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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바흐찐의 소설이론과 그 현재적 의미
변현태 卞鉉台
서울대 노문과 교수. 역서로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논문으로 「바흐찐의 소설이론: 루카치와의 비교의 관점에서」, 「바흐찐의 라블레론」 등이 있음. smex36@snu.ac.kr
1. 서론
최근 한국문학에서는 몇몇 논자들이 ‘장편소설 르네쌍스’라고 부르는 장편소설의 활황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단의 평가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장편소설 르네쌍스’가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로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확신하는 낙관론이 있는 반면, 시작이 아니라 실은 ‘끝’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비관론도 있다. 이러한 논의를 보면서 필자가 떠올린 것은 20세기 초반 러시아문학의 상황이다. 다소 거칠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한편에서 ‘소설의 종말’(O. Mandelshtam 1922)이 선언되는 동시에(물론 이 경우 만젤쉬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유럽소설이다), 다른 한편에선 고전적인 리얼리즘 소설의 자기갱생과 이와 다른 미학을 내세우는 모더니즘 소설의 등장으로 나름의 활력을 보여주는 상황.1)
이런 속에서 근대소설에 대한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고 발본적인 사유가 등장했다. 이바노프(V. Ivanov)와 이 글에서 다루는 바흐찐(M. Bakhtin, 1895~1975)이 두 주역이다. 이들은 소설을 하나의 형식으로서 다시 검토의 대상으로 삼고, 그 형식의 재명명을 통해(이바노프의 경우는 ‘소설-비극’, 바흐찐의 경우는 ‘소설-대화’) 소설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색의 구체적인 근거가 다름 아닌, 근대소설의 절정 중 하나인 도스또옙스끼였다는 사실이다. 소설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루카치(G. Lukács)의 『소설의 이론』(1915)을 떠올릴 것이다. 도스또옙스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예비하며 쓰인 이 책도 마찬가지로 소설에 대한 재명명을 시도한다(소설-서사시). 이들이 소설을 재명명하는 방식은 달랐고, 나아가 소설형식을 재형식화하는 이들의 시도가 서로 교차・대립되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들의 작업이 가져다준 가장 큰 성과는 아마도 근대소설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일 것이다.
물론 최근에 장편소설 논의를 야기한 상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해 보인다. 아쉽지만 필자에게는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의 장편소설 논의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면 한결 깊고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렇다면 바흐찐의 소설이론을 경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바흐찐의 소설이론, 이 문제도 간단하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바흐찐의 소설이론이란 좁게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반에 쓰인 일련의 소설장르론 관련 논문을 가리킨다. 60년대 초반 일군의 러시아 문학연구자들이 바흐찐을 재발견한 이후, 이 시기의 글 대부분은 바흐찐 자신이 보유하던 초고들을 손질해서 편집한 『문학과 미학의 문제들: 여러 시기의 논문들』(1975)에 포함되어 출간된다.2) 이러한 사정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러시아와 서구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도 바흐찐의 논저는 늘 시간적으로 전도되어 알려졌고3) 이것이 바흐찐 수용에서 일정정도 왜곡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바흐찐 수용에서의 이 왜곡은 바흐찐의 대표적인 두 저서,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문제들』(1963, 이하 『시학』)과 『프랑수아 라블레의 창작과 중세와 르네쌍스의 민중문화』(1965, 이하 『라블레』)를 중심으로 그의 전체 사유를 자의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4) 소설이론에 국한해 이야기해보면, 『시학』의 ‘다성악적 소설’, 『라블레』의 ‘카니발’이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같은 범주들을 중심으로 이 저작 이후에 출판된 바흐찐의 초기 철학과 미학의 범주들을 재배치하거나 혹은 바흐찐의 초기 사유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그의 소설이론을 구성하려는 시도들이 그렇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바흐찐 수용이 이런 양상을 띠며 한국에서 대표적인 경우가 김욱동(金旭東)일 것이다.5)
비교적 근자에 러시아와 서구에서 바흐찐을 다룬 주요 논문을 다양한 주제로 엮어서 총 4권의 책으로 펴낸 가디너(M. Gardiner)는 편집자 서문에서 바흐찐의 사유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단정한바 있다.6) 가디너가 주도했던 이 작업은 1970~8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흐찐 연구에 대한 일종의 ‘중간결산’의 성격을 갖는데, 가디너의 지적은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바흐찐 전유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착취와 왜곡된 수용의 반대 극단에는 바흐찐의 전체 사유 속에서 소설이론의 입지를 부정하는 방향이 있다. 바흐찐 이론의 세계적인 확산에 기여했던 또도로프(T. Todorov)가 그 선두 격인데, 그에 따르면 바흐찐에게 소설이라는 낱말은 그의 철학(또도로프가 ‘철학적 인간학’이라고 명명한)의 은유일 뿐이며, 바흐찐에게 고유한 의미의 소설이론은 없다. 또도로프식 입장의 다른 면은 소설에 대한 바흐찐의 글을 스딸린 시대에 대한 일종의 게릴라 투쟁, ‘이솝의 언어’로 쓰인 비판으로 독해하는 방식이다.7) 이런 맥락에서라면 바흐찐의 서사시 비판은 스딸린 시대의 ‘독백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카니발의 민중론은 소련 시절의 ‘인민 대중’, 즉 이데올로기에 잘 조련되어 있는 ‘호모 소비에트쿠스’에 대한 비판으로 독해되어버린다.
