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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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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孫寶渼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shoutspring@naver.com

 

 

 

대관람차

 

 

호텔 초이선(Choisun)은 불에 탄 후, 육개월 이상 그 상태 그대로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었다. 어느날 밤, 누군가 건물 내부의 작은 퓨즈를 하나 끊어버렸다. 그러자 연달아 자잘한 파열이 일어났다. 그 파열은 가스관에 도달했고 마침내 건물 전체를 무너뜨렸다. 호텔 초이선은 그 자리에 세워진 1972년 이후 약 사십년 만에 그런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갈 때나, 혹은 자동차를 운전해서 강변북로를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거의 절반이 소실된, 마치 조각조각 찢긴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철근 덩어리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었다. 어떤 칼럼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건물이 무너진 후 서울시의 범죄율과 자살률이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사건은 다양한 방식으로—그러니까 수십만가지의 방식으로—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것은 도시가 몰락할 징조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이 과장된 견해라는 것은 곧 밝혀졌다. “도시의 범죄율과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티브이에 나온 시사평론가가 유머러스한 태도로 말했다. 실제로, 건물이 무너지고 두달 정도 지났을 때부터, 사람들은 그 건물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초이선의 역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초이선은 조선 말기에 미국인 부동산 재벌인 윌리엄 쌘즈가 세운 건물이죠. 원래는 지금의 동대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고종이 그 건물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황실 가족이 자주 머물렀던 곳입니다. 단언하건데 그곳은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건물의 시련에 대해서 말한다. “이게 첫번째 소실이 아닙니다. 625전쟁 때 폭격당한 후 쌘즈 2세에 의해 지금의 자리, 동부이촌동에 재건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 건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다른 누군가는 그 건물이 현재 얼마나 궁색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쌘즈 3세는 이 건물에 대한 애정이 없어요. 관리업체에 맡기고 지난 사십여년 동안 나 몰라라 했죠. 옛날식 건물이라 몹시 낡았고, 유지비는 엄청 들어요. 게다가 사람들의 발길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호텔 초이선—이제는 무너져버린 건물—에 들렀고, 새삼스럽게도 그곳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안달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것이든 그곳에서 발굴해냈으리라.

시의 경찰은 몇달 동안 방화범을 찾기 위한 수사를 진행했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사고 보상금과 관련된 유족들의 시위였다. 시당국에서는 쌘즈 3세와 접촉하려고 계속해서 시도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자, 초이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들이 생겨났다. 그 건물의 폐허 어딘가에 시체가 숨겨져 있는데 그게 바로 방화범의 시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건물이 귀신 들렸거나 혹은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다른 것—그것이 완전히 붕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바랐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저 끔찍한 것 좀 봐!” 마치 저 건물이 이 도시의 유일한 흠집이라도 된다는 듯이.

 

아마도 초이선과 관련해서 그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초이선이 화염에 휩싸인 바로 그 장면일 것이다. 그는 그것을 티브이 뉴스의 생중계를 통해 봤다. 그의 아들이 태어난 지 백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아내는 아들을 재울 때마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집 안의 모든 조명을 어둡게 해두었고, 티브이 볼륨을 켜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둠과 정적에 휩싸여서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그가 실로 오랜만에—거의 삼년 만에—무언가 쓰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는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둠과 정적 말이다. 그는 잠시 멍하게 티브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쌓여 있는 잡동사니—아이의 침받이 수건이라든지, 딸랑이, 물통 등등— 사이에서 포스트잇을 찾아냈고, 책상 서랍에서 펜을 꺼내 왔다. 그리고 얼른 맨 윗장에 이렇게 휘갈겼다. ‘방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내린 건물, 초이선’ 그는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해두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걸 ‘생각 저장’이라고 불렀다. 그 단순한 문장들이 나중에 씨나리오 작업을 할 때, 결코 단순하지 않은 방식으로 도울 거라고 그는 아내에게 설명하곤 했다.

