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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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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金宣雨

동아대 철학과 4. 1991년생. welovestyle@naver.com

 

 

 

독학자 그리하여 이행하는 자의 산문

 

 

1. 자립의 원천기술

 

배수아(裴琇亞)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립’과 ‘자립’ 사이의 공간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독학자, 열림원 2004, 9면) 이 문장을 읽기 위해선 ‘세계’의 두가지 다른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 ‘나’를 세계의 구성원으로부터 떼어놓는 고립된 세계와, 고립을 뚫고나가 새로운 탄생이 시작되는 세계. 고립된 상태와 자립의 가능성이 대응하고 있는 이 문장(세계)은 우리에게 어떤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고 여러 갈래의 길로 나아가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매번 배수아의 문장을 놓치기 일쑤다.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자들이 자주 미끄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배수아 소설의 힘은 바로 이 문장이 일으키는 이중적 방향의 부딪힘, 그 마찰‘력’에 있다. 그러니 배수아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익숙한 독법을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문체나 기법의 새로움을 습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문학이 고립된 상태를 고발하고 이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립의 자리에서 자립을 일구는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일구느냐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배수아의 소설을 통해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배수아의 소설이 배태되는 풍광은 고립의 상태를 자립의 밑거름삼아 충실하게 시도하는(essay) 글쓰기에서 연원한다. 배수아의 소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인물들이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자립과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답하기에 앞서 배수아의 소설이 시도했던 ‘외출’과 ‘이행’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왜 그토록 그녀의 소설은 외출로 점철되어 있는 것인가? ‘독학자’라는 외출 혹은 이행을 통해서만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배수아의 소설이 놓여 있는 ‘독학자’로의 이행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 ‘정치의 자유’에서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외치던 목소리들과 어느 정도 조응하는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세계의 패러다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정치적 주체의 이름은, ‘그녀들’의 이름이 아니라 ‘민중’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도서관과 미술관을 배회하던 ‘독학자’의 자리가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역사에서 기입될 자리가 없었던 것과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일련의 역사적・젠더적・정치적 배제 속에서 ‘그녀들’, ‘독학자’들의 역사가, 그들의 언어가 자리할 수 있는 좌표는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폐쇄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1)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주체의 대열에 놓일 수 없는 자들이 마련하는 새로운 정치성의 기획에는 필수적으로 새로운 언어가 요구된다. 그런데 현실적 좌표를 제대로 할당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기획을 뒷받침할 새로운 언어는 형체 혹은 체계와 논리를 갖추기 어렵고 그 때문에 매번 결여된 것이나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조건의 말들, 즉 ‘결여된 언어’가 1990년대 여성작가들의 언어로 암묵적으로 가정되고 승인되어온 것을 보라. 1990년대 여성작가들의 ‘싱글 라이프’는 “새로운 삶의 형식에 대한 마니페스토적 선언과, 오래된 공동체적 관습과 새로운 삶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분열이라는 두 차원에서 진자운동”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싱글 라이프’라는 삶의 형태는 “단지 ‘선언’, ‘마니페스토’로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2) 즉 어떤 텍스트가 현존하는 독법으로 전유되지 않는 지점이 발생하는 순간 그 텍스트를 더이상 독해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암암리에 유포되며 기왕의 독법이 갖는 전제군주적 힘들이 훨씬 강화될 따름이다. 즉 ‘그녀들’의 언어, ‘싱글 라이프’의 언어를 익숙한 언어로 바꾸기만 할 뿐 그것이 갖는 운동과 에너지를 침묵에 내동댕이친다는 것이다. 독해되지 않는 언어를 익숙한 것으로 순치시키는 이유는 길(대안)에 대한 집착이 결코 포기되지 않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독학자들의 좌표 역시 기왕의 정치적 주체성을 할당받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행, 옮겨감, 걸음, 새로운 언어를 읽는 독법에 있다. 따라서 배수아라는 독학자의 외출을 상투적인 언어로 치환하는 것은 오히려 이행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체계 내부로의 동화나 그 과정이 단순히 당대 사회의 기득권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기득권에 대항하는 ‘무리의 도덕’(니체)을 자기증식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기에 상투어(대안)는 여전히 이행일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세계로부터의 고립과 사회적 동화라는 이중적 구속에도 불구하고, 고립의 상태를 의문시하며 세계의 토대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식적 파리아’(conscious pariah, 한나 아렌트)의 자리, 문학이 이 자리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요컨대, 배수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세계로부터의 고립과 사회적 동화라는 이중의 경계를 이탈해나가는 외출과 이행을 보여준다. 고립을 자연화하는 ‘도시의 삶’과 정치적인 것의 가능성을 ‘무리의 도덕’의 습득으로 제한하는 경계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수아의 문학을 단순히 이방인적 글쓰기로 규정하고 새로움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전통적인 문학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고립의 구조를 뚫고 나아가는 ‘이행의 역사’로 보지 않는 한, 문학의 언어가 개시(開示)한 공간에 비평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1990년대 ‘신세대 작가’로 등장한 배수아에서, ‘이방인 작가’로 간명하게 처리해버리고 마는 담론의 호출방식에서 자리를 옮겨가야 한다. 세계보다 낮게, 소설만큼 낮게 걸어가는 자들, 자립을 위한 진지전을 치룬 한 작가의 길을 뒤따라 걸어가보자.

