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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19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너무 많이 아는 아이들을 위한 가족 로망스
김애란론
윤재민 尹在敏
동국대 국문과 재학 중. yooonjaemin@gmail.com
악몽
공포영화의 고전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에서 퇴마신부 카라스는 아이 리건의 몸에 서린 악령을 퇴치하는 와중, 아이의 입을 빌린 악령의 사악한 대꾸에 끝내 동요하고 만다. “네 어미도 이 안에 있다.” 어머니의 말년을 방기한 것도 모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카라스 신부는 즉각 악령에게 자기 어머니의 처녀 때 성(姓)이 무언지 물어보는데, 악령은 이에 답하지 못하고 카라스 신부를 향해 더러운 토사물을 내뱉을 뿐이다. 악령의 앎이 자신이 생각한 만큼 깊지 않다는 것에 안심해서일까. 카라스 신부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의기양양하게 퇴마의식을 재개한다. 영화에서 이렇듯 악령 서린 아이가 내뱉는 이런저런 충격적인 ‘앎’의 발화들은 어른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악령이 서린 리건의 눈망울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그들의 치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리건이 발화하는 끔찍한 음담패설과 신성모독이라는 일련의 ‘앎’들은 지켜보는 어른들을 동요시킨다.
아직 몰라야 마땅한 것을 알고(혹은 안다고 가정한 채) 서슴없이 발화하거나 행동하는 아이들은 모든 문명의 골칫거리였다. 이들은 문명이 담지하는 온전한 성인적(成人的) 정상성과 성장의 도정을 훼손하여 사회의 기강과 존립을 뒤흔든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진정한 공포는 어쩌면 악령이 행사하는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전능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행하는 지나치게 원숙한 ‘앎의 발화’를 현현함에 있는지 모른다.
지금껏 공동체를 굳건히 지켜주던 온갖 종류의 가치와 가능성이 의문에 부쳐지고 산산이 부서져가는 이 시대에 ‘아이들의 앎’이 주는 끔찍한 악몽이 대두되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의 출생과 동시에 어미와 아이의 불화가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는 이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을 담고 있다. 기껏해야 미취학아동에 불과한 케빈은 엄마 에바에게 아이가 생성되는 과정을 적나라한 언어로 호기로이 설명한다. 케빈의 능글맞은 ‘앎’ 앞에서 에바는 무력한 몸짓으로 자신의 당황을 감추려 애쓸 뿐이다. 에바보다 몇수 앞을 내다보고 행동하여 에바의 악몽으로 현현하는 맹랑한 아이 케빈은 마치 70년대 악령 씐 리건의 현시태로서, 문명의 근간을 뒤흔드는 ‘아이의 앎’이라는 모티브를 이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반복하여 보여준다.
‘너무 많이 아는 아이’에 대한 악몽이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김사과는 한 소설을 통해 서울을 “카길 사의 소고기 패티를 얹은 흰 밀가루빵이며 그것의 다른 이름은 지옥”1)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성장하여 지금껏 생활하는 장소를 지옥이라 단언하는 ‘나’의 정조 한편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앎이 들어차 있다. 현재 스물다섯살인 ‘나’의 세계인식은 아주 오래전에 형성된 어떤 ‘앎’에 기초하는 것이다. “열다섯살인 나는 그곳이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다섯살 때도 그랬다. 스물다섯살인 나는 이제 끝이 아닌 세계를 어디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같은 책 234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 형성된, 천형과도 같은 앎에 대한 ‘나’의 확신은 모든 것이 악몽 같은 세상에 대한 파괴와 자해로 치닫게 되는데, 이러한 절망의 끝에서 ‘나’가 마주하는 것은 고작 또다른 형태의 앎, 앎의 악무한(惡無限)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윌리엄 에스 버로우스의 『와일드 보이즈』로부터 상상해내었고, 즉 이것 또한 카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같은 책 235면)
스스로를 악몽으로 현현하여 동세대의 실존적 문제의식을 비참으로 상연하는 김사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어른들이 아이들을 통해 투사하는 시대적 문제의식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닌 이 시대 전체가 앓고 있는 총체적인 문명사적 악몽이다. 루쉰이라면 인육을 먹고 자란 아이들을 미처 구하지 못했다고 개탄했을 게 분명한 문명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시절이다. 불과 몇년에 걸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촉발하고 있는 ‘아이들’의 문제는 대부분 악몽의 형태로 문명을 강타하는 중이다.2) 하지만 악몽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이들에 의한 파국적 서사와 전망이 창궐하기 직전, 이미 이를 예견하는 일견의 낭만적 가족 로망스가 존재했다. 악몽이라기보단 미몽으로 간주되던 그 가족 로망스 서사의 기저에 들어찬 실존적인 허무와 염세의 시차는, ‘너무 많이 아는 아이’의 계보 한편에 그녀가 쌓아올린 이야기를 두어야 마땅하다 역설한다. 그녀는 바로 김애란(金愛爛)이다.