그들은 한 유명 영화제작사에서 만났다. 그녀는 사장인 K의 비서였다. 저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단역이지만 제가 출연한 영화도 있고요. 사장님이 손을 써주신 거지만 말이에요. 그녀는 그에게 말했었다. 그는 그녀가 배우를 했어도 잘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의 거의 모든 남자가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새로 제작에 착수한 영화의 씨나리오 작가였다. 모두 다 그 영화가 엄청난 성공을 거둘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중에 그건 잘못된 생각으로 판명이 났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때 그녀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몇년도 더 지난 후였는데, 이번에 그는 제작사의 직원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한동안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취직한 직후에 연줄을 통해 자신의 씨나리오로 다른 영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영화의 결과는 더 참혹했다. 그로부터 일년 후에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쌘프란시스코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주 주말에 그들은 감사의 뜻으로 직장 동료들을 집에 초대했다. 그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동료들은 저녁 내내 그들 집에 머물렀다. 월요일에 회사에서 누군가 그의 아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자네는 정말 운이 좋아. 그는 그때까지도 가끔 씨나리오를 쓰고 그걸 영화로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의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헛된 꿈은 좇지 말고 생활에 정착해야 할 거야. 그날 밤 그가 농담 삼아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헛된 꿈이 아니에요. 그렇죠? 그는 웃었다. 하지만 헛된 꿈이라도 상관없는 거예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방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내린 건물, 초이선’ 그가 메모를 다시 읽어보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거실로 나와 조용히 방문을 닫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뭐 좀 먹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중에 먹을게요,라고 대답했다. 그즈음 그녀는 나중에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거실이나 부엌에서, 무언가를 사러 함께 나간 마트나 백화점에서, 혹은…… 침대 위에서. 그는 맥주를 가지러 부엌으로 갔고, 문득 자신의 손에 여전히 그 포스트잇이 들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포스트잇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그 위를 자석으로 눌렀다. 그리고 그걸 다시 읽어보는 동안, 갑자기 큰 소리로 아내를 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왜? 다음날 낮에, 그의 아내는 아이가 잠자는 틈을 타서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아이가 깨서 울까봐 그녀는 조마조마했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가 그녀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메모를 읽었고, 다시 하던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시간 후 천귀저기를 개던 그녀는 갑자기 화가 난 사람처럼 펜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방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내린 건물, 초이선’이라는 메모 뒤에 이렇게 써넣었다.

죽은 사람

잠시 후 그녀는 다시 펜을 들고 와서 그 뒤에 ‘들’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 메모의 내용은 이렇게 되었다.

방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내린 건물, 초이선; 죽은 사람들

 

그는 그 메모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가끔 뉴스에 초이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요즘은 저런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무능력한 시당국을 비난했다. 그는 승진을 했고, 자신이 맡은 여러가지 대형 프로젝트 때문에 늘 골치가 아팠다. 어느날 팀장이 그를 호출해서 ‘호텔 초이선 철거와 새로운 공공지역 활성화를 위한 모금운동’에서 여배우 P가 읽을 연설문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초이선은 이미 인기를 잃어가는 시점이었다. 누군가 뉴스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더러워요. 당장 저걸 없애버려야 해요.” 유족 보상금 문제도, 방화범 문제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다만, 쌘즈 3세의 응답이 있었다. “쌘즈 3세는 대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시에 넘기겠다고 했고…… 그 대신 조건을 두가지 붙였다…… 공공의 목적에 맞는 시설을 만들 것과 유족들의 보상금은 시에서 처리할 것…… 시에서는 예산이 부족하며…… 어떤 식으로 이 대지를 이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검토 중……” 아마도 쌘즈 3세가 좀더 일찍 이런 결정, 그러니까 건물과 대지를 기증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더라면 기업들은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상업적으로 이용해먹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 기업들은 초이선과 관계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그런데 P가 갑자기 ‘호텔 초이선 철거와 새로운 공공지역 활성화를 위한 모금운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방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 내린 건물, 초이선; 죽은 사람들

