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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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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훈 崔臍勳

1973년 서울 출생. 2007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 있음. hoonixxx@hanmail.net

 

 

 

현장 부재 증명

 

 

“간단해. 사람이 동시에 두군데 장소에 있을 수는 없거든. 불가능하지, 물리적으로.”

형사는 호응을 바라는 표정으로 M을 쳐다보았다.

“불가능하죠, 물리적으로는.”

M은 형사의 말을 슬쩍 비꼬아 받아넘겼다. 하지만 형사는 말맛을 음미하지 못했는지 늘어진 볼살을 흔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구구절절한 범행 동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범행 현장에 지문으로 떡칠을 해놨더라도, 심지어 안주머니에서 피 묻은 흉기가 나왔다고 해도, 범행 시각에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그만이야.”

형사는 츱, 입맛을 다시고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 현장 부재 증명, 응? 용의자에서 즉시 제외되는 거라고.”

취조실을 둘러보던 M의 시선이 맞은편 벽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거울에 멎었다. 형사의 등판 너머로 수염이 거뭇하게 돋은 심드렁한 얼굴이 비쳤다. M은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영화에서는 취조실에 백열등이 쫙 내리비치면서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장면이 많던데, 실제로는 형광등이네요.”

“백열등은 전기세가 많이 나와.”

“저 거울 뒤에는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어.”

“에이, 실망이네. 미드 보면 저 뒤에서……”

형사가 탁자에 양 팔꿈치를 턱, 올려 손깍지를 끼며 M의 말을 끊었다. 굵은 손마디들이 서로를 빈틈없이 옭아맸다.

“참, 아까 저한테 미란다 원칙은 고지했나요?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어쩌고……”

“지난 수요일 밤 열시에서 자정 사이에 어디 있었지?”

형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볼링공처럼 굴러왔다. M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팔짱을 꼈다.

“수요일이요?”

“수요일.”

“보자, 수요일이면 어제, 그제, 그끄제…… 몇시라고요?”

“밤 열시에서 자정 사이.”

“수요일 열시에서 자정 사이면……”

M은 허공을 비스듬히 째려보다가 아, 하며 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달나라에 있었어요.”

“달나라.”

“예, 옥토끼한테 확인해보세요. 같이 떡방아를 찧었으니까.”

형사는 몸을 뒤로 기대며 츱, 입맛을 다셨다. M도 따라서 츱, 입맛을 다셨다.

“가도 되나요? 좀 바쁜데.”

형사는 옥토끼, 옥토끼, 입속말로 웅얼거리며 옆에 놓인 파일을 펼쳐 들었다. M은 공중에 떠 있는 오른발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삐죽빼죽한 서류 뭉치를 뒤적이는 형사의 손놀림에 따라 발을 흔드는 박자가 점점 불규칙하게 어긋났다. 형사가 A4 사이즈로 인화한 사진 한장을 M의 앞에 놓았다. 부검용 철제 침상에 눈을 감고 드러누운 여자의 상반신 사진이었다. 이마 한가운데가 움푹 꺼졌고 피부는 푸르뎅뎅하게 변색된 상태였다. 젖무덤 위쪽 절개 부위는 검은 실로 얼기설기 꿰매져 있었다.

“알아보겠어?”

M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형사가 사진 한장을 더 꺼내어 부검 사진 위에 탁, 겹쳐놓았다. M의 얼굴이 급속냉각된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원룸으로 보이는 방에 핑크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가 눈을 까뒤집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상의 지퍼가 반쯤 내려가 가슴에 큼직하게 붙은 로고는 ‘PI’와 ‘NK’ 두패로 쪼개졌다. 몸에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를 중심으로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피에 젖은 머리채가 물미역처럼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은 금방이라도 달싹거릴 것 같았다. 절 이렇게 만든 개자식은요…… 형사가 들고 있던 몇장의 사진을 M의 앞에 차례차례 겹쳐놓았다. 변사체를 다양한 각도에서 잡은 사진들이었다. 몸싸움이 벌어졌는지 주위는 난장판이었다.

“윤미나, 삼십세, 마포구 신수동 거주, 사망 추정 시각은 수요일 밤 열시에서 자정 사이.”

형사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ARS 음성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자, 다시 묻지. 지난 수요일 밤 열시에서 자정 사이에 어디에 있었나?”

M은 핏기 없는 얼굴로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윤미나…… 이 여자 이름입니까?”

“오호, 계속 버티시겠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웬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하셨나? 수요일 오후 두시 오분, 이십삼분, 다섯시 십일분, 세번이나. 피살자 휴대전화에 찍힌 마지막 통화야. 그리고 여기.”

형사는 집게손가락을 뻗어 사진의 한구석을 톡톡 두드렸다. 앉은뱅이 화장대 옆에 깨진 유리잔이 떨어져 있었다.

“이 유리잔에 네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어. 현장에서 발견된 십자드라이버에도. 이상하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 방에 말이야.”

“아뇨, 압니다. 누가 모른다고 했나요.”

M은 고개를 쳐들고 버럭 항변했다. 사진에 침방울이 튀었다.

“수요일에 이 집에 갔었어요. 맙소사, 이 여자가 정말 그날 밤에 죽은 건가요? 멀쩡히 살아 있었는데…… 이름은 몰랐어요. 세탁기 때문에 잠깐 만났던 겁니다.”

“세탁기?”

“예, 인터넷 중고매매 싸이트에 미니 세탁기를 판다고 올렸거든요. 곧 이사를 가는데 거긴 세탁기가 옵션으로 있어서. ‘중고나라’ 사이트에 들어가면 지금도 떠 있을 겁니다.”

“계속 읊어봐.”