기관
때론 비참과 절망을 아슬아슬하게 경유하면서 끌어올린 한줌의 농담으로, 때론 시시껄렁한 일상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비루한 삶의 진실로, 김애란은 어미와 아비를 둘러싼 미시적 일상의 생생한 경험을 ‘나’의 입장에서 술회하는 가족 로망스적 서사를 구현하는 데 동세대 어느 작가보다 발군의 기량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김애란의 기량은 특정 서사양식의 성공적인 변주로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녀가 가족 로망스를 통해 그려낸 서사 속 부모와 ‘나’의 관계에는 이제 막 성인으로서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청년 세대들이 마주한 실존적 난망함이 그대로 녹아 있다.
김애란의 첫 소설집 표제작이자 그 포문을 여는 단편 「달려라, 아비」는 온전한 ‘나’가 형성되기 이전, 어미 자궁 안에서의 생생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3)
‘나’는 온전한 내가 형성되기 이전의 태아기를 뚜렷이 기억할 만큼의 놀라운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비상한 기억력을 통해 「달려라, 아비」를 이끌어가는데, 이후 ‘나’의 기억은 ‘나’를 있게 한 부모의 정사(情事) 또는 그 행간을 가늠하게 하는 부모의 로맨스에 대한 명백한 앎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모의 비루한 첫 만남에서부터 보잘것없는 첫 정사, 피임 실패로 생성된 ‘나’의 탄생까지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음을 호기로이 고백한다.
꽤나 발랄한 어조로 서술한, 자기 생성 이전의 이토록 생생한 기억과 ‘앎’은 김애란의 소설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요 모티브이다. 중요한 것은 흔히 김애란식 ‘자기 기원서사’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발랄한 모티브의 이면에 숨겨진 불길한 인식이다.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넘어가보자. 열일곱 나이의 부모에게서 탄생한 아름은 급속히 늙어가는 조로(早老)의 불운을 타고난 열일곱 소년이다. 조로증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직면하여 또래라면 마땅히 누릴 실패의 경험을 박탈당한 아름의 인생의 경험은 「달려라, 아비」의 ‘나’의 경우처럼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시작한다.