초이선이 불에 탄 밤, 죽은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대부분 거기서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시급직 직원도 있었다. 아직 어린 여자나 남자들. 그 당시 뉴스에서 어떤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도 투숙객이 많지 않았습니다.” 유명 여배우 P의 남편도 그 많지 않은 투숙객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왜 자신의 남편이 그날 밤 호텔에 홀로 머물렀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P는 이십년 전에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말 그대로 미모와 학식을 갖춘 여자였다. 우아한 인상에 몸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그녀는 인기 절정이던 서른한살 때, 갑자기 사업가인 열두살 연상의 남편—이제는 죽어버린—과 결혼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기업의 월급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유명한 한복 디자이너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업가와 결혼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결혼 후 P의 남편이 젊은 여배우와 바람이 났다거나 P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돌았지만, 가끔 공식석상에 나타난 P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았다. 이제 P는 사십대 중반이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몇 안되는 중년의 여배우 중 하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대중에게서 외면받는 삶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점에 와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 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남편을 애도하는 내용이야. 팀장이 말했다. 사장님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거 알지? 연설문 말고, 그는 P의 이름으로 신문에 실을 칼럼도 써야 했다. 아마 따로 사례도 할거야. 그는 팀장에게 묻고 싶었다. 왜 저죠? 저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는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얼마나 굴욕감을 느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그 어떠한 문장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아내의 젖을 빨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몸이 한뼘 정도 더 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아들은 또래의 다른 아기들보다 훨씬 많은 젖을 먹었다. 그것을 빼면 다른 아기들에 비해 우월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달 전쯤 그와 아내는 아들의 모유 수유를 중단하려고 시도했었다. 아들은 밤새 악을 쓰고 울어댔다. 그녀는 아직 아이가 모유를 원하고 있고,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그걸 뺏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아기들은 다 그래요. 그 역시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정말로 아기들은 다 그렇다…… 수유를 끝낸 그녀가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예전에 직접 본 적이 있어요.

—응?

—예전에 그 여자 직접 본 적 있다고요.

—어디서?

—그 여자, 엄청 예쁜 여자예요.

그때, 아들이 트림을 했고, 그녀는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주 잘 했어요, 우리 아기라고 말했다. 우리 아들은 밥도 잘 먹어요. 소화도 잘 시키고. 못하는 게 없어요. 그녀는 마치 자신이 아기인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아들, 참 예쁘죠?

그날 밤, 그는 아내와 아들이 잠든 시간에 냉장고에 붙어 있는 메모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 메모가 몇달째 여기 그대로 있는 걸까? 왜 한번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그는 ‘방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내린 건물, 초이선; 죽은 사람들’이라는 메모의 ‘죽은 사람들’이라는 글자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그게 아내의 글씨체라는 걸 알았다. 그는 그녀가 포스트잇에 글자를 적어넣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몇달 전, 어두컴컴한 거실에 앉아 치솟는 불길과 허물어져내리는 건물, 그리고 건물의 창문으로 뛰어내리던 사람들을 바라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연설문을 쓰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종의 과업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뭐랄까, 그가 설명할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그러한 장소에서 도달한 명령 같은 것 말이다. 실제로 그는 아주 가끔 그런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가끔. 그러니까, 사람들이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의 부모는 둘 다 지방의 초등학교 선생으로 그 일대에서는 점잖고 양식있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공부를 잘했고, 비록 재수를 했지만 결국 명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제대 후에 그는 갑자기 진로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루이 벡터맨의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 든 생각이었다. 그때 같이 영화를 보러 갔던 여자는 그게 미친 생각이라고 했다. 만약 그녀가 지금의 자신을 본다면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글을 다시 쓰게 될까? 그럴 수 없을까?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제작사에서 근무하고 있고,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보수도 좋다. 무엇보다 자신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다. 내가 글을 다시 쓸 날이 올까? 오지 않을까? 그는 노트북을 들고 빈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아기방으로 쓰려고 했던 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하얀색 원목 아기 침대가 놓여 있다. 침대 귀퉁이에 우산 모양의 모빌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각양각색의 모빌이 달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노란색 삼단 서랍장, 그 위에 놓인 스탠드와 작은 액자, 벽에 붙어 있는 아기자기한 동물 일러스트, 창 바로 앞에 놓인 작은 목마, 커다란 곰인형. 그들은 가격과 품질을 꼼꼼히 따져서 그 모든 것들을 구입했었다. 그때 그녀는 아직 임신 초기였고, 결혼하기 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정말 그랬었지.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것이 불과 이년도 안된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무나 아득했다. 그는 어떤 소설의 문장을 떠올렸다.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는 스탠드 옆에 노트북을 두고 식탁 의자를 하나 끌고 왔다. 서랍장 위쪽 벽에는 커다란 거울이 붙어 있었다. 그는 냉장고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을 거기에 붙여놓았다. 그날 이후 그는 저녁식사를 끝마치면 아기방으로 들어가 연설문을 썼다. 그는 노트북의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드려 문장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벽에 부딪힐 때가 있었다. 그러면 그는 멍하니 거울에 붙어 있는 메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웃는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는 자신의 웃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그가 글을 쓰고 있을 때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내는 소리였는데, 그건 뭔가 끔찍한 것을 보았을 때 내는 비명, 고통에 찬 소리 같았다. 그가 거실로 나갔을 때, 그의 아내는 아들에게 이유식을 떠먹여주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어요. 이건 기분이 좋아서 내는 소리예요. 웃음소리라고요. 죽은 사람들,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썼다.

