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임형택 『한문서사의 영토』(전2권), 태학사 2012
한문서사의 영토 확장과 ‘이야기’의 진실
심경호 沈慶昊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sim1223@korea.ac.kr
임형택(林熒澤)의 『한문서사의 영토』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 정재륜(鄭載崙)의 『한거만록(閑居漫錄)』, 이현기(李玄綺)의 『기리총화(綺里叢話)』 등 야담필기류(野談筆記類)는 물론, 사대부 문인의 문집에 실린 이야기 115편을 시대별・작가별로 정리하고 각각에 대해 평설을 붙였다. 임형택이 1970년대 이우성(李佑成)과 공동으로 펴낸 『이조한문단편집』의 후속편이다.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에 살다가 원나라가 몰락하자 고려로 귀환한 조반의 이야기를 담은 「조반의 애희」부터 20세기 무명씨의 「정다산전 외사」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광범한 작품을 다룰 뿐 아니라, 이야기의 주제나 형식 등을 기준으로 의도적인 분류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수록 작품의 취재 방식도 다양하다. 성현의 「관동만유」는 서사자의 유람 체험을 적은 글이고, 「신수스님」 「안생」 「사제동」은 성현이 서사자로서 이야기를 정착시킨 경우이다. 「오세」와 「소 뒤에 꼴 놓기」는 각각 남효온(南孝溫)과 김안로(金安老)가 엮은 수필집에서 김시습(金時習)과 관련한 이야기를 추출한 경우이다. 이렇듯 이 책은 삶의 애환과 역사의 설명을 담은 이야기를 모두 포괄하고 기록과 허구를 넘나들어 한문서사의 드넓은 영역을 여실히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흔히 소설은 부르주아의 장르로서, 부르주아의 소멸과 더불어 종말을 고하게 되리라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가 『백년 동안의 고독』(1982)에서 ‘마술적 사실주의’를 선보이며, 서양세계와 단절된 가상공간 ‘마꼰도’를 창조했다. 그보다 앞서 1950년대 중국에서는 근대소설의 기원과는 다른 소설장르의 다양한 발전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내고 연구했다. 필기, 소화(小話), 우언(寓言), 단편의 발굴이 그 무렵에 이루어졌다. 한편 이우성・임형택은 1970대에 조선시대의‘한문단편’을 서사 갈래의 하나로서 부각시켰다.
『한문서사의 영토』는 한문서사물의 선정 방식과 평설 내용을 통해 서사 갈래의 한가지인 ‘이야기’가 생성되고 소비된 영토가 실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곳은 고독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 공간에는 한정된 청자와 독자가 있지만, 청자와 독자의 네트워크는 최초의 이야기 구연자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확장되곤 했다. 곧 조선시대의 이야기는 대개 다음과 같은 양태로 생성돼 소비되었다. 1) 사랑방에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구연된 이야기 2) 인물의 행적이나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한다고 표방하며 구연된 일화 3) 가승(家乘)・행장(行狀)・내의(內儀, 집안 여성의 일생)를 서술할 때 자료가 되는 집안사람의 일화 4) 역사서와 외사(外史) 및 당론서(黨論書)를 토대로 하면서 부연되는 실화류의 역사물 5) 책 읽어주는 사람의 낭독 대본 등이다.
기존의 서사 연구에서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했다. 물론 거리에서는 강담사(講談師)가 이야기책을 읽고 돈을 받았으며, 영조와 같은 국왕의 곁에서는 젊은 문신들이 책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성책본(成冊本)을 읽어준다는 전문성 때문에 서사 영토 안에서는 매우 한정된 역할을 수행했다. 『한문서사의 영토』는 전문 이야기꾼의 대본을 모은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했으나 현대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아온 위의 1,2번 이야기들이 한문서사물로 정착한 사실을 부각시킨 것이다.