쿵은 어머니 것, 짝은 내 것이었다. 쿵은 센 소리 짝은 여린 소리였다. 나는 긴 탯줄에 매달려 그 소리에 집중했다. 어머니의 심장은 오동통한 달처럼 내 머리 위에 떠, 나무가 초록을 퍼뜨리듯 방울방울 사방에 비트를 퍼트렸다. 그것은 정보량의 최소단위를 말하는 비트(bit)이기도 하고, 가수들이 음악을 만들 때 쓰는 비트(beat)이기도 했다. 이 비트(bit)와 저 비트(beat)는 몸 곳곳에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며 삐라처럼 흔들렸다.4)
자궁 밖 세상이 그 어떤 실패의 경험도, 사랑의 경험도 선사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름은 어머니 자궁 안에서의 조화롭고 안온한 경험을 온전히 기억한다. 어머니에게서 떨어져나온 이후 자신의 몰경험적 인생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아름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태아-영아기라는 경험의 기억에 천착한다. 자궁 안에서의, 그리고 영유아기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는 아름에게 부모의 행위와 경험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명백한 기원이자 모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은 이미 부모에 의해 온전히 주어진 것이며 아름은 따라서 의문과 방황을 모른다. 모든 것이 명백하여 의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 아름의 인식은 구체적인 삶을 통한 희로애락의 가능성 자체가 박탈된 아름의 인생과 자연스레 공명한다. 이후 아름이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신의 오롯한 기원인 부모의 로맨스와 정사를 발랄하게 서사화하는 것으로써 자기 인생의 의미를 증언하려 한다. 온전한 인생이 주어지지 못한 명민한 아이 아름은 이것만이 자신의 인생을 의미화할 유일한 방법임을 너무 많이 아는 것이다.
「달려라, 아비」의 ‘나’나 아름의 경우와 같은, 김애란 소설 속 자식들이 기억하는 부모의 로맨스나 정사의 특징은 그 안에 어떤 욕망의 증후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편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거대한 성기에서 나온 불꽃들이 민들레씨처럼 밤하늘로 퍼져나갔을 때. 아버지의 반짝이는 씨앗들이 멀리멀리 고독한 우주로 방사(放赦)되었을 때”(『달려라, 아비』 177면)라며 장난치듯 ‘나’의 물음에 대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발칙한 질문에서 그 어떤 불온한 기운도 느끼지 못한다. 부모의 정사를 묻는 ‘나’의 물음이란 음침한 근친상간적 질시도, 그렇다고 욕망에 달뜬 포르노그라피적 관음증도 아닌 지극히 순수한 차원의 ‘앎’에 대한 요구일 따름임을 아버지는 아는 것이다.
발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어린아이의 성욕에 관한 에세이에서 프로이트(S. Freud)는 ‘나’의 기원과 주체의 형성에 대한 의미있는 연구를 남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통상적으로 아이가 갖는 최초의 사랑과 의문은 자기 부모와 툭 튀어나온 미성숙한 자신의 성기로 향한다. 이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아이들의 성에 대한 생각이 그 윤곽을 잡아가는 것은 어떤 자의적인 정신작용이나 우연한 인상(印象)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성심리 구조상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5) 어째서 아이들에게 이 발칙한 사랑과 욕구가 ‘필요’한가. 그것은 자신에게 무차별적 사랑을 선사하는 부모와 선천적으로 달고 태어난 성기가 그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존재하는 이 명백한 대상에 대하여 아이들은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추론과 해답을 늘어놓는다. 예컨대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준다는 부모의 얘기를 듣고 황새 둥지를 찾아 저수지를 탐험하거나 성기 밑부분의 고환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추론을 하여 아이가 나온 이후 고환의 재생에 대해 고민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두루 경유하다 아이들은 이내 부모의 이야기와 자기 추론의 간극과 어긋남을 인식한다. 최초의 어그러짐으로 인한 이러한 앎의 유예는 이후 성숙한 주체의 ‘알고자 하는 의지’의 거푸집이 된다.
프로이트가 실증적으로 관찰한 19~20세기의 아이들과 달리, 김애란 소설 속 ‘나’와 아름 등은 결코 몰라야 마땅한, 자신에게 그냥 주어진 것들을 너무나 명백하게 자신의 기원으로서 알고 있다. 그들의 앎은 자기에 대한 의문, 주체적인 앎의 가능성과 맞바꾼 ‘가능성이 결여된 앎’이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부모의 존재가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기관과 같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몸속의 기관이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정상적인 인간성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 조건이기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온 지 오래이다. 기관이 아닌 무언가를 자신의 기관으로 간주한다는 건 해당 대상을 단순한 의미 판단 영역 이상의 위치로 고양시킨다. 이들에게 부모란 물리적 혹은 신체적(physical) 차원의 문제이다.