그러나 바흐찐의 일련의 글 속에는 소설을 바라보는 고유의 관점이 있으며, 이것은 또한 스딸린 비판이나 소비에뜨 시대의 주류 소설이론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근대소설 전체를 바라보는 어떤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그 시야의 현재적 의미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먼저 바흐찐 사유의 진화과정에서 그의 소설론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개념만 따지고 넘어가자. ‘다성악적 소설’이 그것이다. 이 개념은 도스또옙스끼와 관련된 글에만 등장하고 정작 소설이론을 다루는 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이 개념의 대립짝인 ‘독백적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개념의 문제는 ‘다성악’이라는 메타포가 한편으론 모호하며 다른 한편으론 강력한 폭발성을 내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소설사를 양분하는 고골-도스또옙스끼라는 노선과 뚜르게네프-똘스또이라는 노선 중에서 후자를 ‘독백적 소설’로 묶어 배제해버린다는 것이다. 소설장르론을 다루면서는 바흐찐이 뚜르게네프, 똘스또이에 대해 한층 균형 잡힌 입장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지적해두자.
이와 함께, 그의 사유는 언제나 스스로 강조했던 ‘구체적인 시공성’(흐로노또프)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령 바흐찐 초기의 윤리학과 미학은 당시 마르부르크학파로 대표되던 신칸트주의자들의 ‘문화와 삶’이라는 문제설정과 공명하고 있었으며, 도스또옙스끼론은 앞서 언급한 이바노프 등의 독법과, 라블레론은 민속과 고대 및 중세의 웃음을 연구하던 쁘로쁘(V. Propp)나 프레이덴베르크(O. Frejdenberg) 같은 당대 연구자들의 작업과—바흐찐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 대한 바흐찐의 글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문학 백과사전』(1929~39)의 ‘소설’ 항목(1935)을 둘러싼 토론(1934~35)에서 나왔다.
2. 바흐찐 소설이론의 맥락: 소설의 형성과 관련해서8)
이 토론은 『문학 백과사전』의 ‘소설’ 항목에 포함되기로 예정되었던 루카치의 논문 「부르주아 서사시로서의 소설」을 둘러싼 것이었다. ‘소설’ 항목은 이 글과 뽀스뻴로프(G. Pospelov)가 쓴 「소설」로 구성되었는데, 뽀스뻴로프가 쓴 제목 “소설—부르주아사회에서 가장 전형적인 장르인 대서사 형식”이나, 루카치의 글 첫 대목, “비록 고대 동양이나 고대(그리스・로마시대—인용자), 그리고 중세의 문학 여러면에서 소설과 친족적인 작품들이 있지만, 소설 자신의 전형적인 특징들은 오직 부르주아사회에서 획득된다”라는 구절이 보여주듯이, 소설의 근대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었다.9)
소설의 오롯한 근대성을 주장하는 뽀스뻴로프와 루카치에 대해 뻬레베르제프(V. Pereverzev)는 근대소설 형성의 역사적 과정 문제를 거론한다. 우선 그는 고대에도 소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가령 페트로니우스(G. Petronius, A.D. 27~66)의 『싸티리콘』이나 아풀레이우스(L. Apuleius, B.C. 124~170)의 『황금 당나귀』, 그리고 『다프니스와 클로에』(B.C. 2세기경) 같은 ‘고대소설’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소설을 바라보는 뻬레베르제프 자신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일 텐데, 그가 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그 관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요컨대 소설의 핵심을 서사(narrative)와 서술(narration), 즉 시나 극과는 다른 산문의 언어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바로 그 언어적 형식을 근대소설과 공유하는 고대소설 혹은 중세소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소설과 중세소설이 근대소설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덧붙인다.