 

글을 써서 팀장에게 제출한 며칠 후 그는 팀장에게 다시 호출을 받았다. ‘호텔 초이선 철거와 새로운 공공지역 활성화를 위한 모금운동’에 참석하라는 지시였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모금운동 행사는 시내의 한 신문사 건물에서 있었다. 그가 신문사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P의 매니저가 그를 낚아채서 맞은편에 있는 플라자 호텔로 데리고 갔다. 거기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이전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한 긴장감을 느꼈다. 유명한 배우들을 많이 봐왔는데도 그랬다. 1층 까페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P가 있었다. P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었다. 검은색 블라우스, 검은색 스커트, 검은색 스타킹, 검은색 하이힐, 그리고 검은색 장갑까지. 그는 그녀가 원래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기품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내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아내가 더 나이 들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아내의 말을 떠올렸다. 그 여자, 엄청 예쁜 여자예요. 그는 P가 아직도 슬픔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의 옷차림 때문인지, 수척해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가 슬픔에 빠져 있어서 그런 건지는 분간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장갑 위로 끼워져 있는 반짝거리는 푸른색 사파이어 반지를 바라보았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는 이게 적절한 인사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했다.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순식간에 슬픔이 차오르기라도 한 듯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냅킨꽂이에서 냅킨을 한장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거기에 누가 있었든 간에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 다정하신 분이네요.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난 너무 오랫동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있었어요.

그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 역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번 행사는 제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져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뭘 알고 있는지 몰랐다. 전혀, 아무것도.

—당신이 쓴 그 글 말이에요. 정말 좋았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반지를 빼고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 위에 사파이어 반지를 낀 후, 티팟의 유리뚜껑을 열어 여과기에 찻잎을 담은 후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는 그녀의 손동작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했어요. 모든 단어가…… 모든 문장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녀는 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런 후 그녀는 다시 반지를 빼고, 장갑을 끼고, 그 위에 반지를 꼈다.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신성한 의식같이 느껴져서 그걸 바라보는 동안 그는 이상한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저 장갑을 착용하지도 못하고 그 위에 반지를 낄 수도 없으리라고, 그래서 자신은 영원히 거기에 그렇게 서서 그녀가 하는 그 모든 의식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행위를 우아하고 간단하게 끝마쳤다.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갑자기 별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았고 그런 자신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아뇨.

P가 엄숙하게 말했다.

—제가 감사하죠. 다른 유족 분들도 감사드릴 거예요.

유족? 다른 유족들? 그는 그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K의 제작사에 있다고 들었어요. 그이가 당신을 적극 추천하더군요. 이유를 알아요?

P가 자신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저는 씨나리오 작가입니다. 글을 쓰죠.

그의 말에 P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었다.

—나중에 저를 다시 만나주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실 시간은 충분했었다. 하지만 그는 한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다시 신문사 건물로 돌아오면서 그는 휘파람을 불어보았다.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행사장은 절제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P는 온통 까만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가장 빛을 내는 존재였다. 그녀가 서두 연설을 할 것이고, 그 뒤에 경실련 회장과 전 경찰청장, 그리고 유명 소설가가 발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엄청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그는 연단에 오른 P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기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그는 P가 자신에게 눈길을 준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길다고 느꼈다. 그녀는 작게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연설문을 이미 다 외운 것 같았고, 아래를 슬쩍 쳐다볼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다분히 연극적인 행동이었다. 올해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아주 자신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죠.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거기까지 읽고, 그녀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물을 한모금 마셨다. 그는 꽤 먼 거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가 물을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보다 오래 그 시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약간 웅성거렸다.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올해에 죽은 사람들의 수를 제가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식의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사파이어 반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곧 그녀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이 공공지역에 무언가를 건설하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행위이며, 그리고 그것이 거기서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얼마나 근사한 방법인지 이야기할 것이다. 연설이 끝나갈 때쯤, 그는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부의 고위관리와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 기업의 대표, 그리고 유족들. 그는 그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유족들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에게서는 어떤 낌새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이 그 연설문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이 모두 저 연설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이상 다른 표현은 없었다. 그것은 완벽한 연설이었다.