“미니 세탁기는 인기 품목이라 금방 연락이 왔어요. 이분은……” M은 곁눈으로 사진 속의 여자를 흘끔거렸다. “사실 두번째였는데, 집까지 운반해주면 이만원을 더 얹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마포면 그리 먼 것도 아니라서, 처음 전화했던 사람한테 양해를 구하고 이쪽에 팔기로 했죠. 그래서 세탁기를 차에 싣고 갔는데……”

“그게 몇시였지?”

형사의 퉁명스런 질문에 M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세번째 통화한 시간이에요. 집을 못 찾겠으면 성당 앞에서 전화하라고 했어요. 전화했더니 금방 나오더라고요.”

“그럼 집에 들어간 게 다섯시 반쯤 됐겠네?”

“그쯤 됐을 겁니다.”

형사는 서류에 메모를 하고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세탁기를 들여놨더니 어떻게 설치하는 거냐고 묻더군요. 여자 혼자 사는 것 같기에 내가 설치해주겠다고, 드라이버를 달라고 했죠.”

형사의 차가운 눈길이 M의 안면을 훑었다.

“베란다 수도꼭지에 호스 연결하고 수평만 맞추면 되는 거니까요. 이만원 더 받는데 그 정도야, 뭐. 그런데 수도꼭지가 밀착이 안돼서 자꾸만 물이 새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근처 철물점에서 방수테이프 사다가 감고 하느라고 생각보다 애먹었습니다. 시간도 꽤 걸렸고. 끝내고 나니까 고맙다면서 오렌지주스를 한잔 주더라고요.”

 

*

 

“수고하셨어요.”

여자가 얼음을 띄운 오렌지주스 잔을 건넸다. 나는 베란다 문틀에 기대서서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귀밑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여자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고 세탁기를 깔떠보았다.

“생각보다 작네. 귀엽기는 한데…… 세탁은 잘돼요?”

“잘돼요.”

“중국산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이얼은 알아주는 회사예요. 중국에서는 삼성이나 마찬가지죠.”

여자는 옅게 콧바람을 내뿜었다. 불룩한 가슴이 핑크색 트레이닝복 앞판에 붙은 ‘PINK’ 로고를 양쪽에서 떠받치고 있었다. 눈을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사계절 옷이 빽빽하게 매달린 행거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옷들의 색상과 스타일이 제각각이라 딱히 취향이란 걸 짐작하기 어려웠다. 앉은뱅이 화장대와 도시바 노트북, 브라운관 TV, 침대 발치에 흩어진 여성지와 만화책 몇권. 평일 낮에 출근도 안하는 것 같고,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걸려 있었다. 몇해 전 대기업 사모님의 비자금 사건으로 유명세를 치른 그림이었다. 그게 삼성이었던가? 아무튼 한컷의 만화 같은 작품이 백억원을 호가한다는 뉴스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들렀던 토스트 가게에도 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강아지 키우나봐요?”

냉장고 옆에 놓인 애완동물용 플라스틱 식기를 눈짓하며 물었다. 여자가 열린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더니 밖을 두리번거렸다.

“고양이요. 아까 이리로 나갔는데 안 들어오네.”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배고프면 알아서 들어오더라고요. 내킬 때마다 한번씩 들락거려요.”

창밖에는 일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옆집의 벽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저요?”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고양이요.”

“아, 잠파노.”

“페데리꼬 펠리니의 「길」?”

“예?”

“그 영화에서 따온 이름 아닌가요? 남자 주인공, 그 쇠사슬 끊는 차력사.”

“「도둑들」에서 따온 건데요. 김수현, 완전 귀엽잖아요.”

여자는 김수현의 복근을 만지는 상상이라도 하는 듯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오렌지주스를 마저 마시고 유리잔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미끄러져 들어온 얼음조각 하나가 차가운 모서리로 혀와 입천장을 긁었다.

“아, 돈 드려야지.”

여자가 행거에 걸린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미리 준비해놓지 않았는지 오천원권, 천원권까지 총출동했다. 돈을 헤아리는 여자의 오른 손목에 눈길이 갔다. 손목 안쪽에 독특한 문양의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서로의 꼬리를 붙잡고 원형으로 얽혀 있는 두마리 원숭이. 오래전에 새긴 것인지 피부와 잉크의 경계선이 희미했다.

“자, 여기.”

 

*

 

“그래서 주스 한잔 마시고 나온 게 답니다.”

M은 힘주어 말끝을 맺었다. 형사는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교대로 움직여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바로 나왔다. 그게 몇시지?”

“한 삼사십분쯤 머물렀을 겁니다. 여섯시 조금 넘었겠죠.”

“흠, 여섯시. 나와서는?”

“곧장 집으로 갔습니다. 아니, 동네 돼지국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그러고는…… 집에서 밤새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 작가야?”

“예.”

“밤새 집에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이 있나?”

“혼자 처박혀 소설 쓴 걸 누가 증명해줍니까.”

“알리바이가 없다는 거네.”

M은 몸을 들썩이며 무언가 말하려다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파일을 들척거리던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M은 고개를 저었다. 형사는 목을 좌우로 돌리며 어기적어기적 취조실을 나갔다. 문이 쾅, 바람을 일으키며 닫혔다.

M은 앞에 놓인 사진 뭉치를 손가락 끝으로 집어들고 한장씩 넘기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깨진 유리잔에는 엷은 주황색 물이 고여 있었다. 초록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드라이버는 화장품 병들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넘어진 행거 주위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붕괴사고 현장의 팔다리 꺾인 시신들처럼 보였다. M은 여자의 전신이 나온 사진을 눈앞에 대고 오른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두마리의 원숭이는 조그만 검은 점으로 뭉그러져 서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벌컥 문이 열리며 종이컵을 든 형사가 들어왔다. M은 사진 뭉치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땀이 밴 손가락이 반질반질한 사진 표면에 선명한 지문을 남겨놓았다. 자리에 앉은 형사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사진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꽤 미인이야, 이 아가씨. 키는 작지만 몸매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고. 와, 가슴이……”

형사는 M을 칩떠보았다.