근대소설의 전사(前史)에 고대소설과 중세소설이라는 서사형식이 있었다는 뻬레베르제프의 루카치 비판에 대한 응전은 루카치의 동료였던 리프쉬츠(M. Lifshic)에 의해 이루어진다. 리프쉬츠는 고대소설이 근대소설과 비슷한—루카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친족적인’—성격을 갖고 있지만, 근대적인 계급갈등 혹은 사회와 개인의 갈등을 형상화하는 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리프쉬츠에 따르면 고대소설은 자신의 언어적 형식으로 근대소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근대소설에 이야기의 재료를 제공한 것일 뿐이다. 더 나아가 리프쉬츠는 근대소설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언어적 형식에서 근대소설과 유사한 고대의 산문이나 중세의 산문이 아니라, 오히려 16~17세기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다루는 극이라고 주장한다.
리프쉬츠의 견해를 이런 식으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첫째, 서사와 서술이라는 언어적 형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설형식의 고유함이 있다. 둘째, 이 소설형식의 고유함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모순의 형상화와 관련된다. 셋째, 이 근대적 모순의 형상화야말로 소설형식의 근거가 되는 ‘소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이 ‘소설적인 것’의 형성은 언어적 형식에서 유사한 고대나 중세의 산문/‘소설’이 아니라, 16~17세기 극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근대소설의 전사는 ‘비(非)소설적’ 장르인 극에서 발견된다.10)
바흐찐의 소설론은 소설의 오롯한 근대성에 입각한 루카치나 리프쉬츠의 그것과도, 서사와 서술이라는 산문형식에 입각한 뻬레베르제프의 그것과도 다른, 제3의 입지에서 소설을 사유한다. 바흐찐의 입장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흐찐은 리프쉬츠나 루카치와 마찬가지로 근대성이야말로 근대소설의 핵심이라고 판단한다. 소설장르론을 다루는 그의 글 속에서 “고대의 토양 위에서 소설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가능성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화되었다”라는 주장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11) 둘째, 소설의 근대성에 대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리프쉬츠나 루카치와 마찬가지로 ‘소설적인 것’을 설정한다. 셋째, 이 ‘소설적인 것’은 ‘개인과 계급의 갈등’ 혹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바흐찐은 이것을, 리프쉬츠나 루카치와 달리 16~17세기의 극이나 셰익스피어의 극이 아니라 고대와 중세의 문학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주로 뻬레베르제프가 언급한 『싸티리콘』이나 『황금 당나귀』 혹은 『다프니스와 클로에』 같은 작품이다. 넷째, 바흐찐의 ‘소설적인 것’은 뻬레베르제프의 서사와 서술로서의 소설이라는 언어적 형식과도 다르다. 예컨대 바흐찐은 그리스・로마시대의 비극 3부작에 이어지는 ‘싸티로스 극’이나 중세말 이딸리아의 ‘꼼메디아 델 아르떼’(Commedia dell’ Arte) 같은 극장르에서 ‘소설적인 것’을 발견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런 부류가 더 ‘소설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흐찐의 이러한 제3의 입지는 소설과 현실의 매개항이자 ‘소설적인 것’으로 ‘소설적 말’을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12) 그렇다면 바흐찐이 말하는 ‘소설적 말’을 물어야 할 것인데, 1940년에 쓰인 「소설적 말의 전사(前史)로부터」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사로부터’라는 어구에서 드러나듯이 바흐찐은 먼저 소설의 근대성을 상정하고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려 한다.