 

‘호텔 초이선 철거와 새로운 공공지역 활성화를 위한 모금운동’이 불러일으킨 파장이 있었다. 무너지는 건물이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던 무언가를 떠오르게 해서 표류하게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바로 그 장소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성의 연설—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진 유족의 눈물—이 결국 그것들을 흘러넘치게 했다. 며칠 후 그는 신문에 실린, 자신이 P에게 준 글을 읽었다. “우리는 호텔 초이선이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죽음이 이 도시에 그저 매몰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혼자 남겨졌고, 아마도 남편의 죽음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하리라…… 그래도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그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는 그 글의 두 부분 정도, 아니 세 부분, 아니 네 부분 정도가 자신이 쓴 것과 다르다는 걸, 누군가 손을 봤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회사 사람들이 모금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일부러 그 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글을 배우가 썼다는 걸 믿을 수 있어?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아내에게도 그 글이 실린 신문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P의 사진—물 마시는 모습이 담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날 밤 그는 칼럼이 실린 부분만 잘라서 서랍장 가장 아래에 넣어두었다. 행사가 열린 지 한달 후, 조간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시에서는 다음주 내로 호텔 초이선을 헐 예정이다. 시의 한 관계자는 모금이 다 되는 대로 서울시민을 위한 공원과 영국의 런던아이와 같은 대형 관람차를 지을 계획이며 이 사업에 대한 공모전을 따로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업은 서울시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며…… 해외에서 관광객을 불러모을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P는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더이상 여배우로서가 아니었다. 이제 P는 정숙한 미망인, 자신의 상실을 바람직한 방식으로 극복한 사례가 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최초에 썼던 글—신문의 칼럼—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즐겨 말했다. 새로운 경험이었죠. 치유되는 느낌이었어요. 나 자신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치유한다고나 할까? 인터뷰의 마지막에 그녀는 늘 자신의 일생에 대한 책, 혹은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동물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 밝히곤 했다.

그는 다시 회사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는 가끔 밤에 잠에서 깨어나 ‘빈방’으로 갔다. 그리고 신문 칼럼을 읽었다. 나의 글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멋진 문장들을 하나하나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자신이 글을 쓰기 전에는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여성의 삶을 재창조했다. P는 그에게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P는 자신을 주춧돌로 삼아서 완벽한 성을 쌓았다. 자신과 얽혀서 흠집을 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다 들어 있었어요. 그는 P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 경외심을 품은 그 표정, 자신에게 찻잔을 건네며 살짝 떨리던 그 손길. P가 연설을 끝냈을 때,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 그 주말에 그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돌연 취소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아이를 가지기 전에 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유럽으로, 홍콩으로, 부산으로 여행을 갔었다. 그는 그들이 갔던 마지막 여행을 떠올렸다. 동남아의 어떤 섬이었다. 아내는 가슴이 팬 하얀색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다. 매끄러운 다리와 목덜미가 기억났다. 그건 헛된 꿈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제주도 여행을 취소한 후 그는 주말 내내 빈방에 들어앉아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신문 칼럼을 읽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자신이 여전히 멋진 미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는 아들의 모유 수유를 중단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아들이 발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도 믿기 어려웠지만, 그는 정말 ‘발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아직 제대로 앉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며칠 뒤, 그가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그 노래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었다고 느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가슴을 옥죄어오는 괴로움을 느꼈다. 아들이 벙어리가 될까봐, 아들이 자폐아가 될까봐, 아들이 멍청이가 될까봐.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두려웠다. 그는 이런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일까봐 두려웠다.