“애인 있어?”

“없는데요.”

형사가 사진을 넘기며 느물느물 웃었다.

“쏠렸겠네.”

M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잖아.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에 우연히 단둘이 있게 됐다. 착 달라붙는 추리닝에 화장품 냄새 솔솔 풍기고, 옆에 침대도 있겠다, 남자가 좆에 피가 쏠리고 그래야 정상이지.”

“뭐 하자는 겁니까?”

“왜? 진한 로맨스 소설 한번 써보려 했는데 여자가 거부하던가? 막 소리 지르고 쫑코 주고 그랬어?”

“그만하시죠. 사람 어떻게 보고.”

“위층에 사는 학생이 그러데. 여섯시쯤 집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 집 현관문 너머에서 남자와 여자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 참, 뭐라고 하면서 다투더랍니까?”

“내용까지는 모르겠대. 내려가는 길에 얼핏 들은 거라.”

“그런데 다투는 소리란 건 어떻게 확신한답니까? 그저 말소리를 들은 거겠죠. 살인사건이 났다니깐 그게 기억 속에서 뻥튀기돼 주워섬긴 거고.”

“어쭈, 심리수사까지 하시네.”

M은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뺨에 벌겋게 쓸린 자국이 남았다.

“형사님, 전 그 집에 세탁기 갖다 주고 오렌지주스 한잔 마시고 나왔을 뿐입니다. ‘전원 돼지국밥’이라고, 거기 주인 할머니한테 확인해보세요. 단골이니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확인할 거야. 옥토끼보다는 쉽겠네.”

M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사는 츱,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그거 확인한다고 네 알리바이가 입증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 저녁으로 돼지국밥 한그릇 먹고 집에 들어갔겠지. 세탁기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으니 땀도 흘렸을 테고, 시원하게 샤워를 했겠지. TV 보면서 맥주도 두어캔 까고. 그런데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씨팔, 이게 쪽팔리는 거야. 넌 나름 텔레파시가 통했다 확신하고 액션 들어간 건데, 개망신을 당했으니. 자존심 긁는 욕도 처먹었을 테고, 응? 따귀까지 맞은 거 아냐? 생각할수록 열받고 참을 수가 없었겠지. 외로운 영혼끼리 엔조이 좀 하자는데, 뭐 그리 잘났다고 앙탈이냐. 쌍년, 재수 없는 년. 결국 날이 컴컴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넌 다시 집을 나선 거야. 자기를 발정난 똥강아지 취급한 여자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사람을 아주 싸이코패스로 만드는군요.”

“아니지. 싸이코패스였다면 그 자리에서 끝장을 봤겠지. 꼬리 말고 물러났다가 다시 찾아갔다는 건, 그냥 찌질이의 뒤끝이랄까.”

M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탕탕, 두드렸다.

“찾아가긴 누가 찾아갑니까. 전 그 시간에 집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니까요. 마감은 코앞에 다가왔는데 꽉 체한 것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고요.”

“흠, 미칠 지경이었다.”

“일단 닥치는 대로 끼적여보자, 가슴속 체증이 뚫리고 나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래서 사흘 동안 거의 잠도 안 자고 키보드만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댁들이 다짜고짜 쳐들어와 여기로 끌고 오기 전까지.”

“사흘 동안 잠을 못 잤다. 왜 그랬을까……”

형사는 집게손가락으로 눈가를 갉작이며 말끝을 흐렸다. M의 부르튼 입술 사이에서 빠드득,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봐요, 형사님. 이미 제 전과도 조회해봤을 거 아닙니까. 사소한 폭력 전과 하나 없는 사람이 갑자기 흉악한 살인마로 돌변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왜 죽입니까?”

“모르지. 사람이란 동물은 어찌나 심오한지 당최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거든.”

M과 형사는 턱을 당기고 앉아 서로를 쏘아보았다. 미묘하게 변하는 눈빛만이 엎치락뒤치락 허공에서 드잡이를 했다. 둘 사이의 침묵이 구덕구덕 말라갈 즈음, 노크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취조실 문이 열리고 검은 가죽재킷을 걸친 스포츠머리가 상체를 디밀었다.

“고형사님.”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으로 갔다. 둘은 문 앞 복도에 등을 보이고 서서 웅얼웅얼 말을 주고받았다. 주로 가죽재킷이 속닥거렸고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짧게 질문을 던졌다. M은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냄비의 죽을 휘젓듯이 지그시, 원을 그리며. 열린 문틈으로 취객의 걸걸한 고성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당신이 날 알아? 알아? 나도…… 사라졌다고. 사라졌어. 사라져서…… 어떻게 조용히 해! 이렇게 시끄러운데. 이 가슴속에 기관차가…… 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취객의 두서없는 자기고백은 탕, 문소리와 함께 끊겼다. 형사가 의자를 멀찌감치 뒤로 빼더니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손에는 공문서 이면지 몇장이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자네 알리바이란 말이지?”

M의 등허리가 곧추 펴졌다. 벌겋게 충혈된 눈에는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영장도 없이 남의 노트북을 뒤져도 되는 겁니까!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형사는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글자가 빽빽하게 인쇄된 종이를 읽어내려갔다. 이건 지적재산권 침해다, 당장 변호사를 불러달라, 국가인권위에 고발하겠다, M이 목청을 돋워 항의했지만 형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종이가 한장 한장 넘어갈수록 형사의 얼굴빛이 야릇하게 변했다. 이따금 볼살이 실룩이고 털이 숭숭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M의 표정은 눈에 띄게 일그러져갔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형사는 여운을 음미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식어빠진 커피를 홀짝였다. M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재밌네, 소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그건 그냥……”

“뭘 오해해, 재밌다니깐. 글재주가 있네. 마무리만 잘하면 바로 피의자 진술서로 써도 손색이 없겠어.”

