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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데보라 캐드버리 『강철혁명』, 생각의나무 2011
강철과 시멘트로 꿈꾸던 시대
이강영 李康榮
경상대 물리교육과 교수 kylee14214@gmail.com
매일 누군가 변화를 이야기하는 세상이다.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변화와 함께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며,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변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정말 변하고 있을까? 뭔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세계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모습이 진짜로 변한 것은 19세기였을 것이다. 최근 타계한 영국 역사학자 홉스봄(E. Hobsbawm)의 말처럼 변화는 ‘19세기의 이름’이었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모습 자체가 달라졌던 시대, 세계가 그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시대, 인간의 힘이 자연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된 시대, 그 변화가 워낙 두드러져서 그것을 진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시대. 19세기 말엽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물리학을 전공하려 하자 그의 지도교사가 “물리학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발견되어 이제 남은 것은 몇개의 사소한 구멍을 메우는 일뿐이다”라고 만류했다는 일화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간의 충만한 자신감을 잘 드러낸다.
그래서 거대 구조물은 이 시대의 아주 좋은 상징물이다. 그 안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고, 인간이 노력만 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배어 있다. 근대 기술의 힘은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모습을 띠었으므로, 기술적 진보에 대한 희망이 아주 보편적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거대 구조물 속에는 엄청난 양의 노동이 들어 있다. 특히 시대의 이정표가 될 만한 초대형 토목공사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한 노동을 필요로 했는데, 그 노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때로는 노동자들의 용기와 헌신이었고 간혹은 후한 보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노동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증가로 인해 넘쳐나는 값싼 노동력이었다. 동시대의 다른 선박보다 두배 이상 컸던 증기선 그레이트이스턴 호의 건조 현장에는 “안정적인 고용이 보장되지 않았고 그만두는 사람보다 일자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부설 현장에는 값싸고 다루기 쉽다는 이유로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가 투입되기도 했다.
또한 이 구조물에는 엄청난 자본이 들었고, 법적・정치적 문제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거대한 자본이 움직이면서 많은 투자자와 이권이 오갔으며, 빠나마운하처럼 국제적인 사업이 되자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프랑스가 실패한 빠나마운하 사업을 사들인 로즈벨트(T. Roosevelt) 대통령은 직접 공사현장을 방문해 인부들과 함께 공장식당에서 식사하며 작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밖에 런던의 하수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의회와 많은 위원회가 관여하는 바람에 공사가 연기되기도 했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강철 공급업자가 불량품을 몰래 납품하는 바람에 설계를 변경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대규모 노동력, 엄청난 자본과 함께 거대 구조물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는 새로운 공학기술이었다. 즉 이 사업은 노동・자본・기술의 총 집결체였다. 또한 시대를 넘어서는 구조물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더해 새로운 기술,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이루어내기 위한 공학자들의 꿈이 필요했다. 이 사업을 꿈꾸고 시작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스코틀랜드 연안 북해의 벨록 등대를 지은 스티븐슨(R. Stevenson)이나 런던 하수도 사업을 완수한 바잘게트(J. Bazalgett)처럼 성공의 영광과 명예, 보상을 얻은 이들도 있지만, 그레이트이스턴 호를 꿈꾸었던 브루넬(K. Brunel)이나 미대륙횡단철도를 제안한 시어도어 주다(Theodore Judah)처럼 사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다. 이미 수에즈운하를 완성해서 명성과 존경을 누리던 레셉스(F. Lesseps)는 빠나마운하에 도전했다가 공사에 실패한 뒤 파산했으며, 투자자들로부터 고소당해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레셉스는 빠나마운하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고 불명예 속에서 사망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브루클린대교를 구상했던 존 로블링(John Roebling)은 미처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고로 사망했고, 아들 워싱턴 로블링이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았으나, 그 역시 공사에 심신을 모두 소모하고 잠수병으로 자리에 눕는 신세가 되어 완성된 다리를 건너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철과 시멘트를 가지고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 『강철혁명』(Dreams of Iron and Steel, 박신현 옮김)은 기술로 본 19세기 역사의 중요한 단면을 담고 있으며,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과는 또다른 관점에서 이 시대를 느낄 수 있는 드라마다. 이 책은 또한 승리의 기록이며, 19세기 구조물에 바쳐진 찬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구 못지않게 개발과 건설에 흠뻑 젖어서 ‘동양 최대’니 ‘세계 최대’니 하는 말을 늘상 듣고 살아온 우리에게 일면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방에서 불거져나오는 토건족의 전횡을 연상시켜 불쾌하기도 하다.
그래도 여기 나오는 구조물 대부분이 역사의 한 장면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이유는, 거기에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 담겨 있었고 그 요청에 근본적인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하수도는 단순한 편리가 아니라 런던 시민의 위생과 청결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배수관리 시스템이었다. 특히 당시 간헐적으로 번지던 콜레라의 위협으로부터 수많은 인명을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브루클린대교와 대륙횡단철도, 그리고 빠나마운하는 극적으로 표현하면 나눠진 세상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이전에 미국 동부와 서부를 오가는 사람들은 위험한 육로를 지나느니 차라리 배를 타고 머나먼 남아메리카 남단의 케이프혼을 돌아 여섯달가량 이동하는 해상경로를 택하거나 열대 풍토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빠나마에 내려서 좁은 지협을 지나 다시 배를 타고 올라갔다. 대륙횡단철도에 의해 미국이 하나가 되었고, 빠나마운하에 의해 대서양과 태평양이 이어졌다. 브루클린대교는 오늘의 뉴욕을 가능하게 했다. 현존하는 연안 등대 중 가장 오래된 벨록 등대는 북해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이같은 거대 구조물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물질적 기반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늘 지금 같은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편 19세기의 미덕이 이 시대에도 무조건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지난 몇년간, 아마도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어이없는 토목공사에 시달리고 그 후유증을 걱정하는 우리에게 특히 이 책의 장대한 드라마는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