이렇듯 부모의 성적 욕구에 대한 선선한 앎과 천착이라는 김애란 소설의 가족 로망스 모티프에는 너무나 명백하여 결코 의문에 붙일 수도 도전할 방도조차 없는, 절대적인 기원 앞에 그 어떤 사유도 의문도 불가능한 ‘나’들의 실존이 녹아 있는 것이다.
수난
부모에 대한 물리적인 인식은 부모의 부재 시에도 위력을 발휘한다. 「도도한 생활」(『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의 ‘나’는 더이상 엄마가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엄마가 마련해준 피아노에 애착한다. 주인집 눈치 때문에 심심풀이로라도 연주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지만, 행여 피아노가 썩어버릴라 무리를 해서라도 건반을 두드려보는 등 ‘나’의 피아노에 대한 애착은 유별나다. ‘나’의 삶은 없는 살림에 피아노를 마련해 ‘나’를 먹이고 키운 엄마에 의존하여 형성된 것이다. 분에 넘치는 ‘나’의 ‘도도한 생활’을 상징하는 피아노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엄마의 고단한 일생 그 자체가 물화된 대상이며, 나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피아노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피아노는 ‘나’에게 엄마가 증여한 엄마와 ‘나’의 명백한 연루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엄마라는 이름의 물자체(Das Ding an sich)를 대리하는 것이다. 엄마가 갖은 고생을 통해 지켜내고 증여하는 데 성공(?)한 피아노에 담긴 처절한 함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나’는 어떤 고생을 하게 되더라도 피아노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부모와 ‘나’의 연루에 대한 물리적 인식이 ‘나’의 입장에서 일종의 수난이 되는 이같은 상황은 김애란 소설에서 자주 반복된다. 문제는 대체로 수난을 겪는 ‘나’는 이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나 의문을 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도한 생활」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앞서 언급한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인공 아름의 불가사의한 어른스러움에서도 이러한 정조를 확인할 수 있다. 다소 범박한 가정이긴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또래 아이들이라면 한번쯤 해봤을 법한 ‘이럴 거면 대체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는가’ 같은 부모에 대한 일말의 원망조차 아름은 품고 있지 않다. 엄밀히 따지자면 결코 부모의 잘못이랄 수 없지만, 아름이 정확히 아는 대로 현재의 아름을 있게 한 것이 오직 부모의 만남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아름에게 주어진 천형은 굳이 따지자면 오직 부모에게만 그 연원이 있다 말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아름의 대응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노숙하다. 어른스러움을 뛰어넘어 가히 달관이라 불러야 마땅한 아름의 극단적인 노숙함은 삶의 불행 앞에서 동요하는 보편적 개인의 면모를 보이는 아름의 부모를 한없이 미성숙하게 비치게 할 정도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은 엄마의 돌출행동을 알게 된 아름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두근두근 내 인생』 143면)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열일곱살이라니. ‘나’가 피아노에 서린 어미의 비루하고 처절한 삶을 물리적 차원에서 알고 애착하듯이, 아름은 어미의 가출에 서린 맥락에서 즉물적인 사랑을 알고, 물리적 나이에 맞지 않게 이를 달관하듯 받아들인다. 이후 아름은 소설을 쓰는 것으로 자신과 부모의 운명을 ‘힐링’한다.
이처럼 부모의 모든 것을 즉물적 차원으로 인지하는 자식의 태도는 부모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는 김애란 소설의 숱한 아버지들이 달리는 것으로 그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애란의 가족 로망스 속 모든 아버지는 항상 어딘가 모자라고 비루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버텨온 장삼이사이다. 세상에 커다란 손(損)도 익(益)도 끼치지 못하는 이들의 희미한 인생은 물리적 차원에서 ‘나’와의 관계를 획득함으로써,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려진다. 아버지는 그저 달리듯 살아간다.