현대의 스토리텔링을 보면 청자(독자, 시청자)의 투고를 기초로 가공된 이야기, 실화라고 선언하면서 고증의 흥미를 덧붙인 ‘서프라이즈’식 이야기, 개인의 일화인 듯 가장하면서 흥미의 관점에서 가공된 ‘예능’식 이야기, 오컬트(occult)의 요소를 중시하여 조작되거나 창작된 기담(도시괴담 포함) 등 다양한 형식이 있다. 한문서사의 독본은 이러한 현대의 스토리텔링과는 다른 듯하지만, 그 생성의 과정은 상당히 유사한 면도 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기담은 사랑방에서 구연된 일이 많았다. 이용휴(李用休)가 이단전(李亶佃)의 문집에 쓴 「제하사고(題霞思稿)」는 두개의 기담을 병치해서 이단전의 시문이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한 면이 있음을 암시했다. 이용휴는 좌객으로 하여금 평소 보고 들은 기이한 이야기를 하도록 시키고 들었다고 한다. 그때 한 좌객이 말했다. “아무 해 겨울이 봄같이 따뜻했는데, 홀연 바람이 일고 눈이 내리더니만, 밤이 되어 눈이 그치고 무지개가 우물에서 물을 마시더랍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놀라서 일어나 떠들어댔답니다.” 또 한 좌객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어떤 행각승이 말하길 ‘언젠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한 괴수를 만났는데, 호랑이 몸뚱이에 푸른 털이 나있고, 뿔이 있으면서 육질의 날개가 달렸으며, 소리는 갓난애 같았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짧게 적록(摘錄)되어 있지만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사랑방에서 일상의 상식을 벗어난 기담이 구연되었으리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생성된 이야기 중에서 한문서사 독본으로 정착한 것은 서사 정착자와 예상 독자의 계층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제의 제약을 받았다. 이야기의 소재, 서사주체의 언행, 이야기의 구성은 방향성을 지녔으며, 이야기 끝에 교훈성 농후한 해설이 덧붙었다. 이때 현대의 이야기 해석자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하는 양 극점 사이에서 유동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자에 가까울수록 이야기의 진면목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한문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배적 관습과 선험적 윤리에 침윤되어 발랄한 형태와 유의적 요소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문서사의 영토』는 한문서사물의 소재, 구성, 해설을 그대로 진술하지 않고 현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평설을 새로 붙였다. 곧 서사 관습에 대한 비판과 열린 해설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지닌 본래의 얼굴을 찾아주고자 노력했다.
임형택은 한문단편을 고를 때 문학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시대의 실상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지, 현대 독자가 재밌게 읽을 수 있는지 고려했다고 술회한다.‘시대의 실상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것은 반영(재현)의 진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문학의 진실성은 반영의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문문학은 기록의 진실성을 중시하는 관습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김려(金鑢)가 정사(正史)를 보완할 외사에 주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문학에서도 고려 중엽 이후 발달한 필기류는 조정대신 및 국가대사와 관련된 야사를 전하는 성격을 지녔다. 김려는 정사를 보완할 만한 산문기록물을 중시하여, 일기·필기·만록(漫錄)과 시화(詩話), 해동악부(海東樂府, 산문 소서와 운문 본사로 구성)에 이르기까지 신사(信史, 믿을 만한 역사)의 특성을 지닌 것들을 외사로 범주화했다.
그런데 『한문서사의 영토』는 외사로서의 이야기보다도 삶의 현장, 인물의 삶, 현실의 모순을 ‘문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따라서 『한문서사의 영토』의 평설이 선언하는 진실성은 논증될 수 있는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설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탐색할 여러 방향 가운데 한두 방향을 제시했을 따름이다. 좋은 독자라면 새로운 방향을 마저 탐구해나갈 것이다.
영토의 설정은 이해의 대립을 전제로 한다. 문학은 고정된 영토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영토로 침투한다. 근대에 이를수록 그 현상은 심하다. 그렇기에 『한문서사의 영토』는 만록이나 야담뿐 아니라 개인의 단편 기록에서도 그 영토를 찾아냈다. 이야기는 이렇듯 산문의 여러 양식에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서술시(본사시 포함)에도 들어 있다. 앞서 본 이용휴의 「제하사고」는 서발문(序跋文)이다. 서발문은 저술가의 약력, 시문의 제작 및 서적 간행의 경위, 저술에 대한 평가 등을 빠뜨리지 않고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용휴는 두개의 황당한 기담을 배치하고 『하사고』의 저자인 여항시인 이단전의 상상력이 상식을 벗어나 있음을 암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사 영토는 다른 영토와의 배타적 경계를 예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문서사의 영토』가 ‘영토’를 확인한 것은 한문단편이 지닌 반영의 진실성을 재확인하는 하나의 방편이지, 고립된 영토를 상정하거나 배타적 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