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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도현 安度眩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리운 여우』『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등이 있음. ahndh61@chol.com
동무
평양 가면 은숙동무 영희동무 강철동무 들이 자주 새소리처럼 귓가에 내려앉는다 안내원동무 접대원동무 洪동무 朴동무, 하고 나도 동무라는 말을 발음하면서 새를 공중에 띄워 올려본다 감히 동무, 해보면서 동무, 해서는 안되는가 동무, 해도 되는가 잠시 고심한다 그러다 동무, 해도 되겠군, 생각한다 동무는 술 취한 총구였지 침묵의 서약서였지 들여다보면 빨려 들어가 죽는 연못이었지 그래서 나는 동무를 벽장에 넣어두거나 사진첩의 눈썹 밑에 숨겨두었다 꺼내 보면 상처에서 뱀이 기어나올 것 같아서 나는 심심하면 동무 대신 친구를 불렀고 삼촌들은 군에 가서 친우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하여 동무라는 말을 잃었고 그러고 나서 동무를 잃었다 말을 잃으니까 말뚝을 잃게 된 거지 말 구루마를 몰던 아버지의 동무는 6·25 때 인민군들을 보았다 했다 동무들 조심하라우, 하면서 호박순이 다치지 않게 행군하는 걸 보았다고 했다 오래 몰던 말이 죽자 아버지의 동무는 트럭운전수가 되었다 그는 말을 잃었고 아버지는 동무를 잃었다 오늘은 4월, 평양 거리는 천지간에 살구나무다 연분홍동무 꿀벌동무 향기동무 새소리동무 들을 발음하면 말 속에 입 냄새 좋은 살구꽃 피겠다
말뚝
말뚝은 땅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인가 땅속에서 지상으로 한 자 남짓 손목을 불쑥 뻗어 흔들고 있는 것인가 과연 말뚝에도 꽃이 필 수 있을 것인가
말뚝을 볼 때마다 그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다이빙을 하면서 물속으로 온몸을 꽂아 넣어본 적 있고 물속에서는 그녀를 향해 여기, 여기, 하며 잘난 체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였다 땅속에 나를 심는 일은 두려웠으므로
괜히, 말뚝에다 깃발을 내다 걸 수 있어야지 원, 말뚝을 뽑아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으로 쓸 수도 없는걸 하고 투덜거렸다 말뚝은 고요하고 엄정했다 지구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기 위해 누군가 청진기를 갖다 대고 있는 것 같았고 별의 운행을 기록하기 위해 망원경을 고정시켜놓은 것 같았다
옛날에는 말뚝이 봉놋방 주모의 기둥서방이었으나 비유의 시절이 다하자 내 친구 말뚝하사 張하사한테 말뚝은 최저생계비였다 그러다가 말뚝은 한때 투기꾼의 하수인이었다 말하자면 제 영역을 표시하는 고양이의 오줌 같은 것이었다
지금 말뚝은 똥구멍이 예쁜 흑염소들의 탁아소 보모다 매일 아침 아장아장 걸으면서도 애햄, 헛기침하며 출근하는 염소들을 묶어 빙빙 돌리며 놀아주다 보면 해가 이마에 손을 얹고 노곤해진다 말뚝과 염소의 거리며 해와 나와의 거리를 셈해보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하여, 나도 이제 나뭇잎을 몸에서 다 떼어내고 말뚝이 되고 싶은 거다 눈송이의 의자가 되고 싶은 거다 흰 눈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변두리 흑염소네 집도 쫄랑쫄랑 따라가보고 싶은 거다 그때 너도 함께 가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