 

며칠 후 그는 점심때 전화를 한통 받았는데, 뜻밖에도 P의 매니저였다. 일주일 후에 P가 고르메 레스토랑을 빌려서 조촐한 파티를 열 계획인데 그가 와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냥 친구들을 부르는 자리라고 했다. 공식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가족 분들을 모시고 오세요. 매니저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날 밤 그는 아내의 젖을 빨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들 너무 크지 않아? 그가 물었다. 우리 아들은 먹기만 하는 거 같아. 그는 그 다음 문장도 생각했지만 도저히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아들이 잠든 후에 그는 그녀에게 P의 초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같이 갈 거야?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아이는 어떡하고요? 그들에게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데리고 가면 돼. 그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가 진짜로 함께 갈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잠자리에서 그는 아내의 가슴을 만졌다. 그는 아내가 나중에요,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마지막 여행 때 아내가 입었던 하얀색 점프슈트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젠장.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파티 날 아침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저녁이 되자 기온이 내려가서 비는 눈으로 변했다. 그는 자주색 풀오버 위에 피코트를 걸쳤다. 그건 버버리 프로썸 제품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비싼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옷장을 뒤져서 그나마 크고 신축성이 좋아 아직 입을 수 있는 저지 원피스를 찾아냈다. 화장을 하면서 그녀는 최대한 꾸미는 것을 자제하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아직 서른세살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들에게도 작고 깜찍한 케이프 코트를 걸쳐주었다. 그는 그 옷이 자신의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과 카시트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중간쯤 갔을 때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온계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내에게 아이가 아픈 게 아니냐고 물었고, 그녀는 아이를 카시트에서 꺼내서 품에 안았다. 아이는 좀더 칭얼거리다가 잠에 들었다. 고르메에 도착한 후, 그는 우선 트렁크에서 접어놓은 유모차를 꺼내서 다시 펼쳤다. 그 위에 카시트를 얹어놓았고, 그 위에 잠든 아이를 눕힌 후에 뒷좌석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이 들어 있는 가방을 꺼냈다. 그동안 그녀는 우산을 받쳐들고 있었다. 고르메 식당의 직원 중 한명이 저 멀리서 그들을 쳐다봤다. 그가 유모차를 밀었고 그의 아내가 가방을 들었다. 차가운 눈이 그의 뺨에 부딪혔다. 레스토랑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고, P와 몇몇 사람들이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P는 소매가 없고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어깨에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P가 한 손에 와인잔을 든 채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P에게서 술냄새가 났다.

—어머나, 가족이 다 왔네? 반가워요. 정말, 정말, 정말.

P는 유모차 위의 아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걸까? 우선 저 사람들, 인사부터 해요. P는 그들 가족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테이블에는 세명의 남자가 있었다. 한명은 얼마 전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저명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젊은 영화감독이었고, 다른 한명은 어느 국회의원의 보좌관이었다. 그는 그를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다른 한명은 P의 매니저였다. 이상한 조합이군. 그는 생각했다. 그는 P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소개할지도 궁금했다. 씨나리오 작가? 제작사 직원? 친구? P는 와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친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내 글을 대신 써준 분이야.

그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보좌관이 물었다. 칼럼? 아니면 연설문? 영화감독이 대신 그 말을 받았다. 둘 다. 보좌관이 웃었다. 그렇군. 매니저는 웃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P가 보좌관의 어깨를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이분은 아내고, 여긴 아들. 가만, 아들 이름이 뭐죠? 그들은 잠시 호텔 초이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방화범은 아직도 못 잡았죠? 누군가 물었다. 그들은 일주일 후에 있을 초이선 폭파 철거 날 함께 모여 그걸 볼 거라고 했다. 우리는 이촌동이 한눈에 보이는 호텔방을 하나 빌렸어요. P는 그가 쓴 글, 아니 처음엔 그가 썼지만, 누군가 손을 봐서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닌 글의 어떤 부분을 인용했다.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다시 깨울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영원히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당신도 그날 와요.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P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오, 물론 부인과 아드님도 함께 와요.

—우린 안돼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렇죠?

그의 아내가 대답하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영화감독과 보좌관이 서로 마주 보며 웃었고, 매니저가 이마를 찌푸렸다.

—대관람차가 완공되면 우리는 함께 그걸 타러 갈 생각이에요.

P가 말했다.

—그 안에서 서울의 야경을 보는 거죠. 무척 멋지겠죠?

그러자 영화감독이 그 말을 받았다.

—소리도 지를 거야.

유모차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의 아내가 시선은 그대로 둔 채로 말했다.