“하, 설마 제가 실화를 곧이곧대로 옮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생판 없는 일 쓴 것도 아니구먼. 여기 보면……” 형사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종이를 뒤로 몇장 넘겼다. “피살자 윤미나의 방이 그대로 나오잖아.”

 

*

 

“수고하셨어요.”

여자가 얼음을 띄운 오렌지주스 잔을 건넸다. 나는 베란다 문틀에 기대서서 주스를 한모금 마셨다. 귀밑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초가을 치고는 더운 날씨였다. 여자는 세탁조 덮개를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세탁조 안에서 내 수건과 양말과 속옷이 그녀의 수건과 양말과 속옷과 뒤엉겨 돌아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세제 거품을 뒤집어쓰고 서로의 땟물이 뒤섞이는.

“생각보다 작네. 귀엽기는 한데…… 세탁은 잘돼요?”

“생각보다 잘돼요.”

여자는 콧잔등을 찡긋하며 덮개를 닫았다. 불룩하게 솟은 핑크색 트레이닝복 가슴에 ‘PINK’라는 로고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어쩐지 웃기도 애매한 우악스러운 유머를 보는 기분이었다. 눈을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사계절 옷이 빽빽하게 매달린 행거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등뼈가 휘어 있었다. 옷들의 색상과 스타일은 주인의 취향을 절대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듯 제각각이었다. 앉은뱅이 화장대와 도시바 노트북, 브라운관 TV, 침대 발치에 흩어진 여성지와 만화책 몇권. 무슨 일을 하는 여잘까? 평일 낮에 출근도 안하는 것 같고. 침대 머리맡에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걸려 있었다. 저 빨간 머리 아가씨는 우리 동네 토스트 가게와 호프집과 이동통신 대리점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으로 눈물이 헤픈 아가씨였다.

“강아지 키우나봐요?”

냉장고 옆에 놓인 애완동물용 플라스틱 식기를 눈짓하며 물었다. 여자가 열린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더니 밖을 두리번거렸다.

“고양이요. 아까 이리로 나갔는데 안 들어오네.”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배고프면 알아서 들어오더라고요. 길고양이 새끼라 그런가, 내킬 때마다 한번씩 들락거려요.”

창밖에는 일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옆집의 벽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나는 창턱에서 몸을 한껏 옹크렸다가 담벼락을 향해 점프하는 얼룩 고양이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름이 뭐예요?”

“저요?”

여자의 눈이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아니, 고양이요.”

“아, 젤소미나.”

“페데리꼬 펠리니의 「길」?”

“예?”

“그 영화에서 따온 이름 아닌가요? 여주인공, 그 차력사와 다니며 트럼펫 부는.”

“「바닐라 신드롬」이란 만화에서 따온 건데요. 젤소미나, 왠지 신비하면서도 깜찍하잖아요.”

여자는 신비하지는 않지만 깜찍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오렌지주스를 마저 마시고 유리잔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미끄러져 들어온 얼음조각 하나가 차가운 모서리로 혀와 입천장을 긁었다.

“아, 돈 드려야지.”

여자가 행거에 걸린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는 만원권이 제법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돈을 헤아리는 여자의 오른 손목에 눈길이 갔다. 손목 안쪽에 독특한 문양의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서로의 꼬리를 붙잡고 원형으로 얽혀 있는 두마리 원숭이. 오래전에 새긴 것인지 피부와 잉크의 경계선이 희미했다.

“자, 여기.”

 

그새 은색 카니발이 내가 주차했던 단독주택 담벼락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 주변을 빙빙 돌다가 간신히 공사장 펜스 옆에 빈자리를 찾아 차를 세웠다.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전원 돼지국밥’에서 저녁을 때우고 들어가기로 했다. 반주로 소주를 곁들여서. 국밥 한술에 소주 한잔씩 넘기다보니 금세 또 한병을 시켜야했다. 뭔 일 있어? 흐트러진 백발이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주인 할머니가 소주병을 건네며 물었다. 없어요. 왜 이리 아무 일도 없을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베토벤 할머니는 에라, 하며 쌕 웃었다. 속이 더부룩해 국밥은 반도 못 먹고 나왔다. 대신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병을 더 샀다.

정육면체의 방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거대한 주사위 속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어떤 골샌님의 명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신은 종일 주사위 놀이만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처럼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소주를 홀짝이면서. 그 양반, 얼마나 무료하겠는가. 눈을 감으니 주사위는 더욱 신나게 돌아갔다. 나는 더듬더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2011, 2010, 2009, 2008, 2007…… 술을 입에 대는 것이 정확히 오년 사개월 십칠일 만이었다. 오랜만인데, 잘도 들어가네.

오년 사개월 십칠일 전의 내게 금주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니 선택이라기보다는 발버둥에 가까웠다. 정규분포곡선의 거대한 종() 속에 한 발이라도 걸치고 살기 위한 발버둥. 이년 넘게 이어진 꾸준한 폭음은 몸보다 정신을 먼저 허물었다. 내 정신보다 튼튼한 간과 위장을 위해 건배! 가벼운 조울증이 고작이었던 주사가 헐크로 변하듯 점차 폭력적인 양상을 띠어갔다. 처음에는 꼴사나운 자해로, 이어서 기물 파손으로, 급기야 타인에 대한 과도한 공격성으로. 결국 오뎅바에서 내게 ‘호로새끼’인지 ‘호모 새끼’인지 욕설을 던진 옆 테이블 양복쟁이의 이빨 두대를 부러뜨렸다. 합의금 천만원을 구하느라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다니면서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깟 일로 단박에 술을 끊은 나도 참 독종이었다. 그동안 마시고 싶어 마신 것도 아니었건만.

