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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열린책들 2007

20세기 인류의 문명사적 딜레마

 

 

박상준 朴相俊

SF 평론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cosmo@chol.com

 

 

어느섬의가능성인류는 20세기 들어서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인지적 부조화를 겪게 되었다. 그간 잠복해오던 인간 이성과 본성 간의 괴리가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에 의해 엄청나게 증폭되었던 것이다. 헉슬리(A. Huxley)는 『멋진 신세계』(1932)에서 문명의 장밋빛 미래상 이면에 도사린 불길한 가능성을 제기했고, 불과 십수년 만에 그것은 히로시마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가 이미 막다른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은 그뒤로 단 한번도 철회된 적이 없다.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 내놓은 씨나리오는 그러한 의혹의 최신판 중 하나이다. 인류는 생물복제 기술을 통해 종의 영속을 시도하지만, 우리의 후예는 결국 자기부정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섬의 가능성』(La Possibilité dune Ile, 이상해 옮김)은 기실‘실현되지 못한 어느 종(種)의 가능성’이라는 비가(悲歌)다.

세 사람의 등장인물인 다니엘 1, 다니엘 24, 다니엘 25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체와 복제인간의 관계다. 그들 사이에 놓인 역사는 긴 시간만큼이나 격변으로 점철되어 있다. 세계 지형을 바꿔버릴 정도의 가공할 핵전쟁과 자연재해, 엘로힘교라는 교단에 의해 추진된 인간복제와 인류보전 프로젝트, 야만인으로 퇴화되어버린 구(舊)인류 등. 게다가 복제인간은 구인류와 신진대사 구조며 심리 메커니즘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결코 우리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최후의 주인공 다니엘 25는 자신의 모체나 다른 여성이 남긴 기록들을 통해 구인류의 여러 감정에 이입하려 시도해보지만 종국에는 호모 싸피엔스라는 종에 대한 자기연민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우엘벡의 또는 많은 우엘벡들의 비관과 허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숙명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먼 옛날 우리에게 본능과 유리된 이성이 형성된 순간부터 그것은 원죄로 자리잡았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우리는 스스로가 용도폐기 연한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발달 속도가 인간의 생물학적인 세대교체 속도를 추월하면서 야기된 구조적 필연이다.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둘은 사실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으로 봐도 무방하다)으로의 이행은 그 자각증상이었을 따름이다. 21세기 전반기가 다 가도록 우리는 여전히 이 위기에 대한 입장 정리에 기력을 소진하느라 허덕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엘벡의 미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를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며 사무치도록 허무를 자각시키는 전술에 있기보다는,‘미래인’의 도래를 기대하는 합리와 통찰의 태도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가 다니엘 25의 입을 빌려 내보이는 전망은 여느 진지한 SF작가 못지않게 예리하다.

“열역학 법칙에 의해 강요된 한계들을 지닌 조건에 종속되어 있는 유기적 생명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동일한 도식들, 다시 말해 분리된 개체들의 구성, 포식, 유전자 코드의 선별 전승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서는 전혀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몇몇 가설에 의하면 탄소 생물학의 시효는 이미 끝났다고 한다. 미래인은 인지와 기억 프로쎄서들의 점진적인 접속을 통해 문명을 건설할 규소로 된 존재들이 될 것이다.”(465면)

현재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고등생물들은 탄소에 기반을 둔 유기물 신진대사로 생명활동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데 우엘벡이 말하는‘규소로 된 존재’란 바로 반도체 같은 무기물로 이루어진 전혀 새로운 생물체를 뜻한다. 최근에 타계한 SF작가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도 일찍이 외계행성에서 무기물 생명체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진화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고,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싸이보그 선언」에서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새로운 싸이보그 문명의 도래를 역설하기도 했다. 우엘벡이 호모 싸피엔스의 나르씨씨즘에서 탈피하자고 말하는 것 역시 21세기 인류 딜레마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이다.

물론 우리의 하드웨어가 완전히 바뀐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외적 조건만을 규정할 따름이다. 설령 먼 미래에 우리가 피와 살로 이루어지지 않는 존재로 완전히 탈바꿈하더라도,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형이상학의 차원을 궁구하는 인간의 실존적 본성은 아마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사유와 우리의 추구를 계승하는 존재라면 그게 무엇이든 우리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최후의 주인공 다니엘 25가 바닷가를 찾아가는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우엘벡에 의해서 다시금 변주되는 하나의 풍경. 인간은 시적 종말의 순간에 늘 바닷가를 찾는다. 일찍이 웰즈(H. G. Wells)의 『타임머신』에서 주인공은 80만년 뒤 먼 미래의 극단적 인류상을 겪은 뒤 다시 더 아득히 먼 3천만년 뒤의 미래로 날아가 고적한 바닷가에서 감상에 젖는다. 고대신화부터 현대의 주류문학 및 SF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바닷가의 인간 혹은 바다로 돌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우리의 잠재의식에 깃든 원초적 동경이나 회귀본능이라고밖엔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낸 뒤 뭍으로 떠나보냈던 어머니 바다를 향한 그리움. 물론 거기엔 바다 건너 미지의 희망을 제시하는 넉넉함까지도 깃들어 있다. 우엘벡의 주인공은 구인류의 후계자로서 스스로의 운명을 마감하는 여정으로 바다를 찾았던 것이다.

미래인에게 바다는 바로 지구가 될 것이다. SF고유의 입장 중 하나가 바깥 우주로의 지향(제국적 팽창주의에서부터 겸허한 호기심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인데, 우엘벡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한마디로 미래, 미래인에 대한 기대이다. 비록 작가는 이 작품을 탈고한 뒤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지쳤다”고 토로했지만, 그는 분명 더 넓은 세상,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