다. 제목 ‘조드’가 상징적이다. 몽골 유목민이 가장 두려워하는 조드란 초원을 엄습하는 겨울철의 이상 한파다. 밤에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강추위가 보통 닷새에서 열흘 정도 계속되는데, 한데서 자라는 몽골의 가축들이 속절없이 동사하는 대참변이 발생하던 것이다.16) 자무카의 입을 빌려 조드의 종류를 정리하는 대목(1116~19면)은 이 소설 속 백미(白眉)의 하나이거니와, 작가는 테무진을 비롯한 어린 영웅들을 몽골의 엄혹한 자연조건 속으로 환원한다. 안팎의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분열 속에 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족벌적 지도부의 무능이 가장 예각적으로 드러나는 포인트가 조드인 셈인데, 각기 연마한 재능에 따라 몽골인을 형제자매처럼 묶어세운 테무진의 초원민주주의17) 앞서 탈신분(脫身分) 공동체를 지향한 자무카가 몽골의 새 지도자로 떠오르는 계기 역시 조드로 혼란에 빠진 바로 그 찰나였던 것이다. 솔직히 조드를 칭기스 칸 출현의 결정적 요인으로 파악하는 그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지만, 조드의 압도적인 위용을 그려낸 필치도 신통하거니와, 위인전으로 되는 것을 방어하는 방편이라는 점에서 나는 작가를 지지한다.

사실 이 작품, 특히 1권에서 테무진은 영웅적 중심이 아니다. 그의 족보를 서사한 0장은 말하자면 일종의 신화적 배경인데, 저본은 『몽골비사』다. 민중적 해학으로 소란한, 보돈차르 몽학18)이라는 바보 할배 이야기가 단적으로 드러내듯 작가는 물론 이 신화를 민중의 눈으로 탈구축했다. 말하자면 유쾌한 민담으로 다시 쓴 것이다. 탈신화로 열리는 이 소설은 전개 과정에서도 주인공이 비켜서 있다. 자무카와 말치기 처여로 시작하는 1장으로부터 천신만고 결혼에 성공한 테무진이 메르키드족에 납치당한 아내 버르테를 자무카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하는 데서 마무리되는 5장에 이르기까지 1권 전체에 긍하여 테무진은 어디까지나 조연에 가깝다. 몽골의 어수룩한 신화와 위대한 자연과 간난한 유목민의 형상들이 칭기스 칸 서사를 끝없이 미끄러지게 함으로써 구성이 헐거운, 정말로 “칭기스 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칭기스 칸의 이야기가 아”닌19) 기이한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조드』의 칭기스 칸은 영웅=악마라는 독성(獨聖)이 아니라 몽골 유목민의 집합적 또는 평균적 초상으로 해체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제 ‘가난한 성자들’도 암시적이다. 이 구절은 딱 한번 등장한다. 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을 며느리 버르테가 “인간에게 어떤 올가미도 채우지 않는 가난한 성자”(1349면)라고 속으로 가만히 되뇌는 것인데, 당시 버르테는 구원의 희망 없이 메르키드에 억류 중이었다. 산달을 앞둔 그녀의 삶을 지키는 최후의 불씨가 바로 시어머니 후엘룬의 기억이다. 신혼길에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해 온갖 파란을 겪는 삶을 살아낸 후엘룬은 말하자면 삶의 오의(奧義)를 몸 받은 대지모신(Great Earth Mother)이다. 약탈당한 아내 문제로 괴로워하는 아들에게 어머니 후엘룬은 말한다.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이해하기에는 인간은 너무 작아.”(1290면) 버르테의 납치와 그렇게 태어난 아들 주치는 칭기스 칸 최대의 콤플렉스다. 이 대목에 대한 처리는 본마다 다를 정도로 예민한데, 김형수는 가장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납치당한 버르테가 메르키드 남자의 구애를 자포적으로 받아들이는 대목이나, 테무진이 그런 아내와 그런 아들을 고뇌 끝에 수긍하는 대목이 그럴듯하다. 상처받은 아들과 며느리의 유대를 회복시키는 결정적 매개자 후엘룬이 바로 ‘가난한 성자’다. ‘가난한 성자’를 굳이 해설한다면, 나 홀로 고고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소승도 아니지만, 중생을 구원한다고 큰소리치는 대승도 아니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도 가장 고귀한 인간적 진실을 살아가는 일상의 부처 하나하나를 가리킬진대, 가난한 성자가 비단 후엘룬만 지칭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과연 부제에는 복수를 나타내는 ‘들’이 또렷하다. 그러니 후엘룬도, 버르테도, 테무진도, 나아가 몽골 유목민 모두가 성자다. 『조드』는 가부장 전사(戰士)의 전제(專制)가 관철되는 개인적 주인공 소설이 아니라, 상처마저도 온몸으로 갈무리한 가모(家母)들의 온유한 지도 아래 근기(根機)대로 정진하는 집합적 주인공 소설인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조드』는 실명 소설이다. 오논강 여자, 족제비 할머니, 처여, 그리고 애꾸눈 늑대왕은 허구지만,20) 나머지는 역사 인물들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작가는 세심하게 칭기스 칸의 중심성을 분산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초원에 흩어진 작은 부족들을 연합의 길로 이끌어 마침내 몽골제국을 세운 ‘세계사적 개인’인지라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21세기에 다시 쓴 몽골의 건국신화 또는 건국서사시로 정위되게 마련이다. 정사(正史)의 축 조조(曹操)를 한미한 유비(劉)로 전복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보다도 정통적이니, 『조드』는 ‘중도적 주인공’의 눈으로 그 시대의 상층과 하층을 아우름으로써 총체성을 지향하는 루카치(G. Lukács)의 역사소설 모형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이 기준에 서면 이 작품은 역사소설이 아니다.