“아버지, 형은 공부도 못하고 눈이 나쁘니 티브이는 그냥 보는 걸로 하지요.”
“상관없다. 테레비를 없애야겠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기보다 가장으로서 뭔가 결정해야 되는 순간,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뭔가 하기는 해야 할 때 내리는 엉뚱한 결론 같은 거였다.6)
목 늘어난 메리야스 차림으로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나오는 아프리카 기린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버지. (…)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그녀 집에 종착한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7)
그리고 ‘나’는 그저 이를 받아들인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저 그것뿐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살아내고 견뎌낸다. 김애란의 어머니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리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느끼게 하는”(「칼자국」, 『침이 고인다』 152면), 마치 칼자국 같은 물리적 상흔을 입혀 ‘나’의 육체에 기거한다면(「도도한 생활」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뻔뻔스럽게 땅에 발을 딛고 거부할 수 없는 물리적 질서를 눈앞에서 증명함으로써 ‘나’를 옭아맨다. 그럼으로써 아버지라는 이름의 장삼이사의 인생은 ‘나’에 의해 의미를 획득한다.
부모의 삶이 증명한 물리적 질서를 철저히 받아들여 의미화함으로써 완성된 자기 기원과 의미의 명백함은 불현듯 알 수 없는 수난의 형태로 ‘나’를 엄습한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의 그녀는 하루하루가 불안한 생활고에 재앙처럼 들이닥친 아버지를 견디는 와중, “아버지가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힘들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많은 땀을 흘리는” 동시에 “그렇게 행복한 꿈을 꾸면서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111면)을 지을 수밖에 없다. 움직이는 이는 아버지이지만 힘든 이는 그녀인 역설적인 상황. 의식의 영역에선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인 아버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손쉬운 행위가 무의식의 영역에선 너무나 견디기 힘든 무엇으로 나타난다. 이는 아무런 의문 없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받아들이는, 손쉬운 태도와 관점이 억압해온 불안의 무의식적 귀환이다. 깨어나선 “진짜 이유 같은 건 없어”(같은 책 111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억압과 고통이 실상 ‘이유 없는 명백함’이라는 의문 불가 상태에서 비롯한다는 것. 이후 그녀는 또다시 헤어나올 수 없는 악무한에 빠지고 만다.
부모라는 이름의 물리적 질서에 대한 의문 불가능한 앎과 그 악무한을 내면화한 ‘나’의 면모는 부모의 품을 벗어난 상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아르바이트라는 쳇바퀴를 도는, 의문 자체가 불가능한 삶 속에서 ‘나’는 달리듯 반복되는 것들에 애착하여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는다. “1930년에 처음 등장한 이래 21세기가 될 때까지 네시의 이야기는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점은—그것이 한번도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사랑의 인사」, 같은 책 143면)
사회로 진출한 가족 로망스 밖 김애란 소설의 ‘나’들을 묶어주는 공통사항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인사」의 ‘나’와 같은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그것도 아니라면 도저히 미래를 그리기 힘든 비전 없는 처지일 것이다.