 

 

2. 구호(口號)로부터의 외출

 

1980년~90년 학생운동을 기억한다면, 배수아의 소설 독학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사회성(민주화운동)과는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도 있다. 198X년의 스무살 대학생인 ‘나’와 S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반응하는 모습은 당시의 구분으로는 ‘부르주아지’ ‘이기주의자’쯤으로 분류될 수 있는 탓이다. ‘반사회적인 것’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의미로 분출된다. 하지만 소설 속 ‘나’는 되려 그러한 자유가 국가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수동적으로 응하는 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동화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볼 때, ‘나’의 정체(正體)는 단지 정체(停滯)되었을 뿐, 다른 목소리를 발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독학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개인주의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198X년 대학이라는 세계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정치적인 것’의 자장에서 나타난 ‘독학자’라는 새로운 주체의 걸음걸이다. 이 걸음걸이는 새로운 세계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뚫고 나와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걸음걸이이다.

 

정치적인 자유 이외의 모든 지적인 자유, 정치적인 의미 의외의 사상의 자유, 예술의 자유, 그리고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헤머처럼 가차없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다수의 결정으로부터의 자유, 군중으로부터의 자유, 잔인한 본성으로부터의 자유, 무기와 육식으로부터의 자유, 폐쇄적인 성 정체성과 전통적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그런 것들을 원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126면)

 

‘나’는 2학년을 한 학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대학을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발단은 듣고자 했던 논리학수업의 수강이 불가능하다는 학교 측의 답변을 받았던 데서 비롯된다. 청강을 하려고 해도 선택할 수 있는 수업의 범위는 전공수업 위주로 제한해놓았으며 전공을 바꾸려 해도 대학의 어느 부서에서도, 어느 학과에서도 이를 담당하여 처리하려는 곳은 없었고, 대학의 규정 또한 어떤 입장에서 읽느냐에 따라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되어 있다. 대학제도가 획일적으로 구축해놓은 좌표에 들어간 것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일 수 없다. “도덕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았으면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이고 순수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분방하면서도 확신에 찬 거대한 동맹의식”(31면) 또한 대학이 생산해낸 군중과 동지의 세계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세계가 ‘나’에게는 대학생들의 저항성이 갖는 공허한 수사이지만 강력한 관계의 정치적 범주를 형성하는 원리이다. 가령 “그 일상적인 친근함과 끈끈함”, “그 익숙함과 공유의식”(208면)은 ‘형제애’라는 관념 아래에서 관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된다. 이는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긋고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연대의 안과 밖을 구분한다는 린 헌트(Lynn Hunt)의 지적이 그러하듯, ‘익숙함’의 정치는 ‘우리(동지)’와 ‘그들’을 구별하는 일상의 정치적 식별조건으로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나’가 이 순수한 도덕의 세계, 군중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곳은 어디인가?