위 글에서 바흐찐은—소설의 문체론과 관련해서 여러번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한데—단일한 문체를 대상으로 하는 문체론으로는 소설의 문체를 분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다문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최초의 근대소설로 간주되는 뿌슈낀(A. Pushkin)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타나는 ‘언어의 형상들’을 분석한다. 바흐찐이 ‘언어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작품에서 인물들의 언어가 대상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형상화하면서 형상화되는 말, 바흐찐에 따르면 이 이중성이야말로 소설의 기초를 이룬다. 『예브게니 오네긴』에 등장하는 다양한 유형의 언어(대표적으로는 주인공들의 언어)를 분석하고 난 후 바흐찐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소설의 언어는 교차하는 평면들의 체계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어떤 말도, 가령 서정시나 서사시에서 그러하듯이 무조건적인 의미에서 직접적인 뿌슈낀의 말이 아니다. 따라서 소설에는 통일적인 언어나 문체가 없다. 동시에 소설의 언어적(말적-이데올로기적) 중심이 존재한다. 작가는 평면들이 교차하는, 조직된 중심에 위치한다.”13)
과연 일반적인 의미의 문체론으로 소설의 문체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소설의 문체가 다양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문체론의 직접적인 대상, 즉 ‘작가의 말’이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흐찐은 부분적으로 반영론을 의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벨린스끼(V. Belinskii)는 뿌슈낀의 소설을 ‘러시아 삶의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백과사전은 말 없는 사물과 세태의 백과사전이 아니다. 여기서 러시아적 삶은 자신의 온갖 목소리로, 시대의 온갖 언어들과 문체들로 말한다. (…) 뿌슈낀의 소설, 이는 그 근본적인 경향들, 장르적·세태적인 변종들의 상호관계라는 길을 통해 실현된, 그 시대 문학어(literaturnyj jazyk, literary language)에 대한 자기비판이다.”14)
‘그 시대 문학어에 대한 자기비판’으로서 소설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소설에 대한 바흐찐의 기본적인 상을 대략이나마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바흐찐의 이러한 소설관이 현실을 언어로 대체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소설과 현실 사이에 ‘소설적 말’이라는 매개항을 설정한 것은 바흐찐의 기여인 동시에 한계일 수 있는데, 적어도 바흐찐이 세계와 그에 대한 말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세계에 대한 말로 완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며,15) 서사시나 비극과 달리 소설적 말은 이 제한성을 뚜렷하고 의식하고 있는, 이를테면 ‘비판적 성격’을 갖고 있다. 바흐찐에 따르면 서사시나 비극을 특징짓는 것은 스스로가 형상화 대상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간주하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이고 진지한 말’이다. 이에 대립되는 소설적 말은, 바로 그 진지함이 일면적이고 따라서 제한적이라는 사실, 대상에는 ‘직접적이고 진지한 말’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말의 제한성에 대한 이 비판적 인식은 이러한 ‘직접적이고 진지한 말’을 향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향한다. 바로 이러한 자기비판적인 소설적 말에서 “말의 진정한 리얼리즘적 형식들의 창조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언어와 현실의 거리가 창조”된다고16) 바흐찐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다문체적인 소설적 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바흐찐은 여러 복합적인 과정이 있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두 요소, 즉 ‘웃음’과 ‘다언어’(多言語, mnogojazychie)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웃음은 (…) 언어의 형상화의 오래된 형식들이었다. 다언어와 그와 연관되어 있는 언어들의 상호조명은 이 형식들을 예술적-이데올로기적 차원으로 옮겼으며, 바로 그 차원에서 소설장르가 가능해졌다.”17) 소설의 가능성은 바로 이 ‘다언어’라는 조건하에서 소설로 전화될 수 있는 현실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음이 ‘언어의 형상화의 오래된 형식들’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서 바흐찐이 염두에 두는 것은 패러디나 트라베스티(travesty, 익살시) 같은 장르들인데, 바흐찐은 이러한 장르들이 대상 자체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특정한 태도, 즉 진지함을 향한다고 말한다(웃음의 반대말은 ‘진지함’이다). 요컨대 웃음은 대상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바로 그런 태도 자체의 문체를 빌려서 형상화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흐찐은 웃음을 언어 내부적인 이질발화(異質發話, raznorechie)와 연관시킨다.