과연 서구 근대소설(novel)에 기초한 루카치의 역사소설 모형은 보편적일까? 중도적 주인공은커녕 역사의 주역들이 소설 속에서도 여전히 주역 노릇을 하곤 하는 『삼국지연의』는 함량 부족의 성공 소설에 지나지 않을까? 물론 아니다. 유비 삼형제의 종말도 그러하지만, 성공가도를 질주하는 조조마저도 끝은 허망하다. 어떤 불세출(不世出)의 영웅도 자기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면 가차없이 퇴장당한다. 역동적 인간학이 탈인간주의와 긴장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지연의』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 또는 역사다.21) 『조드』도 『삼국지연의』를 닮았다. 절대적 평등을 시현한 초원의 법에 따라 질풍같이 일어섰으되 그만큼 빠르게 사라진 전사들의 나라처럼 교훈적인 예는 드물거니와, 『조드』의 숨은 주인공은 가난한 성자들의 집합성을 표상하는 초원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드』의 간난한 인간주의도 그 상급의 탈인간주의와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부드럽게 손잡고 있지 않은가.

 

 

4. 몽학(蒙學)의 부흥을 위하여

 

그러나 2권에 들어서면 1권의 탈중심적 구도는 슬그머니 허물어져, 특히 8장 이후에는 칭기스 칸 중심의 영웅서사로 경사한다. 패장 자무카의 최후를 그린 빛나는 대목(9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테무진은 어느덧 칭기스 칸이다. 흥미롭게도 몽골에 앞선 유목제국 금()은 정착에 겨워 자기 안의 유목을 배신한 적으로 일방적으로 폄하되곤 하는데, 이 또한 칭기스 칸을 유목 몽골의 화신으로 지나치게 들어올린 탓일 것이다. 한마디로 유목에 대한 이상화가 과잉이다. 유목과 정착도 말하자면 적대적 공생관계다. 알다시피 13세기 몽골족은 유목민 발전의 정점을 찍었다. 침략한 유럽에 서서히 중심을 내어주고 하강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몽골 전사의 광대한 활동 영역이었던 유라시아 북방 초원이 거의 완전히 망각된 사정22)은 근대 이후의 궁핍한 몽골사가 증거하는 바다. 몽골 본향이 이처럼 활기를 잃은 데는 ‘초원의 비단길’이 ‘바다의 비단길’로 대체된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유목제국주의 따라 전세계로 흩어진 몽골의 전사들이 후계 제국들의 정착 지배자로 전신한 탓도 크다는 점 또한 잊을 수 없다. 금이 유목을 배신했다면 원도 배신했다. 금이 먼저 했을 뿐이다. 이는 모든 유목제국이 부딪힌 최대의 난제이니, 유목과 정착을 소통적으로 파악하는 안목이 종요롭다.

유목을 지금 한국에서 불러내는 데 대한 성찰이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 종작없는 노마디즘(nomadism)의 방패로 선택되기 일쑤인 칭기스 칸은 자칫 호리병 속에 봉인되었다 풀려난 악마로 변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몽골의 고려 침략만 해도 그렇다. 그 책임을 지금 몽골에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냥 묻어둘 일도 아니다. 원과 고려의 관계를 큰 시야에서 다시 보는 일은 그것대로 추진하되 그 침략의 실상을 분석하고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일은 칭기스 칸과 그 군단을 한국의 작가가 다루고자 할 때 명념할 핵심의 하나일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소설에 대한 몽골인의 열광에 대해서도 분석적일 필요가 없지 않다. 소련 종속기에 철저히 억압된 위대한 영웅의 기억을 되살리는 새로운 기폭제로 될 『조드』는 과연 몽골인들을 어떻게 고무할 것인가?