—거기서 술을 마시거나 소리를 지를 순 없어요.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럼요. 당연하죠. 우리는 그런 짓 안해요.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은 거예요. 어쩌면 남편이 생각날지도 모르겠어요. 그이는……

P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P의 등에 손을 갖다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그의 가족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들이 가끔 자지러질 듯이 울어댔고—다행히 발광까지는 아니었다—그의 아내는 아이에게 수유를 하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러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지만, 그런 상황에 대해 그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여러번 토했지만 집에서도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는 아이가 울 때마다 마음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뭘 바라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그렇게 했다. 아내가 토한 아이를 씻기고 돌아왔을 때 영화감독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 키우는 게 힘들지 않아요? 그의 아내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영화감독이 다시 물었다. 아이가 엄청 큰 편이죠? 네, 발육이 빨라요. 발육이 빠른 건 좋은 거죠. P가 물었다. 아이가 걸어요? 그때면 걷나? 아님 좀더 기다려야 하나? 아내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거짓말을 했다. 걸어요. 세걸음 정도 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요. 컨디션이 좋으면 입으로 예쁜 소리도 내요.

그가 아이의 그 이상한 웃음소리를 떠올리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P에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전 K씨의 비서였어요.

—언제?

—사년 전까지요. 거의 삼년 동안 그분의 비서였던걸요. 제가 그만두기 일년 전까지 K씨를 자주 보러 오셨죠?

P가 큰 소리로 웃었다. 잘 웃는 여자다.

—전혀 못 알아봤어요. 전혀. 우리 같이 밥 먹은 적도 있었어요. 그쵸? K와 셋이서.

—전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리가요! 정말 못 알아봤어요. 정말 많이 변했잖아요!

—그렇게 많이 변하지도 않았어요.

그의 아내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그때 K가 저이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P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과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웃는 사람은 P뿐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코트가 떨어졌다. 멀리서 직원이 다가오기도 전에 보좌관이 벌떡 일어나 P의 의자 뒤로 갔다. 보좌관은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워서 탁탁 턴 후에 P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뿐이었다. K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비싼 와인을 마시며 자주 웃었다. 아이가 자꾸 칭얼거려서 그는 언젠가부터 아이를 계속 안고 있어야 했다. 그 역시 많이 웃었다. 볼이 아플 정도였다. 술 때문인지 그는 약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는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공기는 무척 차가워서 코가 얼얼할 정도였다. 그는 코트 깃을 세우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도로를 걸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걸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레스토랑에서 너무 멀어졌다. 머리카락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는 불이 켜진 가게로 들어갔다. 제과점이었다. 세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 회색 터틀넥을 입고 까만 뿔테안경을 쓴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70년대 미국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버버리 프로썸 코트를 벗어서 물기를 턴 후에 옆의 의자에 걸어두었다. 내일 당장 세탁소에 맡겨야겠다. 그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점점 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생각들. 그동안 마치 댐에 생긴 구멍을 막듯이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생각들. 그는 자신이 사귀었던 여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 그들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 집에 초대됐던 사람들에 대해서. 거기에 왔던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던 그 눈빛, 자신을 슬쩍슬쩍 만지던 여자들의 그 손길. 옆에 앉은 남자가 음악에 맞춰 상체를 흔들며 춤을 추는 게 보였다. 아니 그건 춤이라기보다는 경미한 경련처럼 보였다. 거대한 상체가 꿈틀꿈틀거렸다. 그는 역겨움을 느꼈다. 그 여자, 엄청 예쁜 여자예요. 예쁜 여자들. 아, 예쁜 여자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뜬 건 그가 모르는 번호였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P의 목소리. 당신 아기, 당신 아기가 죽을 거 같아요. 그는 빵집을 나왔다. 처음에는 걸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는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의 병명은 장폐색으로 인한 패혈증이었다. 첫 개복수술 중간에 의사들은 다시 배를 덮었다.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아이는 그대로 죽지 않았다. 버틸 만큼 버텼기 때문에 아이는 두번째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보좌관이 손을 써주어서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술실 바깥에서 문득 그는, 아이의 죽음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이제는 슬퍼할 힘조차 없어서 완전히 지쳐버린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아내의 죽음을 떠올려보았다. 찰나였지만, 그는 자신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이 죽는다 해도, 아내가 죽는다 해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리라. 그는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아이는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아이가 앞으로 백퍼센트 건강이 회복될 것인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조심하라는 말일까? 그는 자신이 빵집에 버버리 프로썸 코트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병원에 있는 사이 호텔 초이선은 철거되었다. 호텔 초이선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던 그날 밤, 사람들은 폭죽을 사 들고 한강 건너편에 모여 그걸 구경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거대한 불꽃놀이. 그는 저기 호텔 어디선가 그 장면을 지켜보는 P와 그 친구들을 상상했다. 호텔 초이선이 철거된 후 그 다음의 일들은 일사천리였다. 이년여에 걸친 대관람차 공사가 끝나고 공원이 개장되었다. 공원 입구 왼쪽에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커다란 조형물이 세워졌다. 티브이 뉴스는 그 조형물을 한참 보여주었다. 유족들은 압도된 표정으로 그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압도적인 건 대관람차였다. 높이는 175미터였으며, 25인승 관람차 서른다섯량이 이어져 있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였다. 그래, 여러분도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대관람차.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번씩은 타봤을 바로 그 관람차. 그의 가족도 대관람차를 타러 간 적이 있었다. 아들이 세살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아들은 또래에 비해 무척 작았고, 말도 잘하지 못했다. 앞으로 영원히 그럴 것 같았다. 관람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아들이 웃었다. 그건 정말로, 웃음소리였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탁한 색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강과 그리고 저 멀리 철교를 건너는 전철, 그리고 간선도로를 지나는 자동차가 장난감처럼 보였다. 대관람차는 너무 화려하고 거대해서 아무도 외면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지금 저기 전철에 탄 사람들 혹은 저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관람차를 보고 있을 것이다. 관람차 안에 행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자신을 상상하면서. 그는 거기에 탄 다른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맥락도 없이, 갑자기 어쩌면 자신이 진짜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 불행으로부터 끌어올려진 글. 그는 자신이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이야말로 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감정,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감정과도 같다고 느꼈다.