바흐찐의 소설론에서 ‘대화’나 ‘대화적’이라는 표현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질발화’와 ‘다언어’ 같은 용어인데, 이들이 항상 일관되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질발화가 말 그대로 한 언어의 다양하고도 차별적인 쓰임새(러시아어 razno는 다양함을 뜻하기도, 차별적임을 뜻하기도 한다)를 지칭한다면(그래서 바흐찐은 간혹 ‘언어 내의 이질발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언어’는 말 그대로 다수의 ‘언어들’의 공존과 투쟁을 뜻한다. 여기서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개별 민족어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민족어 내에서의 분화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가령 『예브게니 오네긴』은 바로 이 분화된 ‘언어들’의 형상 위에 구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가능성들(내적인 이질발화에 근거하는)이 근대에 와서 개화되었다는, 그리고 이 개화에 다언어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바흐찐의 주장을, 유럽에서 소설이 라틴어라는 중세 보편어가 개별 민족어(‘속어’)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통념과 비교해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실제로 바흐찐은 라블레의 소설이 등장하는 과정이 최소한 네가지 언어, 즉 당시에 사용되던 라틴어, 르네쌍스가 부활시키고자 했던 고전 라틴어, 프랑스어,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이딸리아어 등, 말 그대로 ‘다언어’가 상호조명하는 상황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언어들의 투쟁을 거쳐 단일한 근대 프랑스 문학어/표준어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학어에 대한 자기비판’으로서의 소설이라는 규정이 의미심장하다. 바흐찐에 따르면 “주요한 시적 장르들이 언어/이념적 삶의 통일적이고 집중적이며 구심적인 힘들의 영향하에서 발전하고 있을 때, 소설과 소설 지향적인 예술 산문은 탈중심화를 도모하는 원심적 힘들 속에서 형성되고 있었다.”18) 요컨대 라블레의 소설은 단일한 근대 프랑스 문학어/표준어 형성과정에 저항하며 등장했다. 이러한 논리는 문학어/표준어에 대한 바흐찐의 독특한 관점과 관련된다. 바흐찐은 문학어/표준어의 규범성이나 체계성보다 그 형성과정에서 다양한 언어들의 투쟁과 상호갈등을 강조한다. 그리고 소설적 말은 바로 문학어/표준어에 각인되어 있는 이러한 투쟁과 상호갈등의 흔적을 생생하게 만들며 그런 맥락에서 문학어/표준어에 대한 자기비판이 된다.
바흐찐의 논의를 소설과 신문이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기여한다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나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그것과 비교해보자.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소설과 신문이 갖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성’과 활자어(print-languages)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모든 시간대를 동질한 시간대로 느끼게 만드는 소설과 소수의 활자어들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통합적 성격이 독자로 하여금 민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로 편입되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한다.19) 카라따니 또한 소설이 “‘공감’의 공동체, 즉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의 기반”이 된다고 지적하면서 “소설이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을 형성”한다고 본다.20)
소설의 활자성이나 단일한 민족 문학어/표준어 형성과정에서 소설이 기여한 바 같은 문제를 여기서 자세하게 살펴보기는 어렵다. 다만 소설의 ‘탈중심화 경향’을 언급할 때 바흐찐이 강조하는 것은, 소설이 이질적인 감각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러한 단일화과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사실, 심지어 소설이 언어의 중심화(가령 문학어/표준어의 형성)에 기여하는 경우조차 언어들의 상호투쟁을 기억하고 반영함으로써 ‘자기비판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괴테가 하나의 현상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법을 설명한 바흐찐의 묘사에서 잘 나타나는데, 근대소설의 다시간성에 대한 바흐찐의 강조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질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흐찐이 자주 사용하는 ‘목소리들의 공존’이나 ‘시간대들의 공존’ 같은 표현에서 우리가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시끄럽고 치열한 상호투쟁의 이미지다. 이 공존은 유사성으로 귀결되는 화합이 아니라 차이를 드러내는 분열이기 쉽다. 더 나아가 그가 소설과 시간의 관계를 다룰 때 늘 ‘현재의 미완결성’, 곧 ‘~이 되어가고 있는 중의 현재’를 언급하며, 바로 이 ‘현재의 미완결성’에서 진정한 미래의 가치가 열린다고 강조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질발화, 다언어, 다시간성 같은 바흐찐 소설론의 주제들은 모두 하나의 범주, 즉 ‘대화’로 귀결될 것이다.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3. 삶과 대화: ‘삶의 형식’으로서의 소설
주지하듯이 바흐찐에게서 대화 범주가 등장하는 것은 1929년의 『창작』에서다. 대화란 일차적으로 작가와 주인공 사이의 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흐찐에게서 대화란 작가와 주인공이라는 상이한 위치를 전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바흐찐 사유에는 일련의 전사가 있는데, 「예술과 책임」(1919)에서 출발해서 「행동철학」, 그리고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이하 「작가와 주인공」)에 이르는 사유의 전화(윤리학에서 미학으로의)가 그것이다.21)
바흐찐의 출발점은 문화와 삶의 분리라는 현대의 위기다(그는 이를 ‘행동의 위기’라고 정식화한다). 근대에 이르러 문화의 각 부문(무엇보다 진・선・미로 대표되는 학문・윤리・예술)이 자율적인 영역을 구성했으며(예컨대 예술의 자율성 테제), 그 자율성으로 인해 오히려 삶과 유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술의 시적 성격과 삶의 산문적 성격의 대립이 그렇다. 바흐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예술 속에 있을 때 그는 삶 속에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22) 「예술과 책임」에서 『라블레』를 거쳐 60~70년대의 단편적인 논문들에 이르는 바흐찐의 전체 사유는 이러한 분리된 삶과 문화의 통일에 대한 모색으로 귀결되는데, 여기서 바흐찐은 언제나 삶의 편에 발딛고 예술의 자율성 너머에서 예술과 삶의 통일을 사유하고자 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바흐찐 미학은 예술의 자율성 테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의 하나가 된다.
