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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역사의 오르가논

실천시선 200호 기념 시선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류신 柳信

문학평론가, 중앙대 유럽문화학부 교수. 저서로 『다성의 시학』 『통일독일의 문화변동』 『수집가의 멜랑콜리』 『장벽 위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등이 있음. pons@cau.ac.kr

 

 

2031저기,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사의 거친 광야에 꽃들이 피어 있다. 4·19, 5·16 등 역사의 진통을 견뎌낸 굳건한 민중의 야생화가 “오 평등 오 자유의 거리”(고은)에 만개해 있다.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증언하는 핏빛 철쭉은 무등산 등허리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이념이 상실된 후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텅 빈 광장 어스름 속”(박영근)에선 희망의 홀씨를 품은 민들레가 하얗게 흔들리고 있다. IMF 이후 팍팍해진 삶의 현장에는 자기성찰의 수선화가 오롯이 피어 있고, 자본의 논리로 생의 가치를 유린하는 신자유주의의 시장 한편에선 저항의 찔레꽃이 매섭게 갈기를 세운다. 이 참여와 연대의 강철꽃들 사이에 “사랑이 곧 상처임을”(나종영) 체현하는 서정의 노랑붓꽃도 설핏 보이고, 사별한 아내에 대한 순정한 그리움의 접시꽃(도종환)도 외따롭게 고개를 떨구며, 지하 단칸방 식탁 위에서 “희망이라는 유전자”(박후기)를 품은 감자꽃도 나볏이 움튼다. 간난신고의 시대에 핀 꽃들이 일으킨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반란”(공광규)인가.

여기, 이 역사의 길목에 핀 꽃 가운데 128송이를 선별해 정성스럽게 만든 ‘시의 꽃다발’이 있다. 이름 하여 실천시선 200호 기념 앤솔러지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실천문학사 2012). 실천시선은 1984년 시선집 『시여 무기여』를 시작으로 최근 고형렬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까지 28년간 총 199권을 출간하며 한국 리얼리즘 시의 계보를 써오고 있다. 드디어 200호를 맞아 최두석(崔斗錫) 시인과 박수연(朴秀淵) 문학평론가가 199권의 시집에서 개별 시인들의 대표작 한 작품을 엄선해 총 128편을 수록했다. 알다시피 앤솔러지의 어원은 ‘꽃을 따서 모은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앤톨로기아(anthologia)가 아니던가.

이 꽃다발을 조여매는 끈의 장력은 앙가주망과 예술성, 정치와 미학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비롯된다. 윤리와 서정의 결합이 실천시선 28년 연륜의 저력이다. 그동안 실천시선이 전위적 현대시가 함몰되기 쉬운 나르시스적 자폐성과, 정치적 선동선전시가 경도되기 쉬운 조야한 당파성을 동시에 경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실천시선은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부당한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확신해왔다. 사랑(서정)의 시인과 혁명(정치)의 시인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 실천시선 휴머니즘의 강령이다. 미학과 정치, 이상과 현실이 힘겹게 대련(對鍊)하는 경계에 선 시는 늘 고통스럽다. 이상 속의 현실, 현실 속의 이상의 ‘동시성’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희망과 절망이 긴급하게 회통(會通)하는 역사의 최전선에 핀 수난의 꽃(Passionsblume). 바로 실천시선 200권의 정체이다.

폭력의 시대를 살고 간 브레히트(B. Brecht)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엉터리 화가[히틀러]에 대한 경악이/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그러나 바로 두번째 것이/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브레히트의 이 절박한 선택에 실천시선은 당당히 답한다. 두번째 것(현실의 부조리와 부당함)이 시를 추동하지만 첫번째 것(서정적 진실과 인간에 대한 신뢰)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이것과 함께 저것도 역시’라는 양가성의 시학이 실천시선이 획득한 한국 리얼리즘 시의 새로운 질이다.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는 이런 실천시선의 본령이 농축된 앤솔러지이다.

시대적 감수성이 잘 드러난 작품들로 선정된 128송이 꽃들이 갖는 문학사적 가치는 무엇인가? 시대별로 시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한국 현대시의 축도를 그렸다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라면, 당대의 불의를 증언하는 시를 정치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소여(所與)들’ 속에 매몰시키지 않고 미학적으로 구제함으로써 ‘시적 리얼리즘’의 지평을 확장한 것이 다른 장한 일이다. 말하자면 시의 진화와 사회적 변천을 상호 연동시켜 파악함으로써 미적 가상과 사회적 현실 사이의 역학구조를 톺을 수 있는 귀중한 시야를 제공했다는 점이 이 시선집의 의의이다.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는 미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오르가논(Organon, 도구)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 앤솔러지로서 한국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렇다. 실천시선 200호 기념 사화집은 질곡의 한국현대사의 제단에 바쳐진 헌화(獻花)이자, 21세기 새로운 ‘시적 리얼리즘’의 장도를 기리는 축화(祝花)이다.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애장하고 애송할 앤솔러지를 얻어 무엇보다 기쁘다. 실천시선이 성취한 위업 앞에 김종인(金鍾仁) 시인의 「한송이 붉은 꽃」을 바친다. “앙상한 몸뚱이 그네들 푸른 희망으로/덮힐 때까지,/스스로 붉은 꽃 자꾸자꾸 피워 올리는/한그루,/붉은 꽃나무”. 이 붉은 꽃이 실천시선의 붉은 심장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