그런데, 몇달 후 그의 아들이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조금 지나자 그의 아들은 여러가지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노래도 불렀다. 그의 아들은 여섯살 때 자전거를 배웠고, 여덟살 때는 정상적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즈음 그는 K의 회사를 나와서 따로 작은 제작사를 차렸고, 길광용 감독의 「문리버」를 제작해서 큰돈을 벌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아들에게 럭비를 시켰다. 그는 아들이 단단한 헬멧과 숄더패드를 착용하고 입에는 마우스가드를 끼운 채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쩔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 럭비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명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 무렵 그는 꽤 많은 영화를 히트시킨 유명 제작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옷장에는 버버리 프로썸, 톰 포드와 지방시 코트가 몇벌씩이나 있었다. 그는 가끔 신인 여배우들과 잠을 잤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했고 존경했다. 더이상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아내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인생 전체라고 대답할 터였다.

어느 밤, 그는 무심코 잠에서 깨었고 갑자기 몸이 얼어붙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죠?

그는 잠에서 깨어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흰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섞인 머리를 곱게 묶어두었는데 아주 통통해져서 마치 만화에 나오는 상냥한 할머니처럼 보였다. 아니면 마녀 같은 것?

—나 이상한 꿈을 꿨어.

—무슨 꿈을요?

그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녀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여보,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 같아.

그는 어둠에 익숙해질 것 같았고, 그게 두려워서 두 눈을 감았다.

—아냐. 그렇지 않아요.

그의 아내가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아내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몇시간 후 그는 다시 잠에서 깼다. 이번에는 아내를 깨우지 않았다. 그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런 일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의 집은 한강변에 있었고 거기서는 한눈에 대관람차가 보였다. 그건 이십여년 동안 거기 서 있었다. 밤에는 운행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비추는 조명은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건 언제나 깨어 있는 것이었다. 영원히 잠들지 않는 그러한 것…… 그는 그게 얼마나 더 거기에 그렇게 살아 있을지 궁금했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는 오래전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한동안 저 자리에 서 있었던 초이선을 떠올렸다. 초이선의 다른 모습은 어쩐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초이선은 진짜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문득 P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친구들. 그는 이 세상의 예쁜 여자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P의 친구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P가 자살했을 때, 아무도 P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자신과 루이 벡터맨의 영화를 함께 봤던 여자를 떠올렸고 그런 자신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삶이 파도에 쓸려온, 아무도 줍지 않는 빈 술병—혹은 과자봉지, 담배꽁초, 혹은 이것저것 등등—처럼 될까봐 두려웠던 그때,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다시는 떠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그는 아무런 공백도 없이 꽉 채워진 이 도시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러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아내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