한편, ‘(현실)정치적인 자유 이외’의 자유에의 열망은 배수아의 소설이 내내 외출을 감행하는 데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배수아가 언어의 문제에 천착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로 보이지만, 이 이행의 운동이란 배수아 문학이 지향하고 있던 일관된 태도라고 보아도 좋다. 단편 「허무의 도시」 「200호실 국장」(그 사람의 첫사랑, 생각의나무 1999)에서처럼 ‘나’는 도시적 삶으로 나타나는 반복-강박적인 질서 안에서 외출을 시도한다. 가령 도시적 삶의 모습이란 이러한 것이다. 「200호실 국장」의 한나는 삼년 동안 지하부터 주거복합건물에서 직장을 다니고 백화점과 옥상 테라스에서 주말을 보내며 살아온 메신저 걸이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에서 한나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들이라곤, “가깝지 않은 직장동료”와 곧 자기네 나라도 떠나버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늦게야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지만 내일 떠날 예정인 200호실 국장이 전부다. 이 도시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란 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관계이며, 서로에게 “말해봤자 무의미한 것”(200호실 국장 174면)이다. 그런 점에서 ‘도시’와 ‘대학’은 닮아 있다. 배수아의 인물들이 반복되는 도시의 삶에서 감행한 외출을 ‘독학자’라는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의 걸음과 조응시켜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되는데, 「200호실 국장」과 「허무의 도시」의 마지막 장면이 이후 배수아 소설이 외출에서 이행을 시도하는 두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무의 도시」에서 9일의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나’에게 무열은 “너는 선택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야”(93면) 라는 말을 하지만 이 선택은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방증할 뿐이다. 도시의 삶에서 ‘나’가 선택할 수 있는 (외출이 아닌)휴가의 범위는 무열이 추천한 대로, 화려한 휴양지에서 보내는 단 12일의 휴가, 템플 트래킹, 관광객이 붐비지 않는 바다로의 여행 따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지들은 ‘나’의 자발적 의지와 무관하게 ‘나’에게 평생 되돌아올 반복된 삶의 반경에 다름아니다. 이런 무열의 제안을 모두 거절한 ‘나’는 ‘낙오자의 섬’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낙오자의 섬’은 ‘사회부적응 판단’을 받은 자들이 ‘수용’될 수 있는 곳이다. 무열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곳에 아예 정착할 계획으로 이주를 시도한다. 도시적 삶의 들숨과 날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노동과 여가의 이분법적 삶을 끊어버릴 수 있는 방법으로 배수아의 인물이 자발적으로 걸어들어간 곳은 모든 사회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이 단절을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의미로 환원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이야말로 고립된 개인이 거쳐야 할 ‘고독’일 수 있다. 이 고독은 ‘개인들의 내면에서 외롭게 홀로 견뎌야만 하는 폭력’을 정치화한 이들의 역사와 다른 궤도에 놓여 있지 않다.

 

그들이 혁명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해도,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개인은 여전히 무력하고 고독할 것이며 어쩌면, 앞으로는, 설사 다가올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이제 정녕 거대한 폭력이 아주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개인들이 내면에서 외롭게 홀로 견뎌야만 하는 폭력이 될 것이다. (독학자 128면)

 

1990년대 중반 이후 여성주의운동이 ‘사적인 영역’에서 정치적인 것을 도출해낸 시도는 주류적인 사회운동과의 길항에서 나타난 제2의 물결이다. 사적인 영역의 가정, 친구, 애인 같은 관계망이 공적인 영역으로 의제화되지 못하는 폭력을 내포하고 있을 때, “개인은 여전히 무력하”다. 시민, 민중이라는 이름과 대의명분의 깃발 속에서조차 반복되는 권력의 자행과 폭력의 구도는 “내면에서 외롭게 홀로 견뎌야만 하는 폭력이”될 뿐이다. 그러한 폭력은 주체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단일한 대상에 맞선 반항이나 투쟁을 위한 목적으로 쉽게 결집되기 힘들다. 이는 독학자, 곧 이 결집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부딪히는 ‘벽’의 무력시위와 다를 바 없다.