꾸준한 폭음의 시작은 Y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애당초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것부터가 어쭙잖은 쇼였다. 녀석은 소대 사격훈련 도중 느닷없이 소총을 들고 사로(射路)에서 뛰쳐나갔다고 한다. 통제실의 소대장과 탄창을 교체하던 분대원들이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Y는 표적과 사선의 중간 지점까지 내달린 후 괴성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람보처럼 소총을 옆구리에 낀 채로.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분대원들은 자신에게 위협적으로 총구를 겨눈 과녁을 향해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훈련은 그러라고 했던 거니까. 여덟정의 소총이 반자동으로 불을 뿜었고 Y는 스물세발의 총알이 박힌 채 사격장 한복판에 쓰러졌다. 분대원들이 총 백육십발을 쏘았으니, 그리 자랑할 만한 실력들은 아니었다. Y의 탄창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는 자체 조사 결과 “부대 내 가혹행위는 없었으며 일시적인 정신착란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결론을 내렸다. Y의 가족은 강력하게 은폐 의혹을 제기했지만, 나는 조사 결과를 대체로 수긍했다. 가혹행위는 ‘부대 내’의 문제가 아니었다. 병신 새끼, 그러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니까. 난 Y의 영정사진을 보며 되뇌었다. 그러게. 그래도 피날레는 멋지게 장식했잖아. 「보니 앤드 클라이드」의 라스트씬처럼. 흑백의 Y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폼 나게 죽기가 쉬운 줄 알아? 그래, 잘났다. 아메리칸 뉴 씨네마의 효시인 「보니 앤드 클라이드」는 국내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화끈한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세상을 향해 기관총을 갈겨댄 전설적인 은행강도 클라이드 배로우는 좆이 서지 않는 성불구였다.

나는 Y가 입대했다는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 Y는 휴학하고 외가가 있는 속초로 내려갔다. 내가 몇번이나 만나러 가겠다고 했지만 Y는 완곡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안해. 당분간 좀 쉬고 싶어. 혼자, 조용히. Y의 목소리 뒤로 늘 파도가 쳤다. 그 ‘당분간’은 여름과 가을을 거치며 하염없이 늘어졌다. 어느날부터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난 무작정 속초로 내려가 바닷가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지만, 혼자 조용히 쉬고 있는 Y를 찾을 수는 없었다. 차분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했다. 넉달 넘는 병원 생활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고, 오른쪽 고막 손상으로 영화 싸운드 디자이너의 꿈이 날아갔다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했다. 무엇보다 팔다리를 옥죄고 있는 ‘공포’라는 구속복이 문제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난 버클이 헐거워질 때까지 함께 꼼지락거리며 버티기를 바랐다. 하지만 공포가 주는 공포를 이기지 못했던 Y는 강제로 구속복을 뜯어내려 몸부림쳤다. 매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가 바뀐 2004년 초여름 어느날, 붐비는 홍대 거리에서 우연히 Y를 목격했다. 청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애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Y를.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휘적휘적 그들을 쫓아다녔다. 까페로, 영화관으로(둘은 「첫 키스만 50번째」를 봤다. 하!), 칵테일바로, 지하철로, 아현동 골목길로. 청미니스커트의 자취방인 듯한 다세대주택 앞에서 둘은 헤어졌다. 손을 흔드는 여자애의 입가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혼자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는 Y를 따라잡았다. 의례적인 인사말은 놀란 표정으로 대신했다. 뭐야, 쟤는? 학교 후배야.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예쁘지? Y는 멋쩍게 웃었다. 예쁘기는, 치와와같이 생겨가지고…… 그래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Y는 계단 위쪽 조그맣게 잘린 사각형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란에 실패한 망명자 같은 그 눈빛이 난 못마땅했다. 나, 좀 변한 것 같아. 지랄하네. 총총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장승처럼 우뚝 선 우리를 스쳐갔다. 잤어, 쟤하고? 나를 바라보는 Y의 까만 눈동자에서 무언가 반득하고 사라졌다. 나보고 젠틀해서 좋대. 우리는 동시에 픽, 웃었다. 그날 난 Y의 팔을 잡고 반강제로 여관까지 끌고 갔으나 Y는 끝내 내 불알을 걷어차고 달아났다. 그 너절한 장면이 우리의 라스트씬이 될 줄이야.

2002’라는 숫자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일종의 클리셰가 아닐까? 22 사이에 놓인 축구공과 태극문양,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 반짝이는 뿔과 삼지창, 온 국민이 손뼉에 맞춰 합창하는 “대~한민국!” Y와 내가 겪은 악몽마저도 그 용광로 속에 녹아든 소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면 말단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

