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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원식 『문학』, 소화 2012

문학장의 변동을 포착하는 시각

 

 

김흥규 金興圭

고려대 명예교수 gardener@korea.ac.kr

 

 

9920한림대 한림과학원이 장기 연구과제로 추진하는 ‘한국개념사총서’의 한권으로 최원식(崔元植)의 『문학』이 간행되었다. 개념사 연구의 중요성이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런 성찰을 필요로 하는 어휘들 중에서도 ‘문학’만큼 내력이 복잡하고 그 속성과 의미 범위에 대한 이해의 다툼이 장기적으로 얽힌 사례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는 각별히 크다고 하겠다. 더욱이 저자의 학문경력과 비평안이 간직해온 예리함을 익히 아는 입장에서는 이 책의 출현을 반기는 마음이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라는 어휘는 ‘국가, 인권, 사회, 봉건제’ 같은 개념어들에 비해서 그 정의(定義)가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행사하는 권력관계의 작위성이 비상하게 크다. 그 이유는 문학 개념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사회적 행위와 그 산물’을 지칭하면서, 그런 범위에 들어올 수 있는 것과 배제되어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게임의 울타리’가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것은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존중되어야 할 가치에 관해서도 모종의 기준을 함축하거나 후원한다. 부르디외(P. Bourdieu)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누가 문학이라는 장()에 귀속될 만한 정당성을 가지며, 누가 그로부터 퇴출되거나 주변화되어야 하는지를 구획하는 “정의의 투쟁”이 된다.* 그러므로 문학 개념의 변화는 문학장과 그 속에서 추구되는 가치 및 문화권력의 변동에 직결되어 있다. 정의(正義)가 힘이 아니라 정의(定義)가 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의 한국문학에서 일어난 추이는 문학장의 변동과 문학 관념의 변화가 맞물린 역동적 현상으로서, 1980년대까지의 연구가 소략하게 살핀 정도로는 해명할 수 없는 문제성을 내포한다. 이와 관련하여 1990년대 후반에 황종연(黃鍾淵)이 흥미로운 논의를 제출한 이래 김동식(金東植), 권보드래, 김명인(金明仁), 김지영(芝英) 등이 관심 범위를 확대하고 혹은 재배치하면서 문학 개념의 근대적 변화라는 문제는 최근 10여년간 각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그 과정에서 얻어진 성과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웠던 것은 문제의 규모와 복잡성에 비하여 그간의 논의가 불가피하게 국부적, 일면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여러건의 부분적 통찰을 모으면 반드시 더 나은 시야가 보장되는 것만도 아닌 만큼, 이 시기의 문학 개념 변화라는 문제는 좀더 넓은 자료 범위와 체계적 구도에 입각해서 책 한권 정도의 호흡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최원식의 『문학』은 그런 뜻에서 시의적절한 응답이다.

이 책의 본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그중 첫 대목인 「기원론의 이력」에서 한국의 근대적 문학 개념 성립에 관한 최근 10여년간의 논의 동향과 성과를 비판적으로 개관한다. 이어지는 제3장 「문학의 윤회」는 서구적 개념의 내습 이전에 재래적 ‘문학’ 관념이 어떠하였던가를 중국 중심으로 살핀 뒤, ‘literature’라는 서구적 관념이 메이지 시대의 일본과 신해혁명(1911) 이후의 중국에 영향을 미치면서 나타난 변화의 윤곽을 정리한다.

4장 「조선의 신문학론」은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 책의 중심 부분이다. 그 핵심으로 이광수(光洙)의 논설들이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가 이를 다루는 방식은 과거의 논의에 비해 유의할 만한 차이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 시기의 문학관에 대한 논의가 이광수에게 과도하게 기울어져온 점을 비판하고, 동시대의 논자인 안확(安廓)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백일생(白一生), 김기진(基鎭), 신채호(申采浩), 현진건(玄鎭健) 등의 문학론에 대한 조명 또한 걸핏하면 이광수 중심의 단선적 이해로 흘러가던 편향을 바로잡는 의의가 있다.

「문학이란 하오」 같은 중요 문건이 그동안 부실하기 짝이 없는 텍스트에 의거해서 다루어져왔음을 밝혀낸 것은 뜻밖의 소득이라 하겠거니와, 문학 관념의 추이와 관련된 영향의 맥락을 논하는 데서도 『소설신수(小說神髓)』와 이광수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증은 깊이 음미할 만한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소설신수』처럼 춘원도 문학의 교훈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들을 모두 절충론자로 파악했는데, 이것은 쯔보우찌 쇼오요오(坪內逍遙)와 「문학이란 하오」를 문학의 심미적 자율성에 관한 역사적 기념비로 삼고 싶어하는 이들과는 대조적인 방향의 입론이 될 것이다.

이 짤막한 서평에서 더이상의 소개는 줄일 수밖에 없지만, ‘문학’의 개념사에 관한 지난 10여년간의 논의는 최원식의 문학에 의해 하나의 저수지에 다다른 감이 있다. 그의 필치에 의한 종합에 일부 이견이 제기될 가능성은 있다 해도, 전체적 구도는 크게 달라지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면 이것으로 한국의 근대적 문학 개념에 대한 성찰은 대체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 중에서 핵심되는 것으로 다음 사항을 언급해두고 싶은데, 최원식의 『문학』은 이런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좀더 뚜렷하게 하는 전환기적 매듭으로서의 의의도 가질 듯하다.

신문학 초창기부터 최근까지 동아시아 및 한국의 새로운 문학 개념 형성을 논한 이들은 그 영향원이 된 서구의 ‘근대적 문학 관념’이라는 것이 단일한 실체인 것처럼 전제해왔는데, 다시금 살펴보면 이것은 극히 의문스러운 가정이다. 가령 영문학의 경우 18세기 중엽부터 1920년까지 약 170년간의 자료를 조사해보면 소설, 희곡, 시 등의 심미적・상상적 장르 위주로 문학을 규정하고, 역사, 전기, 설교, 웅변, 정치논설, 철학적 담론 등을 배제하거나 주변화하는 문학관은 이 시기의 주류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우리는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서구(특히 영어권)의 문학 관념이 19, 20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심미적 자율성’의 넉넉한 강물 위를 운행한 유람선처럼 안정적인 실체였던가를 다시금 따져보아야 한다. 20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의 동아시아 문학장이 재편성되는 데 유력한 논거로 작용했던 그 믿음에 혹시라도 당사자들의 열망과 공모한 가상이 개입하지는 않았던가 하는 검증이 향후의 과제로서 기대되는 바가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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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Bourdieu, The Rules of Art: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Literary Field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2), 223~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