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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얼굴을 완성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면
김연수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가지 행로」 「망루 위의 소설가, 상상력의 진자운동」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본 이는 ‘그림’과 ‘그리움’이 묘하게 닮은 까닭을 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상(像)으로 고정할 수 없는 아토피아(atopia, 분류할 수 없는 유일무이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무엇으로 환원하거나 어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에피파니(epiphany, 현현)로 주어진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그리겠다는 건 그를 영영 그리워하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다. 깊어가는 그리움 끝에 외로움만 남는다 해도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난하고 버거운 시간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듯, 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 여기면서.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 2012)의 주인공 카밀라가 한국의 진남에서 친모의 행적을 짚어가는 여정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이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동행한다. 카밀라의 양모 앤은, 언젠가 한국으로부터 그녀의 친모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편지가 왔으나 보여주지 않고 없애버렸다고 고백한다. 앤의 사후 카밀라는 친모와 자신이 찍힌 사진을 보고 불현듯 “내 인생의 진실 (…) 평생에 걸쳐서 써야만 하는 것”(33면)을 발견하고, 사라진 편지에 담겨 있었을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하지 않다. 그녀는 “친모라는 존재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사실”(37면)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고,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는 친모 지은을 몇겹으로 둘러싼 이야기들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가려내야 했다.
1부가 진행되는 내내 카밀라는 고통스럽게 외로움을 견디며 지은의 얼굴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은 카밀라가 작가로서 성장해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소설 곳곳에서 김연수(金衍洙)의 서사론 혹은 작가론이 산발적으로 제시되며, 카밀라가 그 단계를 착실히 밟아나가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말마따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윤곽만 남기고 부재하는 누군가를 상상하면서부터다.”(113면) 윤곽만 있는 얼굴에 이목구비를 새겨넣는 이, 말하자면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활자로 그리는 이다.
카밀라의 시점에서 지은의 얼굴을 그려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1부와 자살 전 이미 작가였던 지은의 시점으로 희재(카밀라의 한국 이름)의 얼굴을 그리는 2부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연결돼 있다. 이때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나를 죽이지 않고서 너에게 갈 수는 없다.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건너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거기에 투신해야 한다. 카밀라가 지은을 만나기 위해 그랬듯. 지은이 희재를 지켜내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듯.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심연을 건너 타자와 만나는 사랑의 서사는 1, 2부를 통해 사실상 완결된다. 그런데 여기에 김연수는 3부 ‘우리’를 덧붙였다.
3부는 진실이 잠복하고 있는 심연을 건너기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죽음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불편한 사실을 가리려고 지어낸 이야기를 철회하는 일일 수도 있고, 그 이야기로 지켜낸 아름다운 한 시절에 종말을 고하는 일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은의 자살을 둘러싸고 풍문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 모두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시인할 때, 오해를 촉발시킨 미옥이 묻어두고 살던 소녀 시절의 비밀이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진실에서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고통과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이 솟아오른다.
이 3부를 통해 김연수는 타자와의 소통이 윤리적 차원으로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수많은 사건들은 언제나 이야기로 전해진다. ‘우리’가 그 이야기에 수긍하고 그것을 고수하는 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어떤 얼굴들은 잊히고 만다. 죽음을 각오하는 ‘나’와 ‘너’의 사랑이 소통의 방법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산재하는 사건과 만나 기존의 이야기를 철회하고 안락한 시절을 마감할 때, 우리는 진실 속에서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들을 구해낼 수 있다. 김연수는 얼굴들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뒤(1, 2부), 이야기들의 무덤에서 돌출하는 실재(The real)를 보여줌으로써(3부) 마침내 ‘우리’가 믿고 따를 윤리적 지침 하나를 마련해냈다. 소설을 통해 타자와의 소통과 공동체의 윤리를 함께 사유하려는 그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구성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김연수는 “얼굴들. (…)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게 불꽃처럼 빨랐던”(288면) 얼굴들을 그리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는 “우리 시대에는 고독이 외롭다”(235면)고 했지만, 또한 작가란 “고독을 즐기(29면)”는 이라고도 썼다. 고독을 감내하며 섬광처럼 빛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얼굴들을 활자로 복원해내려 분투하는 작가를 가진 우리 시대는 불행할지언정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