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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정인 曺晶仁
1953년 서울 출생. 1998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등이 있음. thewoman7@naver.com
당신의 턱수염
어쩌다가 조심스레 꺼내보는 이름으로 목이 잠긴다 겨울저녁 청색 창문을 가진 자 달그락 돌아눕는 별 하나에 마음이 그어진다
당신을 밀치고 당신을 들추는,
턱수염을 바라보며 뜬금없이 꿈에 젖는 일은 내 밋밋한 턱하고 무슨 상관일까 당신을 바라보는 동공으로 수렵혈거 발간 불빛 번진다 눈이 따듯하면 심장이 데워지고 영혼의 말단까지 온난기류가 흘러든다
목 밑을 타고 오른 검푸른 숲을 바라보며, 불안한 連動으로 난산의 산도를 뚫는 태아처럼 격렬하게 나는 당신에게서 태어나고 싶었다 당신 등 뒤에 대고 무수히 익힌, 입 속 모음과 자음은 어떤 몸을 얻고 있었던 걸까?
그후로 먼 후일
당신의 은빛 겨울산채에 들었다가 만난 자그만 여자애, 나는 얼마나 멀리 나가 있던 것일까? 아이가 늙은 앵무새가 된 제 얼굴을 알아보고 온몸으로 풋콩을 엎지르듯 웃었다 인류 최초의 언어는 웃음의 파문이 아닐까 전신으로 웃을 때 늑골을 만져보라 영혼의 발꿈치가 손끝에 닿는다 심장의 즐거운 펌프는 순간 온몸의 조도를 높인다…… 심장의 破顔이 먼저였다
S역 대합실 어두워오는 유리문 밖, 당신은 심연 같은 거리를 남기고 멀어져갔다 잘 있어! 당신이 알 리 없는, 주먹도끼를 손에 쥔 어린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수염을 사흘만 놔두면 석창을 든 수렵혈거 검은 그림자가 밀물지던, 오래전 아비이며 어미인 당신 따라 타박타박……
눈 내리는 겨울저녁 사람들은 흉곽 근처에서 불에 그슬린 짐승냄새를 맡는다 사람들은 괜한 호주머니를 뒤적이고 길을 나서 신발을 털며 불빛 안쪽으로 들어선다 불빛 너머 불빛 어룽지는 뒷모습은 모두가 당신이다
식사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우아한 풀밭 식사를 하고 온 날 이야기에 낄 적마다 입에서 돌멩이가 덜그럭거렸다 그을음이 새나왔다 아는 척, 뜨거운 푸딩을 삼켰다! 목젖이 부었다
채소가게 여자가 고구마줄기를 벗기다가 발로 밀치고 수저를 든다 저녁치곤 이르다 발부리 바짝 김치사발이 놓였다 저녁 해 거대한 바퀴 따라 위장의 역사가 구른다 시큰한 삽날이 지나간 밥사발에서 구곡간장에 이르는 먼 길 따라 밥덩이 은하처럼 흐른다
절반을 여읜 절반이 검정 고무에 싸여 장바닥을 쓸고 간다 사내가 밀고 가던 좌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문다 돗수 깊은 안경알 속 내려뜬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던가 물 한줌을 움켜쥐듯 라이터 불꽃을 감싸며 담배 한개비의 지독한 위안을 빨아들인다 움푹 패는 두 뺨, 그의 코끝에서 푸른 안개가 떠돌 동안 한세기 저물던가
어둑한 밥그릇에, 능소화빛 나프탈렌 됫박에 하루해 떨어진다 변두리 재래시장 끝자락, 잔등이 능선 그림자가 긴 묵묵부답들 목젖 부을 것도 없는 저녁 해 붉은 푸딩을 삼킨다 동전닢만한 하루가 사라진다 빈 손바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