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이익섭 외 『한국언어지도』태학사 2008

말의 추억, 추억의 말

 

 

정승철 鄭承喆

서울대 국문과 교수 scjung@snu.ac.kr

 

 

정승철_한국언어지도거리에서 또는 방송에서 시골을 접할 때가 있다. 버스나 지하철 또는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려오는 말 속에서 불현듯이 지방의, 아니 고향의 정겨움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자신의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올리게도 하고 자신이 쓰던 추억 속의 말을 되살려주기도 한다.

이러한 말의 추억과 추억의 말을 소생시키고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나왔다. 오랜 기간 방언을 연구해온 다섯명의 국어학자(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 전광현 단국대 명예교수, 이광호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병근 서울대 명예교수, 최명옥 서울대 교수)가 공동으로 펴낸 『한국언어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도별로 간행한 9권의 『한국방언자료집』(1987~95)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자료집이 1978년에 시작된‘전국 방언 조사연구’(군 단위의 남한 방언 조사) 사업의 중간결과로 출간되었으므로 『한국언어지도』는 이 사업 출범 후 30년 만에 방언지도로 모습을 드러내 보인 사업의 최종결과물인 셈이다.

『한국언어지도』에는 153장의 방언지도가 실려 있다. 「머리말」에 따르면, “방언 분포가 선명”한 153개의 단어를 대상으로 방언지도를 그렸다. 어느 것이든 왼쪽 면에는 방언지도, 오른쪽 면에는 관련 방언형의 분포 현황과 그에 대한 부가적 설명을 제시했다. 방언지도의 왼쪽 위에는 범례를 두어 방언형과 기호의 대응관계를 살필 수 있게 했고, 부가적 설명의 왼쪽 위에는 조사 당시의 질문(그림 포함)을 달아 조사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 방언형을 보고 해당 지도를 찾을 수 있도록 책의 말미에 「찾아보기」를 덧붙였다.

방언지도는 “각 지역에 어떤 방언들이 쓰이고 그것들이 어떤 분포의 모습을 보이는지를 시각적으로 쉽게 드러나도록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한국언어지도』에서는 “기호의 모양과 색깔”로 각 방언형을 구별했을 뿐 아니라 “바탕색을 이용하여 방언 구획을 보여 줌으로써 그 분포를 더 선명하게 표시”했다(「머리말」). 이러한 지도 작성의 원칙에 대해서는 「일러두기」에 자세히 베풀어져 있다.

 

지도 65 ‘가위’의 방언지도 및 부가설명

지도 65 ‘가위’의 방언지도 및 부가설명

 

지도 65의‘가위’를 보자. 왼쪽 방언지도의 바탕색을 통해‘가위’의 방언형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뉨을 알 수 있다. (이 글에 실린 지도에서는 색을 표시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붉은색의‘가위’계(경기 서부와 충북 및 강원의 일부 지역, 기본도형 ○), 노란색의‘가시개’계(경북 및 전남·경남의 접경 지역, 기본도형 □), 파란색의‘가새’계(그밖의 지역, 기본도형 △)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각 부류의 하위 방언형에 부여된 각기 다른 기호들은 각각의 시군 지역에서 사용되는 방언형에 관한 세부정보를 마저 제공해준다. 이러한 분포에 대한 기술에다, 각 방언형의 형태적 구성 및 역사적 변천에 대한 설명을 보태 그 오른쪽 면에 담았다.

저자들이 토로한 아쉬움의 말처럼 이 책은 남한만의 방언지도이며 153개의 제한된 항목의 방언지도다. 하지만 이는 『한국언어지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바탕이 된 『한국방언자료집』이 지닌 한계라 하는 편이 옳다. 이 책의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호의 표기에서 기호 사이의 관계가 방언형 사이의 관계를 평행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는 점과 각 방언형에 대해 간혹 잘못 분석한 예가 보인다는 점일 터이다.

이를테면 지도 5의‘김(매다)’의 방언형들에는 다음과 같이 기호가 주어져 있다. 김 ◉, 짐 ○, 기심 ◬, 지심 △. ◉와 ○가 ‘ㄱ’과 ‘ㅈ’(구개음화에 의함)으로 대응된다면 ‘기심’과 ‘지심’또한 가운뎃점의 유무로 대응되어야 체계적이라 할 만하다. 아울러 이러한 구분은 지도 49의 ‘기둥’에서도 유효하다. 원 책의 “기둥 ○, 지둥 △”이 아니라 “기둥 ◉, 지둥 ○”으로 기호 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호 △가, ‘짐’과 ‘지심’에서 보듯 반치음(ㅿ)과 관련된 방언형에 할당되는 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시 저 앞의‘가위’를 보자. 강원도 삼척의‘깍개’를‘깎-’과 “접미사‘-개’가 결합된 것”(141면)으로 보았으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가위’는‘깎는’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가새’가‘자르다’의 뜻을 지니는 동사‘갓-’과 접미사‘애’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고‘까새’가 그것의 어두‘ㄱ’이 경음화한 형태라면,‘깍개’는‘갓-’과‘개’의 결합인‘가깨’가 어두 경음화한‘까깨’를 달리 표기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하기에‘깍개’에 부여한 이질적인 기호(*)도 부적절하다.

이처럼 적절치 못한 부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언어지도』는 “언어의 생동하는 모습을 다채롭게”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말의 “긴 역사”와 각 지역의 “독특한 삶의 흔적”도 드러내준다.(「머리말」) 이 책을 따라 경기도(강원도 북부 포함)의‘곤지곤지’에서 강원도 남부의‘장개장개’로, 충청도·전라도의‘지껑지껑’이나‘지개지개’로, 그리고 경상도의‘진진’으로(지도 84), 또 중부지역의‘꽈리’에서 전라도·경상도의‘때꽐, 땡꽐’로, 제주도의‘풀철귀’등으로(지도 122) 면면히 내려가보자. 그것만으로도 방언의 생동감과 다양한 지역적 삶의 흔적을 확인하고 긴 방언의 역사를 상정하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더구나 독자들에게는‘꽈리, 때꽐’이나‘땡깔, 푸께’를 불던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더 큰 소득을 제공해준다. 여기까지, 말의 세계는 필자의 몫이지만 이제부터의 추억은 독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