목하 몽골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에 자원 부국이라는 지경학(地經學)까지 겹쳐 이젠 미국도 넘실댄다. 야당 민주당의 완승에 고무되어 몽골을 방문(2012.7.9.)한 힐러리가 “자유와 민주주의가 서방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가 몽골”이라고 칭송한 일이 예사롭지 않다. 드디어 몽골에도 본격적 강대국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6월 몽골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화를 이끈 야당이 승리했다. 이미 대통령도 민주당 출신이니, 민주주의 시장경제 도입 이래 인민혁명당(구 공산당)과 엎치락뒤치락하던 몽골 정치가 이제 민주화 트랙에 연착한 것이다.23) 그러나 민주화가 만병통치는 아니다. 민주화 이후 오히려 양극화가 현안 중의 현안으로 부상된 한국 사정을 상기컨대, 유목에서 정착으로 변화하는 극적인 과정이 급속한 현대화와 중복된 몽골에서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된 양극화를 어떻게 치유할지, 테무진의 초원민주주의가 칭기스 칸의 유목제국주의에 승리하는 과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아마도 그때 몽골과 한국이 동아시아의 동지로서 진정으로 다시 만날 것인데, 올해는 칭기스 칸 탄생 850주년이요 한몽 수교 22주년이다. 마침맞게 출간된 『조드』는 한몽 우의를 기념할 최고의 선물이다. 2부를 고대한다. 한국 몽학(蒙學)의 부흥을 알린 『조드』가 서구 근대소설을 감싸안으면서 타고 넘어서는 포스트-역사소설로 우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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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비롯한 몽골어 발음은 몽골문학을 전공한 고자연 군에게 자문했다.

2) 방현석, 유재현, 전성태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졸고 「동아시아문학의 현재/미래」,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19~30면 참조.

3) 겉으로는 여주인공 리나의 의지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리나를 지속적인 유랑 상태로 두고자 하는 작가의 개입이 뚜렷하다. 리나의 의지로 위장한 작가의 의도에 가까워, 소설 내적 논리는 그만큼 약화된다.

4) 해설자는 이 소설을 ‘포스트모던 서사시’라고 규정한다. 탈북의 행렬을 그려내는 현실성이 빛나는 대목들이 적지 않기에 이 용어가 온전히 적실한 것은 아니지만, 목적지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근본에 있어서는 ‘포스트모던적’이다. 다만 이런 식의 포스트모던에 더 수용적인 해설자의 태도에 대해 나는 더 비판적이라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소영현 「포스트모던 서사시」, 『리나』, 문학동네 2011, 361~69면.

5) 두게르자브 비지야 「복원된 칭기스칸 노마디즘」, 『아시아』 2012년 여름호 351면.

6)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정영목 옮김, 사계절 2005, 365면.

7) 같은 책 358면.

8) 같은 책 368~69면.

9) 그럼에도 오늘날 몽골은 러시아에 우호적이고 중국에 비판적이다. 유원수 『몽골의 언어와 문화』, 소나무 2009, 228면.

10) 잭 웨더포드, 앞의 책 371면.

11) 같은 책 370면.

12) 같은 책 365~67면.

13) 田村實造 책임편집 『モンゴル帝國』, 人物往來社 1967, 106~07면.

14)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하따다 타까시(旗田巍)가 『元寇』(中央公論社 1960)에서 당시 일본을 구원한 힘은 카미까제가 아니라 “아시아 여러 민족, 특히 조선인, 또 중국인이나 베트남인의 저항”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졸고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1993),『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창비 2009, 152~53면.

15) 고려의 항몽전쟁을 소중히 갈무리하되 몽골제국의 세계사적 사명에 대한 복합적 이해도 아우르는 복안(複眼)이 종요롭다. 가령 몽골의 서양침략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동서시장을 결합한 몽골제국의 붕괴가 아시아의 몰락과 서양의 흥기를 야기했다는 아부-루고드의 분석은 참조할 만한 시각이다. 졸고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1998), 앞의 책 93~94면.

16) 어트겅체첵 담딘수렌 「한국의 가을하늘은 ‘행복의 아이콘’」, 『동아일보』 2012.9.21.

17) 초원민주주의란 신분 또는 씨족을 비롯한 토착 지표가 아니라 재능에 따라 발탁하는 기회의 균등성과 말 위에서의 평등을 사회원리로 실현함으로써 강력한 공동체를 창출한 테무진의 생활정치를 가리켜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18) ‘보돈차르 몽학’에서 ‘몽학’은 바보라는 뜻의 몽골어이다. 『몽골비사』, 유원수 역주, 사계절 2004, 26면.

19) 김영찬 「소통과 관용의 시적 상상력」, 『자음과모음』 2012년 여름호 310면.

20) 두게르자브 비지야, 앞의 글 354~55면.

21) 졸고 「새 시대 새 감각의 『삼국지』 탄생에 부쳐」, 『즐거운 삼국지 탐험』, 창비 2003, 4면.

22) 勝藤猛成吉思汗: 草原世界帝國』, 淸水書院 1972, 201면.

23) 이성규 「‘민주화’의 길에 들어선 몽골을 다시 보자」, 『동아일보』 2012.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