200호실 국장」에서 등장하는 한나는 이 ‘벽’에 둘러싸여 사는 존재다. 그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나의 말을 들어주는 관계가 없다. 직장동료들은 200호실 국장의 방에서 한나를 목격한 이후 한나를 파렴치한 여자로 보고, 외국인 남자친구도 떠나버렸으며, 새로 온 국장은 어째 한나의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 한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의 등장과 함께 끝나는 소설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배수아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익명의 침범이기도 한데, 목소리에 답하려는 한나의 시도는 바람에 묻혀버린다. 한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듯, 「허무의 도시」에서 ‘나’는 ‘낙오자의 섬’으로 출발하기 전 새벽에 무열에게 전화를 건다. “내 우울증에 대해서, 궁핍과 조급증에 대해서, 내 열등감에 대해서, 지진의 예감에 대해서, 무열은 내 눈물의 근원을 그런 것에서 찾고 언제나처럼 이해하지 못”(104면)하고, 섬에 대한 온갖 잡다한 풍문들을 둘러대며 대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몰라보게 싸늘한”(105면) 무열의 목소리는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배수아 소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무응답의 구조’는 고립된 존재가 처한 외출의 기본적인 조건에 해당될 터이다. 이것이 단순히 서사적 내용에 국한된다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배수아의 소설이 가닿는 행보는 이들의 ‘외출’을 ‘이행하는 문학’의 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행의 운동성’이 문학의 조건이 될 때, ‘나/너’를 부르는 ‘목소리(들)’은 하나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는 곧 배수아 소설이 이행을 형상화하려는 불가능한 소설적 구도를 쟁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배수아의 이후 소설 속 인물들이 ‘글쓰기’와 ‘낭송’을 행하는 주체로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부터 돌이켜봐야 한다. 나/너는 네/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3. 습속의 수용소, 그 바깥의 수용소

 

도시의 고립으로부터 외출을 알리는 걸음걸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이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이행의 궤도 위로 배수아의 소설은 움직인다. 그 걸음걸이는 수니라는 낭송배우의 목소리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목소리가 독학
의 ‘나’가 원했던 수많은 종류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귀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이 홀로 견뎌야 했던 폭력을 정치화하려고 했던 시도, “이제 그런 식의 자유는 이미 한참 전에 유행의 시한이 만료되었”(북쪽 거실, 문학과지성사 2009, 180면)고, “지나간 시절의 히스테리에 불과한 것들”(91면)이 되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 혹은 가족은 더 이상 ‘나’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할 장소가 아니다. “부모들이 보수적이고 엄격하지만 파렴치하지는 않고, 교육받은 지성인인 데다가 돈까지 갖고 있으므로”(57면). ‘자유’가 또다른 모든 종류의 ‘자유’의 억압기제로 작동했던 때의 기억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나섰던 외출이 다시 상투적인 어구로 치환될 위험에 처하는 탓이다.

 

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랑에서 비정치적인, 더 나가서 반정치적인 사랑으로 개종했는데,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반정치적이라고 안심했던가? 하지만 어쩌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과거 어느 시절 특정한 사람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으로 보였던 것이, 지금은 같은 사람들에게 반정치적인 것으로 인식되며 마찬가지로 위안을 주고 있을 뿐. (…) 그토록 많은 위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벼운 놀라움을 가지면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일상적인 몸짓으로 돌아간다. (181면)

 