「행동철학」에서 바흐찐은 문화에는 통일성 혹은 단일성이라는 특징을, 삶에는 유일성이라는 범주를 각각 부여하면서 문화와 삶의 분리를 사고한다. 문화는 그 속을 살아가는 주체들을 묶는다는 점에서 통일적이며, 그 묶음이 하나의 표지(標識)를 주체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일하다. 문화에 범주적으로 대립되는 개인은 그것이 다름아닌 ‘바로 나’라는 점에서 유일하고 반복 불가능하다. 개인의 유일성과 반복 불가능성에 입각해서 문화와 삶의 통일을 모색하는 아슬아슬한 사유의 줄타기를 보여준 끝에, 바흐찐은 이러한 통일이 이론 혹은 철학의 차원에서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기실 「행동철학」은 바흐찐의 글 중에서도 가장 반(反)이론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개인에 대한 모든 이론적·철학적 사유가 개인의 유일성을 문화의 통일성 속으로 끌어와 해체해버리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흐찐은 윤리학에서 미학으로 전향한다(「작가와 주인공」). 예술영역과 삶의 유사성이 그 근거인데, 여기서 작가는 문화를, 주인공은 삶을 각각 대표한다. 여기에 문화의 통일성에는 ‘종결성’이라는 범주가, 삶의 유일성에는 ‘비종결성’이라는 범주가 덧붙여진다. 일단 삶은 종결 불가능한 것이다. 과연 그럴 듯도 하다. 삶이란 무엇보다도 종결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기 위해서는 종결되어 있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23)
작가는 종결되지 않는 주인공의 삶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즉 삶에 처음과 끝을 부여함으로써, 하나의 ‘전체’(celoe)로서 종결짓는다.24) 이후 바흐찐은 전기, 자서전, 소설 등을 통해서 이러한 종결성이 실현되는 형태들을 확증하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모든 형태들 속에서 종결짓고 형식화하려는 작가의 시도에 저항하는 삶의 형식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바흐찐 자신의 은유를 빌리자면, 존재와 삶에는 ‘개구멍’이 있어서 작가가 주인공의 삶을 형식화하는 순간 주인공은 그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버린다. 이후 그는 소설을 검토하는 자리에서 이 상황을 ‘인간성의 잉여’라고 정식화한다. 이 정식화는 ‘개인의 형상화’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한데, “소설의 근본적인 내적 주제 중 하나는 주인공이 그의 운명과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운명보다 위대하거나 그의 인간성보다 왜소하다. (…) 미완결된 현재, 따라서 미래와의 접촉영역 자체가 그러한 인간의 자신과의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인간 속에는 언제나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 실현되지 않은 요구가 남아 있다.”25)
이 ‘인간성의 잉여’를 문화의 단일성에 대립하고 저항하는 삶/개인의 ‘복수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요컨대 삶/개인에게는 단일화하고 통합하고자 하는 문화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개구멍’이 늘 있는 것이며, 이 ‘개구멍’은 개인의 유일성을, 실은 그 ‘개구멍’을 빠져나가 스스로를 ‘다른 나’로 정립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 즉 복수성으로 전화할 수 있게 해준다.