우리는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더구나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장소는 질색이었지만, 대한민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광장의 붉은 물결에 합류했다. 월드컵이 우리에게 뜻밖의 기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인파 속에서 당당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연인의 권리. 우리 팀의 공격으로 응원단이 달아오를 때면 벌긋하게 취한 Y와 내가 손을 잡거나 끌어안고 애무를 해도 주위에서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골이라도 넣으면 과장되게 딥키스를 나누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오히려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간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이었다. 야, 이런 기분이었구나. 스릴 있다, 그치? 응, 다음 게임은 언제야? Y와 내게 월드컵 거리응원은 은밀한 반란이었던 셈이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투명한 반란. 대다수 국민들과는 상이한 이유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승리를 염원했고, 태극전사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강까지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악몽은 전차군단 독일과의 준결승전이 있던 날 벌어졌다. 경기는 후반전 막바지까지 00의 피 말리는 접전. 광장에 운집한 붉은 악마들은 대형 스크린을 향해 파도치듯 함성을 쏟아냈다. 전후반 내내 변변한 공격 기회조차 잡지 못해 다소 욕구불만 상태였던 Y와 나도 열렬히 응원을 보냈다. 팽팽한 긴장감이 백만 관중의 머리 위를 휘돌았다. 어느 쪽이 먼저였던가? 우리 팀 골네트를 흔든 미하엘 발락의 슛, 얼굴에 요란하게 보디페인팅을 하고 배꼽을 드러낸 여자애의 손목을 틀어쥔 Y. 그녀는 또다른 이유로 대한민국의 승리를 염원했을 소매치기였다. 뒷주머니에 꽂힌 내 지갑을 노리는 걸 Y가 잡아챈 것이었다. 불의의 상황에 세 사람 모두 멈칫하는 찰나, 여자애가 냉큼 목놓아 외쳤다.

 

악! 뭐 하는 거예요. 어딜 만져. 도와주세요! 치한이야!

 

아마도 이런 상황에 대비해 대사를 연습한 모양이었다. 흥분한 군중이 우리를 바투 에워쌌다. 그들이 본 건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불콰한 낯빛으로 자그마한 여자애의 손목을 비트는 광경이었다. Y는 눈을 부라리며 뭐라고 떠듬거렸지만 그녀의 울먹이는 비명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 새끼 뭐야! 꼭 저런 놈들이 있다니까. 이 중요한 순간에, 파렴치한 새끼. 빨리 잡아! 경찰에 넘겨!

 

Y가 항변하기 위해 팔을 내두르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손들이 튀어나와 Y를 붙잡고 쓰러뜨렸다. 이어서 수많은 발들이 그를 밟고 걷어찼다. 난 Y를 막아서며 뜯어말렸지만 이내 쓰러져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치명적인 골을 먹은 실망감에 과격한 시민의식이 합세해 사람들은 일순간 이성을 잃었다. 붉은 제복의 난폭한 진압군이 넘어진 우리를 향해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울긋불긋 색칠한 얼굴들, 머리 위에서 새빨간 빛을 내뿜는 날카로운 뿔, 여기저기서 들썩이는 삼지창,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낸 치우천왕…… 모든 게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환영처럼 보였다. 고통만 빼고. 나는 피범벅이 된 Y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신을 잃기 직전, 경기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과 함께 거대한 탄식이 시청광장을 울렸다.

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재수학원에서 Y를 처음 만났던 시절로. 서로의 취향을 떠보기 위해 넌지시 던진 농담들, 백화점 남자화장실에서 나눈 첫 키스, 휘파람으로 「레인드롭스 킵 폴링 온 마이 헤드」를 불 때 동그랗게 주름지는 입술, 펠리니의 「길」이나 베르똘루치의 「몽상가들」을 예찬하는 허스키한 음성, 생각에 잠길 때면 빠르게 팔락이는 긴 속눈썹, 내 귓바퀴 아래서 두근거리는 Y의 심장, 내 혓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는 Y의 성기…… 아무리 떠올려봤자 이젠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텅 빈 객석에 홀로 앉아 지루한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날의 사건이 필터처럼 통로를 꽉 틀어막은 채 이전의 기억들을 무색무취의 맹물로 걸러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게 변했다. 내 삶의 리얼리즘은 그토록 장엄하고 극적인 헛소동으로 시작됐으니. 우리 팀의 골네트가 흔들리는 순간 터져나온 백만 관중의 탄식, 여자애의 손목을 틀어쥔 Y의 손아귀, 핏줄이 팔딱이는 하얀 손목 안쪽에 새겨진, 서로의 꼬리를 붙잡고 원형으로 얽혀 있는 두마리 원숭이.

 

세병째 소주와 냉장고에 있던 캔맥주까지 깡그리 비웠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쟁쟁거리는 목소리가 대뜸 짜증을 냈다.

“세탁기가 자꾸 꺼지잖아요. 다 꺼내서 손빨래해야 될 판이에요.”

“어제도 잘 돌아갔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말만 믿고 확인을 안했더니, 참. 아무튼 이거 안 살 거니까 환불해주세요.”

“환불이요?”

“고장난 걸 속이고 팔았잖아요. 사기죄로 고소할 수도 있다고요. 내일 당장 와서 가져가세요.”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를 보았다. 아홉시 반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여자의 고양이는 돌아왔을까? 뜬금없이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일은 제가 일이 있는데, 지금 가도 될까요?”

“그러시던가.”

주사위는 여전히 어지럽게 돌아갔다. 세탁조 안에서 내 수건과 양말과 속옷이 그녀의 수건과 양말과 속옷과 뒤엉겨 돌아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세제 거품을 뒤집어쓰고 서로의 땟물이 뒤섞이는. Y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움이 부서질 땐 그 파편이 어딘가 작은 흠집이라도 남겨야 하는 게 아닌가. 이로써 세상이 조금 더 타락했음을 환기할 수 있도록.

침대에서 내려오니 몸이 지그재그로 휘청거렸다. 오년 사개월 십칠일 만에 밟아보는 술망나니 스텝이었다. 욕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오줌을 누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신발장에서 망치를 찾아 품에 넣고 집을 나섰다. 나도 그녀에게 환불 받고 싶은

 

*

 

“아쉽네. 마저 쓴 후에 쳐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형사는 종이 뭉치를 내려놓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자, 여기서 마무리해보자고. 망치를 들고 여자의 집에 찾아가서, 어떻게 됐지?”