혁명도, 반정치적인 행위도 존재의 의미를 보증해주는 대의가 되지 못하고 한갓 “위안”을 주는 ‘정치적인 올바름’이나 일상적인 ‘습관’ 따위로 인식될 때, 북쪽 거실에서 수니는 “습관적 어휘의 엔지니어들”(14면)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수용소에 감금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중의 수용소. 낭송배우인 수니는 수용소에서 라디오 성우로 일하며 수감자들이 보낸 편지를 낭독하는데, 그 내용은 대개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적절한 문장을 찾아 정처 없이 표류하는 중에 그들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이 이미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세계로 넘어가버”(137면)렸기 때문에, “적어도 픽션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어디에서부터 끝맺음을 해야 할지”(65면)알 수 없다. 차라리 말들의 향연이라고 부를 법한 수용소의 저주와 축복이라고 할 법하다.

북쪽 거실의 이야기는 수니의 수감과 석방 전후의 일들을 꿈과 편지, 일기를 통해 형상화된다. 종국엔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누가 수니인지 분간하기 힘들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하지만 이러한 편지와 일기의 양식을 단지 ‘나’의 내면성을 확보하는 근대적 주체, 개인의 자기수행(미셸 푸꼬)이라고 보긴 힘들다. 앞서 수용소 라디오 방송국으로 편지를 보내는 수감자들을 통해 보았듯이, 이들은 “적어도 픽션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불가능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습관적 어휘의 엔지니어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수감자들은 “습관적 어휘”를 통해 “삶(생활/인생/생명)이란 어떠한지, 어떠했는지, 어떠해야 하는지, 심지어 어떠할 것인지에 관한”(15면) 이미 완결이 가능한 문장으로 자신을 서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꿈을 통해 자기만의 고유한 어휘를 찾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북쪽 거실을 꿈의 탐색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글쓰기’가 갖는 정치적 가능성에 더 주목해야 한다. 이는 배수아 소설을 ‘이행의 운동성’의 맥락에서 읽는 것을 의미한다. 시작과 끝이 가능한 이야기란 혁명이 ‘완성’된 자, 즉 목적지에 도착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행하는 자의 이야기는 끝날 수 없으며, 쓰기라는 과정을 통해 주체는 매번 상투어와 대면한다. 그렇다면 수용소라는 ‘벽’의 안과 밖은 이행하는 자들의 종착지인가? 수용소 안의 삶과 수용소 밖의 삶 모두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수니는 “22조 수정 항의 경계성 케이스”(10면)의 수치가 높아져서 수용소로부터 석방 판정을 받게 된다. 수용소에 자신을 수감하기 전 2년간 동거를 했던 희태의 집으로 간 수니에게 집 안의 모든 사물이나 희태와의 관계는 “마침내는 친숙함이 아우성치며 밀려”(20면)드는 것으로 마감된다. 그러니 실상 수용소라는 공간, 그 자체가 수니에게 그녀의 의도나 희망대로 이행이 될 수 없었다. “여기는 파라다이스가 아닙니다.”(31면)

 

옛날의 낡은 나로 돌아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니, 그 시간은 다 무엇이었을까, 그 여행은 다 무엇이었을까, 기꺼이 잃어버리려 했던 그 시간은, 자발적인 감금은, 내가 아니고자 했던 모슨 시도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결국 한 쌍의 나사, 내 부재와 귀환은 원인과 결과처럼 이미 결정된 한 쌍의 나사에 불과했던 것일까. 녹슬었으나 불가피하며 진부한 한 쌍,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내가 있는 제자리로 되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을 한 것에 불과했던 걸까. (250면)

 