바흐찐의 ‘인간성의 잉여’라는 테제는 도스또옙스끼의 저 유명한 ‘인간 속의 인간(들)’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데,26) 이 점에서 바흐찐의 미학이 도스또옙스끼 작품론으로 옮겨가는 것은 필연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스또옙스끼 작품론을 다루는 『창작』에서 대화 개념이 도입되었다. 전기, 자서전, 소설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작가/문화의 통일성/단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주인공/삶의 유일성/복수성을 확인한 이후, 이 유일성/복수성을 그 자체로 보존하면서 형식화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한 모색이 주인공과 작가의 대화적 관계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란 무엇보다 삶의 원칙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흐찐에 따르면, 존재한다는 것은 곧 대화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 테제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으로서 바흐찐 미학이 드러나는 대목도 바로 이 지점인데,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원칙인 대화는, 다름아닌 소설이라는 기존의 예술형식을 삶의 형식으로써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바흐찐에게서 도스또옙스끼의 작품세계는 대화를 그 속성으로 하는 존재와 삶 그 자체의 세계이며, 도스또옙스끼의 다성적 소설이란 삶 그 자체가 가진 다성성의 예술적 복원인 것이다.
도스또옙스끼론에서 소설이론으로의 전화는 이러한 예술적 원칙을 삶의 원칙으로 대체하는 것이 도스또옙스끼 소설뿐 아니라 소설장르 일반의 특징일 수 있다는 발견에 근거한다. 소설이 갖는 반(反)규범성, 소설형식의 ‘비종결성’에 대한 바흐찐의 언급은, 소설이란 실은 ‘삶의 형식’에 대한 존재론적 혹은 육체적인 ‘재현’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삶이 비종결적이듯, 그 삶을 육체적으로 재현하는 소설도 비종결적이다).
바흐찐의 이러한 소설이론을 당대 소비에트의 소설이론에 나타나는 일련의 규범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가령 소비에트의 소설이론은 ‘리얼리즘’이라는 방법으로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상’을 제시하라는 ‘규범’을 제시했다. 물론 그것이 정말 ‘리얼리즘’이고, 정말 ‘총체적인 상’이었는지를 의심해볼 근거는 충분하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규범으로 제시되는 한 바흐찐의 대답은 단호한 부정이 될 것이다. 바흐찐의 소설이론이 스딸린주의 소설이론에 대한, 그 서사시적 총체성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흐찐의 대안이 기존의 규범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소설미학을 내세우는 미학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바흐찐에게서 기존의 소설규범에 대한 비판의 유일한 근거는 삶/현실과의 유관성이기 때문이다. 바흐찐에게서 소설이 만들어내는 어떤 이질적인 감각은 새로운 미학 자체가 아니라 삶으로부터의 구체적인 감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삶의 구체적인 감각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영감에 근거해 ‘이질적인 감각’을 주장하는 것은, 바흐찐에 따르면, “홀림”, 즉 ‘귀신들림’일 뿐이다.27)
4. 맺음말
현재 우리의 장편소설 논의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발본적인 고민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흐찐의 소설론을 빌려, 근대소설이 이를테면 허구적인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국민국가의 문법에서 일탈하는 것이며, 이 일탈이 예술의 자율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삶-되기’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바흐찐의 소설‘이론’이 함의하는 바는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앞서 바흐찐의 소설이론이 실은 바흐찐 철학의 메타포일 뿐이며 따라서 체계적으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이라는 또도로프의 주장을 언급한 바 있는데, 또도로프와 다른 의미에서 바흐찐의 소설이론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는 삶을 재현하면서, 소설은 자신에 대한 이론화로부터 언제나 일탈한다. 그러나 바흐찐의 사유가 보여주듯이 이것이 소설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이 불가능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무언가를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불가능한 무언가를 포착하고자 했던 바흐찐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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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고에서 ‘소설’은 다른 맥락이 없는 한 ‘근대 장편소설’을 가리킨다.
2) M. Bakhtin, Voprosy literatury i estetiki: issledovanija raznykh let, khudozhestvennaja literatura 1975. 이 논문집의 수록문 중 소설과 관련한 글들만 따로 모아 영역한 책이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 Ed. M. Holquist, Tr. C. Emerson and M. Holquist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1)이고 이 책 중 「소설적 말의 전사로부터」(1940)를 제외한 세편의 글을 국역한 것이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전승희 외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8)이다. ‘대부분’이라고 한 것은 소설장르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바흐찐의 또다른 글, 「교양소설과 리얼리즘의 역사에서 그 의의」(1936~38)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편집·출간한 Estetika slovesnovo tvorchestva (Iskusstvo 1979)에 포함되기 때문이다(원제를 직역하면 ‘언어창조의 미학’이며, 국역본은 『말의 미학』, 김희숙 외 옮김, 길 2006). 본고에서 러시아어 텍스트들에서의 인용은 국역본에 근거하되 필요할 경우 원문과 대조해 수정했다.