1999년 봄 노량진 역—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 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 꿈도 내 꿈도 그러니까 대학생과 ‘좆나’ 똑같은 대학생.8)
이것은 농담처럼 말한 것이지 결코 농담이 아니다. 노량진 재수학원이라는 비참하고 답 없는 입시 수용소 안에서, 그들이 되고 싶은 건 어디에나 널려 있는, 된다고 해도 하등 나아질 게 없는, 그저 ‘좆나’ 흔해빠진 대학생일 뿐이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들은 너무나 명백하게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되고 싶은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흔해빠진 무엇임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이를 행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의 ‘앎’은 그간 농담으로 애써 가려왔던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절망적 세계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상황과 인식을 결코 밖으로 완전히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명백한 세상 속에서 자신이 품은 최소한의 의문이나 욕망을 드러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그들은 현재 그들의 실존을 현현하는, 그들과 ‘좆나’ 똑같은 처지의 가까운 또래들을 혐오하거나 경계하는지 모른다. 「노크하지 않는 집」의 ‘나’가 같은 처지의 네 여자에게 품는 의심과 공포는 의미심장하다. 자기 내면, 즉 일인칭 안으로 꼭꼭 숨겨두고 싶은 자신의 비참이 똑같은 상황에 처한 네명의 여자들에 의해 현시됨을 그들의 방을 통해 확인할 때, ‘나’는 평정심을 잃고 만다. 김애란의 등단작이기도 한 이 소설을 기점으로, 이 막연한 공포 이후로 김애란의 ‘나’들은 발랄한 농담을 가장하고 부모의 품 안에서의 모든 일과 자기 기원의 전모를 안다고 가정하여 그들이 처한 실존에 따른 불안을 은폐한다. 그들은 자신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정한 처지에 대한 인식을 무언가에 들키지 않기 위해 강박적일 정도로 기꺼이 그들의 ‘앎’이 되고자 하는 대상에 천착한다. 그들의 부모는 기꺼이 그들을 위해 삶을 버텨내고 끊임없이 달린다. 그들의 탄생을 위해 로맨스를 하고 정사를 벌인다. 그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알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들의 전부는 아니다.
시차
김애란의 최근 소설집 『비행운』(문학과지성사 2012)에 실린 「서른」은 노량진 학원가에서 만난 인연으로 알게 된 언니에게 ‘나’가 보내는 편지형식의 고백체 소설이다.
‘나’가 언니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한때 제자였던 혜미를 다단계판매에 빠뜨렸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겪었던 성장의 도정에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고 비관하는 ‘나’는 판매실적에 대한 욕망에 눈멀어 스스로의 손으로 혜미를 ‘내’가 되게 한다. 언젠가 언니가 ‘나’에게 남긴,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는 말이 ‘나’의 마음을 헤집는다. ‘나’에서 혜미로 반복되는 ‘오래된 미래’에 대한 암시인 언니의 경구는, 자신을 옥죄는 짙은 폐색감이 온전히 자신의 책임으로 다음 세대로 전승됐다는 ‘나’의 절망을 암시한다.
잔망스럽게 자신의 비관적 실존 의식을 부모를 경유하는 발랄한 가족 로망스로 치환하여 애써 감추던 김애란 소설의 ‘나’들은 자신에게 다음 세대가 있다는 인식 앞에서 노골적으로 그간 숨겨두었던 비관을 표출한다. 이러한 인식이 가장 표면화된 사례가 단편 「벌레들」일 텐데, 이 작품은 그간 김애란이 숱하게 반복해온 부모의 임신과 출산의 모티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완전히 다른 정조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재개발지구 A구역을 곁에 둔, 지하와 옥탑으로 구성된 장미빌라에 신혼집을 마련한 넉넉지 않은 신혼 주부인 ‘나’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상태로 출산예정일을 기다리고 있다. 집안에서 곰팡이를 닦아내고 벌레를 제거하며 아이가 태어나길 고대하며 지내던 중, 불의의 사고로 결혼반지가 창밖 A구역으로 떨어지게 되고 ‘나’는 반지를 줍기 위해 A구역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벌레가 들끓는 더러운 곳에 떨어져 아이를 출산하고 만다. 소설의 말미, 출산의 당사자인 ‘나’가 감각하는 시공간은 너무나 눅눅하고 암울하다. 어미의 안락한 자궁에서의 기억이라는 앎과 전혀 다른 생생한 실재. ‘나’가 직접 체험하는 출산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으로, 영원한 ‘나’의 상흔으로 남을 것이다.
