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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 나남 2012

존엄하게 살아갈 자유

 

 

장은주 張殷周

영산대 법대 교수 ejchang@ysu.ac.kr

 

 

10456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굳이 ‘자유민주주의’라고 우기면서까지 자유를 강조하는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도대체 이들에게 자유는 어떤 가치일까? 이들이 말하는 자유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유일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가령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을 무슨 정치적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아이자이어 벌린(Isaiah Berlin)에 의해 ‘소극적 자유’라고 규정된 그런 가치마저 추구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 자유주의를 상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의 자유민주주의는 그저 경제적 차원에서 사유재산권을 신성화하고 시장에서의 제약받지 않는 활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만 자유라는 가치와 억지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기괴한 자유민주주의에서나 통상적인 자유주의에서나 자유는 ‘불간섭’과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상식도 그렇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아무런 간섭이나 장애 없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곧 자유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의 바람직스러움은 거의 직관적으로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불간섭 자유의 체제는 지난 연말 대선 결과가 확인되자마자 ‘가진 자들의 횡포’에 넌더리치며 삶의 끈을 놓아버린 어느 노동자 같은 이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도 그런 불간섭 자유는,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웬만큼은 누렸을 것이다. 그래서 노조활동 같은 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또한 기업주가 별다른 법적 제약 없이 마음대로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가? 이런 자유의 체제에서는 약자인 노동자들의 불리한 처지는 동료 시민이나 국가가 눈 감는 게 온당하다고 여겨지고 노조의 파업이나 투쟁은 사유재산이나 고용주의 경영권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뜻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라도 간신히 채우려면 그저 고용주가 자비를 베풀어 고용을 지속시켜주고 더 많은 임금을 주기를 바라야만 한다고 강요받는다. 윗사람 눈치도 보고 웬만한 횡포는 꾹 참은 채 시키는 대로 일만 해야 혹시라도 그 자비가 발휘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사람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은 심지어 누군가를 자살로 몰고 갈 충분한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취급하며 모욕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체계적으로 허용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무도 쉬이 삶의 의지를 놓으려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래서 한국이 OECD 국가들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너무도 심각한 ‘모욕 사회’임을 방증하는 것일 게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는 아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틀림없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아주 자유로운 사회다. 그러나 이 사회는 많은 이들,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는 모욕이 일상화된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유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모욕 사회가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인 필립 페팃(Philip Pettit)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가 제시할 법한 시각이다. 물론 그는 결코 자유에 대한 지향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추구해서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서구의 정치적 전통에서 자유는 본디 모든 시민이 ‘존엄하게 살아갈 자유’(freedom with honor)를 의미했는데, 서구에서도 그런 자유의 본래적 의미가 점차 잊히긴 했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에 아예 무지한 채 그 규범적 함의가 아주 좁은 불간섭 자유만을, 그것도 아주 불완전하게 추구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그에 따르면 그 본래적 자유 개념은 고대 이래 서구 공화주의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단순히 불간섭이 아니라 ‘비-지배(non-domination)’, 곧 타인의 자의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자유 개념은 벤담 등에 의해 발전된 자유주의적 불간섭 자유 개념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적 평등 이념의 확산에 따라 그 함의가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정치적 주류세력이 두려워해서일 것이란다. 그래서 그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자유 개념과 그 정치적 함의를 오늘날의 조건에서, 말하자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새롭게 발전시켜보자고 제안한다(그래서 이 공화주의를 ‘신로마공화주의’로 부르기도 하며, 역자 곽준혁 교수는 간단히 ‘신공화주의’라고 명명했다).

공화주의는 보통 정치적 참여의 궁극적 가치나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며 ‘공동체주의’나 ‘인민(민중)주의(populism)’ 전통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아리스토텔레스, 한나 아렌트, 마이클 쌘델 등의 이름과 함께).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비-지배 자유의 체계적인 정치적 실현에 초점을 두고 공화주의 전통을 이해할 경우, 그것은 시민의 민주적 심의를 통해 구성되는 공동선에 입각한 법치 및 쟁론 가능성(견제 가능성)의 제도화 같은 새로운 국가 구성의 원칙과 정치적 이상에 대한 추구를 의미한다. 이런 공화주의는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뼈대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혁신하는 데서 존 롤스(John Rawls) 유의 진보적 자유주의보다 더 나은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

실제로 서구의 많은 중도 좌파들은, 자파떼로(Zapatero) 총리 시절의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필두로, 바로 이 방향에서 마르크스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혁신을 모색하고 있다. 대선 패배 후 지독한 혼란에 빠져 있는 우리 민주진보진영도 80년대식 낡은 이념에 더이상 집착하지 말고 이같은 방향의 모색에 동참해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우리의 고유한 민주적 전통과 맥락을 함께 충분히 잘 헤아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