3) 윤리학을 다루고 있는 바흐찐의 초기 저작 「행동철학에 대하여」(1921, 이하 「행동철학」)는 모든 곳에서 가장 늦게 출간되었다.
4) 『시학』은 1929년 출간된 『도스또옙스끼 창작의 문제들』(이하 『창작』)의, 『라블레』는 1946년 제출된 학위논문 「리얼리즘의 역사에서의 라블레」의 개작이다.
5) 김욱동 『대화적 상상력: 바흐찐의 문학이론』, 문학과지성사 1988.
6) M. Bakhtin, Vol 1. Ed. M. Gardiner, SAGE P 2003, IX~XXX면.
7) 소설장르론에 대한 바흐찐의 글을 이런 식으로 읽는 독법은 다분히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것인데, 국내의 경우, 이득재의 「바흐찐의 소설이론」(『바흐찐 읽기』, 문화과학사 2003, 237~52면)이 그렇다. 이득재의 바흐찐 ‘읽기’ 전체는 오히려 그 반대 방향, 이를테면 ‘좌파적 읽기’이다. 난맥상의 바흐찐 수용에서 바흐찐을 제대로 읽는 일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8) 이하의 서술은 졸고 「17세기 러시아 산문과 소설의 발생」,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17집, 2004, 121~23면 부분을 보완·발전시킨 것이다.
9) Literaturnaja enciklopedija, Kom. Akad. 1929-39 중 9권, 1935, 773, 795면. 뽀스뻴로프와 루카치가 쓴 이 항목들을 묶어 번역한 책으로 『소설의 본질과 역사』 (신승연 옮김, 예문 1988)를 참조. 이 국역본은 루카치의 항목을 둘러싼 토론을 포함하고 있다.
10) 뻬레베르제프의 비판에 대한 루카치의 직접적인 반론은 『역사소설론』(1937, 이영욱 옮김, 거름 1987)에서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루카치는 다시 한번 소설의 오롯한 근대성을 주장하면서, 그리스의 ‘소설’이나 페르시아의 ‘소설’을 ‘부르주아 서사시’라고 하는 독특한 근대의 소설형식과 동일하다고 하는 주장이 속류 사회학의 매우 조야한 비역사주의의 결과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와 함께 리프쉬츠와 마찬가지로, 소설의 형성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고대소설이나 중세소설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극이라고 주장한다.
11)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61면.
12) 여기서 ‘소설적 말’이라는 표현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바흐찐은 가령 ‘소설의 언어’라는 표현보다 ‘소설적 말(slovo)’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바흐찐의 사유 자체가 구체적인 삶과의 결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본고의 3절 참조). 러시아어 slovo는 때로 ‘담론’(discourse) 같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옮겨지기도 하는데, 번역의 난점을 고려하더라도, 바흐찐 자신이라면 이러한 번역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13) M. Bakhtin, Voprosy literatury i estetiki: issledovanija raznykh let, 415~16면.
14) 같은 책 416면.
15) 같은 책 413면.
16) 같은 책 425면.
17) 같은 책 417~18면. 강조는 바흐찐.
18)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79면.
19)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윤형숙 옮김, 나남출판 2005, 45~75면 참조.
20) 카라따니 코오진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 51면.
21) 더 자세하게는 졸고 「바흐찐 읽기(I)」, 『크리티카』, 이가서 2005, 217~53면 참조.
22) 『말의 미학』 26면.
23) 같은 책 38면.
24) 이 ‘전체’에 대한 바흐찐의 강조가, ‘다양성’ ‘개별성’ ‘복수성’을 일면적으로 주장하면서 ‘이질적인 감각’을 내세우는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는 「바흐찐 읽기(I)」, 236~39면 참조.
25)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57~58면.
26) 도스또옙스끼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기로 하자. “완전한 리얼리즘 속에서 인간 속의 인간을 발견하는 것. (…)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른다. 틀린 말이다. 나는 한층 높은 의미에서 리얼리스트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묘사한다.” F. M. Dostoevsky, Poln. sobr. soch. T. 27. Nauka 1984, 65면. 바흐찐의 ‘말 속의 말’이라는 표현은 ‘인간 속의 인간’이라는 도스또옙스끼의 말의 변형이다.
27) 『말의 미학』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