「벌레들」의 이 음울함은 기존의 임신과 출산을 다루는 김애란의 발랄한 서술양식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이 양자의 환원할 수 없는, 지젝식으로 얘기하자면 일종의 시차(parallax)가 나타나는 듯한 온도 차는 아랫세대와 윗세대 양자 사이에 끼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에 연루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들의 실존적 아포리아 그 자체를 체현한다. 이들은 윗세대(부모)가 나의 모든 것을 있게 했다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에 의문을 품지 못하는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아랫세대를 인식하여 미래를 상정해야 하는(이것이 「벌레들」에 나타난 출산 모티프의 근원일 것이다) 상황에 처했다. 이 양자의 관점은 공평하게 명백하여 이중 한쪽만 취사선택해 이들을 규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품고 있는 당혹스러운 가능성 때문에 결코 그 자리에 마냥 폐색해 있을 수도 없다. 하나가 되지 못한 분열된 얼굴로서 그들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당혹스러운 시차적 오차(parallax reading error)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곤 다시 아버지와 입술을 포갰다, 바람은 ‘아무것도 아닐’ 리 없는 그들의 사연을 가늠하며, 여름의 미래를 예감하며, 이미 지나온 자리로 다시 돌아가 두 사람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에 정신이 팔려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바람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절을 계절이게 하려 딴 데로 떠날 차비를 했다. 하늘은 높고, 매미의 매끈한 눈동자 위로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뭉게구름이 지나갔다. 산이 꾸는 꿈속에서, 매미들은 소리 죽여 노래했다. 그때 우리는 그걸 원했어. 그때 우리는 그게 필요했어. 그때 우리는 그걸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때 우리는 그걸 했어. 그때 우린 그걸 한번 더 했어. 그때 우린 그걸 계속했어. 그리고 우리는 그게 몹시,
‘좋았어.’9)
아이는 우리가 싱크대 앞에서 몸을 섞은, 독한 세제 때문에 온몸이 얼얼했던 그날 밤 생긴 듯했다. 장미빌라에 들어온 첫날, 아이도 내 배속에 입주한 셈이다. 우리는 어렵게 출산을 결심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3년 후에나 가능했을 일이지만. 아이를 두번이나 포기한 경험이 있어 결정이 쉽지 않았다. 결혼 전에 한번, 결혼 후 한번, 둘 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처음 든 생각은 ‘당분간 집을 사긴 글렀구나’ 하는 거였다. 거의 다 왔다고 여긴 마라톤 코스가 한없이 늘어난 느낌. 내심 기다렸던 임신인데도 실망감이 들었다.10)
자신을 있게 한 부모의 정사를 서술하는 아름과 자신의 임신 경위를 토로하는 ‘나’를 서술하는 김애란의 이토록 생경한 온도 차를 외면하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오늘날 위의 인용이 체현하는 시차를 오롯한 하나의 관점으로 꿰뚫을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아무런 해답도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직 이러한 시차를 직시하는 한에서만 오래된 미래가 아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실마리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끔찍한 악몽을 선사하는 아이일지라도 그 아이를 악령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다—오늘날 우리가 김애란의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이토록 당혹스러운 아포리아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일단 그친다. 외면할 수 없는 이 난감한 양자의 시차 사이에서 미래를 위한 ‘나’들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 될 것인가. 물론 이는 김애란에게만 해당되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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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사과 「매장」, 『02』, 창비 2010, 228면.
2) 재작년 영국 전역을 강타한 아무런 목적 없는, 시위를 가장한 아이들의 광란, 그리고 유난히 아이들이 저지른 범죄기사가 넘쳐났던 동시대 한국사회의 상황을 보라.
3) 김애란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8면.
4)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 2011, 32면.
5) 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김정일 옮김, 프로이트 전집 9, 열린책들 1996, 193면.
6) 「스카이 콩콩」, 『달려라, 아비』 68면. 강조는 인용자.
7)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같은 책 99~100면.
8)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침이 고인다』 125면.
9) 『두근두근 내 인생』 352면.
10) 김애란 「벌레들」,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58~5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