M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형사님, 이건 소설이라고요, 소설. 이 허구의 이야기가 제가 살인범이란 증거라는 겁니까?”

“신통하잖아. 이 허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인공은 아홉시 사십분쯤 집을 나섰으니 열시 남짓에 도착했을 테고, 피살자의 사망 추정 시각과 딱 맞아떨어지네.”

“그거야 우연히……”

“아, 물론 여자가 전화로 땍땍거렸다는 건 허구겠지. 그 시간엔 통화 기록이 없으니까. 사람이 양심이 있지, 설마 고장난 세탁기를 팔았겠어. 넌 다분히 계획적으로 그 집을 다시 찾아간 거야.”

M이 반박하려 했지만 형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건 말이야……”

형사는 파일을 뒤적여 서류 한장을 꺼내더니 또박또박 낭독했다.

“사망 원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의 함몰 골절과 이에 수반된 두개내출혈임. 후두부에 두차례, 좌측두부와 이마에 각각 한차례, 총 네차례 타격이 가해졌음. 골절 부위의 모양으로 보아 둔기는 지름 2~3센티미터가량의 원형 도구임. 괄호 열고, 망치로 추정됨, 괄호 닫고.”

마지막 부분을 형사는 서류 너머로 M을 건너보며 느릿느릿 읽었다. M은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린 혀를 힘겹게 움직였다.

“허…… 전 알지도 못했어요, 사인이 뭐였는지. 망치야, 뭐, 흔하니까…… 우연이겠죠.”

“우연. 십년 전의 그 소매치기와 세탁기 때문에 딱 맞닥뜨린 것처럼 말이지?”

“아, 정말, 그건 그냥 소설이라니까요! 픽션!”

“난 왜 자꾸 픽션 쪽에 더 신뢰가 갈까. 술은 어때? 아까는 저녁만 먹고 들어갔다고 했는데, 그날 술 안 마셨어? 전원 돼지국밥 베토벤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

“그게…… 젠장, 저도 잊고 있던 걸 어떻게 일일이 보고합니까? 예, 생각해보니 마셨네요. 소설처럼 그렇게 들이부은 건 아니고, 속상한 일도 있고 해서 반주로 딱 한병 했습니다.”

“그럼, 속상하지. 속상한 일이지.”

형사는 코웃음을 지으며 앞에 놓인 M의 소설을 해작해작 들추었다.

“칠팔년 전이었나, 나도 뉴스에서 봤던 기억이 나네. 해병대 사격장에서 이병이 난동을 부리다 동료 사병들의 총에 맞아 사망. 당시에 꽤 시끄러웠잖아. 뭐, 그래 봤자 며칠뿐이었지만.”

M이 딸꾹질을 하듯 움찔했다. 형사가 눈만 치떠 M을 흘끗 쳐다보았다.

“모르는 친구야? 이름 찾아 털어보면 금방 나와. 어느 대학 무슨 과인지, 몇년도에 어느 재수학원을 다녔는지. 참, 자넨 재수했어?”

M은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예, 그 이병…… 제 친구였습니다.”

“친구야, 애인이야?”

M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절 잡아넣고 싶으면 제대로 된 증거를 내놓으시죠. 소설 말고, 내가 살인범이라는 물적 증거를.”

형사는 손가락을 쫙 펼쳐 앞이마에서 뒤통수까지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 M의 턱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 사람 사이에 걸린 보이지 않는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 생각을 말해줄까? 넌 말이야, 소설을 쓴 게 아니야. 살인을 저지르고 와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었던 거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아닙니다.”

M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눈이 뒤집힐 만도 하지. 사랑하던 애인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간 원흉과 마주쳤으니, 응? 그동안 술까지 끊으며 꾹꾹 꿍쳐놓았던 분노가 펑, 폭발했을 거야.”

“아닙니다.”

“울분을 참지 못해 퍼마신 술 때문에 ‘타인에 대한 과도한 공격성’이 튀어나왔을 테고. 결국 너도 모르게 망치를 들고 찾아가서, 퍽! 퍽! 퍽! 퍽!”

“아닙니다.”

M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그래, 자네 사연을 참작하면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도 있어. 자백하고 변호사만 잘 구하면 중형은 피할 수 있을 거야.”

“아니라고요.”

“기어이 죽은 연인의 존재마저 부정할 셈인가, 응? 네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며.”

M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희번덕이는 눈알이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아니라니까! 썅, 그래서 죽인 게 아니라고!”

쨍,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얇은 얼음장이 생겼다. 곧이어 터져 나온 M의 절규가 얼음장을 산산조각 내며 취조실에 메아리쳤다.

“그 여자가 이만원을 얹어주기로 해놓고는 만원밖에 주지 않았어요! 통화할 때 분명히 이만원이라고 말했는데, 자기는 만원이라 그랬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겁니다. 내가 미쳤습니까! 만원 더 받자고 세탁기를 내 차로 싣고 가서, 삼층까지 낑낑대고 올라가서, 땀 뻘뻘 흘리며 설치해주게! 망할 수도꼭지는 물이 새서, 철물점에서 방수테이프까지 사다 감아줬는데. 뭐? 내가 뻔뻔하다고? 세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 누가 할 소릴. 게다가 돌아왔더니 주차 자리까지 뺏겨 한참을 빙빙 돌았다고요!”

속사포처럼 쏟아낸 M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심호흡을 했다. 형사는 어정쩡하게 입을 벌린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때는 잠깐 실랑이만 하다 돌아왔어요. 돈 만원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꼴도 우습고. 그런데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왔더니……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겁니다. 예, 쪽팔리고 열받았어요. 등신같이 제대로 대꾸도 못한 게. 되레 푼돈에 목숨 거는 좀팽이 취급이나 당한 게. 베란다에 세탁기가 있던 자리를, 타일 위의 그 네모난 흔적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집을 나섰습니다.”

