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소네치카』, 비채 2012

서사의 원형, 인간의 근원을 찾아서

 

 

김연경 金燕景

소설가, 서울대 노문과 강사 koshka1@hanmail.net

 

 

114351990년대, 뻬레스뜨로이까 이후의 러시아와 마주한 ‘P세대’(펩시 세대)의 딜레마를 가장 잘 대변해준 이는 모스크바 출신의 삼십대 작가 빅또르 레빈(Victor Pelevin, 1962~)이었다. 도시적인 감수성과 비의적인 분위기, 도발적이고도 지적인 문체, 현란한 문화코드와 다양한 장르의 혼합 등 그는 새로움과 젊음의 대명사였다. 그 무렵, 우랄 지역 출신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쉰살을 목전에 둔 ‘아줌마’가 「소네치카」(1992)라는 ‘촌스러운’ 제목의 중편소설을 들고 문단에 나타난다.

류드밀라 울리쯔까야(Ludmila Ulitskaya, 1943~)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소네치카」는 한마디로 ‘여자의 일생’이다.(한국어판에는 장편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 단스페이드의 여왕과 함께 수록, 박종최종술 옮김) 쏘냐(쏘네치까)는 네프(NEP, 신경제) 시대에서 스딸린 독재로 이어지는 격동기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불안한 심연”과 “투르게네프의 그림자 드리운 가로수”에 빠져 사는 독서광이지만 어느 중년 화가(로베르뜨)와 결혼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책 속의 삶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은 사라진 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변변치 않았던 것들, 예를 들어 직접 만든 쥐덫으로 쥐를 잡은 일”이 중요해진다. “고상한 소녀”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안주인”이 된 그녀의 꿈은 “수도관이 설비된 부엌, 딸이 혼자 쓰는 방, 남편의 공방”이 딸린 “사람이 살 만한 평범한 집”을 갖는 것이다. 노화의 폭탄을 맞은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도 “아이를 더 많이 낳지 않으면 남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35면)는 생각이다. 1950년대초, 중년의 소냐는 아이의 양말을 기우며 남편과 예술가 친구들의 ‘고상한’ 대화를 듣는 가정주부이다. 그런데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데 싫증이 난 딸(따냐)이 작고도 요염한 고아 소녀(야)를 데려오면서 가족구조가 재편된다. 집이 철거당할 절박한 순간에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쏘냐는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긴 것은 “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뿌슈낀의 소설을 꺼내 읽는다. 딸마저 뻬쩨르부르그로 떠나자 다시 “문학이라는 마약”에 손을 댄다. 반쪽짜리 남편이 죽은 다음 야샤를 챙기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야〕는 고아였고, 쏘냐는 엄마였다.”(78면) 그렇기에 남편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떠난 이후 그녀의 삶에서는 오직 문학만이 희망이다.

「소네치카」는 짧은 분량임에도 고전적인 가족서사의 충실한 복원으로 읽힌다. 물론 대러시아제국이 쏘비에트연방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로 바뀐 것이 도드라지긴 한다. 소위 ‘웰 메이드’ 가족서사의 대가인 똘스또이, 특히 쏘냐가 탐독한 전쟁과 평화의 경우 구성적 주인공은 여성(나타샤 로스토바)이지만 사상적 차원은 제각기 똘스또이의 분신인 남성들이 담당한다. 울리쯔까야의 가족서사는 모든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인천하’이다. 한 남자가 여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들이 다양한 역할(어머니, 아내, 애인, 딸)을 맡아가며 한 남자를 공유한다. 자유와 욕망의 발칙한 화신인 ‘마녀-딸’ 따냐와 야, ‘자기낮춤’을 통해 성성(聖性)을 획득하는 ‘성녀-어머니’ 쏘냐, 이들 모두 제각기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메데야와 그 피붙이들의 이야기인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 이르면 그림이 더 또렷해진다. 이 시노플리 집안에서 제일 부각되는 것은 메데야(불모의 성녀)와 알렉싼드라(다산의 마녀) 자매의 성화(聖畵) 같은 대조이다. 메데야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온 남편 사무일이 죽은 직후 그와 알렉산드라가 연인관계였으며 여동생의 딸(니까)이 자기 남편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정되었던 남편의 저 아이를 여동생의 유쾌하고 가벼운 몸에 넣어주었던 운명”에 대한 원망을 뒤로 하고 ‘멋진 과부’로, 모두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얽히고설키는 ‘아이들’의 이야기 중 니까와 그녀의 조카 마샤 사이를 오가며 도스또옙스끼적인 음탕의 권태에 탐닉하는 “강철 같은 몸에다 꽁지머리를 길러서 사제 같은” 발레리 부또노프가 소설적 흥미를 더한다. 그의 연인이자 저명한 학자(알리끄)의 아내인 마샤는 심각한 조울증 끝에 몇편의 시를 남기고 자살한다.

메데야와 알렉산드라가 이 파란만장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들이 “아이를 잘 낳는 암컷”(『전쟁과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 순혈 그리스인 자매는 공히 성녀-마녀로서 인간의 근원이자 서사의 근원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가 절묘하게 포착한 바, 고뇌와 번민 끝에 두 아들을 죽이고 그로써 (그들이 크레온 집안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철저히 욕망에 충실했던 자신을 단죄함과 동시에 아버지-수컷에게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 신화 속 메데이아가 묘한 음화로 되살아난다.

여성 중심의 가족서사는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더 극적이다. ‘맑스-레닌주의’보다 더 질기게 살아남은 아흔살의 무르, 어머니의 추한 음욕을 견뎌내는 예순살의 안나(‘성녀’), 마흔줄에 이른 안나의 딸 까쨔, 끝으로 까쨔의 아이들 등 총 4대가 만들어내는 풍속도는 「스페이드 여왕」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현대판 미니어처에 가깝다.

울리쯔까야는 붕괴와 해체의 시대에 통합에 대해 쓴 작가이다. 핏줄의 그물망을 축조함으로써 서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하늘-우라노스’(아버지)보다 앞서는 ‘대지-가이아’(어머니)를 소설화하려는 시도는 우리말 번역에서도 잘 표현된 문체적 독특성과 은근한 지성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제2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그녀는 박경리(朴景利)의 『김약국의 딸들』을 언급했는데, 『토지』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마땅히 이 경이로운 대작 앞에 경의를 표했으리라 생각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설의 다음 장(), 다음 부()는 쓰일 수 없음을, 사람은 사람과 엮일 때 비로소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토지』이다. 새로운 문학은 일견 그것이 아무리 새로워 보일지라도 어쨌거나 핏줄의 산물이고, 가족서사는 여전히 모든 소설가의 로망이다. 러시아문학을 흠모하는 우리 독자에게 울리쯔까야의 소설이 많은 호응을 얻기를, 무엇보다 다양한 문화체험을 통해 우리 문학의 가계도에 더 많은 『토지』가 생겨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