M은 텅 빈 눈동자로 왼편 허공을 쏘아보았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으로 찾아간 건 아닙니다. 속 시원하게 욕이나 실컷 해줄까, 받은 돈 집어던지고 세탁기를 다시 뺏어 올까…… 아니,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겠죠? 품에 망치가 들어 있었으니…… 그래요, 여자가 뒤돌아서자마자 망치를 꺼내 휘둘렀어요. 퍽! 퍽!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세번째는 옆머리를 때렸고, 마지막으로 쓰러진 여자의 이마 한가운데를…… 그러고 여자 지갑에서 만원을 챙겨 나왔습니다. 오, 맙소사,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M이 뱉어낸 말들이 엉겨 붙으며 취조실의 공기는 끈적하게 가라앉았다. 탁자 위에는 날카롭게 조각난 얼음장들이 흩어져 있었다. 형사가 츱, 입맛을 다셨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검은 가죽재킷이 다시 고개를 디밀었다.

“고형사님.”

형사는 끙, 하고 몸을 일으켜 취조실을 나갔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M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반죽을 하듯 천천히 휘저었다. 목구멍에서 가르랑거리는 신음이 비어져나왔다.

 

형사는 삼십분 가까이 지난 후에야 돌아왔다. 그가 문손잡이를 잡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헛기침을 하며 다가와 의자를 빼고 털썩 앉을 때까지, M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실눈으로 M을 응시하는 형사의 안색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좌우로 까딱거렸다. 형사가 탁자 위에 흩어져 있던 증거사진과 서류를 간추려 파일에 집어넣었다.

“그만 가도 좋습니다.”

M은 고개를 들고 멍하니 형사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진범이 잡혔어요.”

“진범……이요?”

“그 동네 변태 또라이의 짓이었어요. 강간미수 전과가 있는 놈인데, 이미 다 자백했습니다. 집에서 피 묻은 망치도 나왔고.”

형사가 츱, 입맛을 다셨다. M은 맞은편의 대형 거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봉두난발의 남자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답니까?”

“왜는, 변태 또라이라니까. 지나가다가 베란다에 여자 속옷 널린 걸 보고 도시가스 파이프를 타고 올라갔대요. 스파이더맨처럼. 빈집인 줄 알았는데 여자가 불쑥 튀어나와 고함을 지르니까……”

형사는 한 손으로 망치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M의 입에서 쓴웃음과 흐느낌을 64로 섞은 듯한 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날, 세탁기를 돌렸군요.”

“그런가보네.”

“늘 이런 식이에요. 하아, 정말이지……” M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맥락이란 게 없어.”

“뭐, 그런 식이지.”

형사는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교대로 움직여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형씨는 대체 왜 그런 거요?”

“예?”

“왜 범인도 아니면서 거짓 자백을 했느냐고. 하지도 않은 짓을.”

M은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인 채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소설을 노려보았다. 부르튼 입술이 ‘거짓, 자백, 거짓, 자백’ 하고 소리 없이 달싹였다.

“내가 고문을 한 것도 아니고, 응?”

“………”

“까딱하면 수십년을 감방에서 썩을지도 모르는 판인데.”

“………”

“허, 큰일 날 사람이네.”

M이 기관지에 낀 거미줄이라도 제거하려는 양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양어깨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머릿속이 잠깐 헝클어졌나봅니다.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가전제품 사용설명서를 읽듯 M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사는 눈을 슴벅이며 쳐다보다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아무튼 미안하게 됐소이다. 이해하쇼. 온갖 인간쓰레기들을 상대하는 게 일이라, 조금이라도 미심쩍다 싶으면 일단 조지고 봐야 돼요.”

“가도 됩니까?”

“그럼요. 바쁘다면서, 얼른 가서 일 봐요.”

M은 주섬주섬 자신의 소설이 인쇄된 이면지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기증이 나는 듯 잠시 탁자를 짚고 서 있다가 문을 향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형씨.”

등 뒤에서 형사가 불렀다. M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거 어디까지가 실제 있었던 일이오?”

M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피살자 윤미나가 정말 2002년의 그 소매치기였소?”

형사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들거렸다. M은 문을 나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 뻥이에요.”

 

뉘엿뉘엿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던 M은 성당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택가로 들어가는 세갈래 골목길을 잠시 바라보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등 뒤에서 하얀 성모상이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M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골목을 계속 꺾어 들어갔다. 양편에 늘어선 낡은 건물들은 모두가 어슷비슷하게 보였다. 담벼락에 주차된 승용차와 전봇대 아래 쌓인 쓰레기봉투와 시멘트를 가르고 나온 잡초까지도. 세탁기를 싣고 온 게 불과 사흘 전이건만 도저히 여자의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골목을 계속 덧대면서 길을 숨기는 것 같았다. 어둠이 건물 외벽을 타고 흘러내려 발밑에 질척하게 쌓여갔다. M은 길바닥에 가래침을 칵 뱉고 멀리 보이는 성당 십자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누가 노려보는 낌새에 M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얼룩 고양이 한마리가 등을 볼록하게 세우고 벽돌담 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대각선으로 뻗은 앞다리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느껴졌다. 메달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길고양이는 아니었다. M은 아기를 어르듯 입으로 쭈쭈, 소리를 내며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가 더욱 납작하게 몸을 웅크리며 수염을 곤두세웠다. 커다랗게 벌어진 두개의 눈동자가 레이저 포인터처럼 M의 미간에 붙박여 움직이지 않았다.

“젤소미나.”

M이 앞으로 한발짝 내딛는 순간, 고양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