하여, 수용소에서 돌아온 수니는 다시 희태의 집으로부터 외출한다. 아니, 차라리 엑소더스를 감행한다. 그 모든 “친숙함”으로부터 타지의 ‘벙어리 여배우’로, “서구화되지 않은 극동아시아인 여자”(257면)a 여인’의 삶으로 이행하게 된다. 즉 ‘독학자’라는 이행의 걸음은 타지의 언어를 모르는 벌거벗은 ‘이방인’의 모습으로 다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자유’와 ‘민주화’라는 이름이 억압했던 주체들과 자유의 목소리를 위한 외출이 ‘독학자’로의 이행이었다면, 배수아의 후기 작품들은 자신의 모국어마저 포기하는 이행을 감행하는 데 이른다. 뿐만 아니라 영토적 외출에서, 언어적 외출로, 습속의 외출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서사에 도달하는 배수아는 90년대 문학담론의 편리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습관적 어휘’와 어법으로부터의 외출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90년대 문학담론이 민족문학 논쟁, 동아시아 담론, 모더니즘 논쟁, 신세대 논쟁, 섹슈얼리티 문제 등을 다루면서 넓힌 ‘자유’라는 스펙트럼은 실상 “습관적 어휘의 엔지니어”들이 문학을 분류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배수아는 상투어의 세계로부터 외출하기 위한 언어를 도입함으로써 문학이라는 형식을 와해시키면서도 그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이중화된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국에서 작가인 ‘나’가 시도한 외국어 작문은 ‘모국어’에서 ‘외국어’로, ‘작가’에서 ‘에세이스트’로의 이행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은 독일에서 만난 M에게 보내기 위한 편지로 시작된 글-이야기이다. 외국어로 글을 쓰기 위한 시도는 “혁명과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이면서도 그것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고 도리어 쾌감을 느끼는 21세기의 잡동사니”(155면)로부터 외출하는 배수아의 방법이라 보아도 좋다. 모국어를 외국어로 바꾸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21세기 잡동사니’의 세계로부터 형성해온 어휘를 탈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수아가 ‘문학’의 자리에 ‘에세이’를 앉힌 이유를 바로 이러한 문맥에서 찾아야 한다. ‘에세이스트’는 기존의 관습화된 어휘와 문법을 마치 외국어를 부리듯 새로운 어휘로 탄생시킨다. ‘에세이스트’로서 글쓰기는 곧 문학을 형성해온 세계, 혹은 문학의 조건을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어가는 역동성 속에서 ‘나-문학-세계’는 (재)발견, (재)구성된다.

 

 

4. 거실의 바깥에 있는 서울의 낮은 언덕

 

나는 개념으로 풀어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지. 나는 비록 경전을 번역하는 일은 하지만, 실제의 내 행동은 팸플릿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형국이야. 이건 분명 새로운 개념의 ‘가난’의 징후겠지. (서울의 낮은 언덕들, 자음과모음 2011, 233면)

 

하지만 방랑자들이 수천 킬로나 떨어진 대륙의 낯선 도시에 도착한 다음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닌 너무나 익숙한 문화적 표지를 만나게 된다면, 마치 섬을 향해 헤엄치는 난파 선원처럼 그들은 슬퍼해야 하는지 아니면 기뻐해야 하는지. 내 말은, 그들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갔던 걸까요. (143면)

 

그러니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 이국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방법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229면)다 할지라도, ‘낯설고 매혹적인’ 배수아의 인물들은 이미 그 자리를 지나친다. ‘이방인 작가’라는 수식어가 얼마간 유효하리라 생각되었던 그 이름에서 배수아는 어느새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낭독하는 사람, 그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 있는 사람”(118면)이 되어가고 있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설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가는가? 이야기는 단순히 ‘말’이 발화되는 것과 다르다. 외려 이야기는 말이 독점하는 공간의 응집력보다 헐겁다. 그것은 이야기가 지닌 어떤 속성에서 비롯되는데, 나와 타인이 서로 주고받는 말의 틈 속에서 이야기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낭송 전문 배우’ 경희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카라코룸’이라는 임시거주자를 위한 무료 셋방을 방랑하는 이야기꾼이다. “도시와 언어를 바꾸어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나를 빨아대는 이 어질어질한 현기증의 느낌”(260면)은 경희를 목적 없이 계속해서 이동하게 만든다. 그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경희의 가족과 경희가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은 경희의 ‘이야기’로 그녀의 여행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이야기의 형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어떤 그들은 현존하지만 부재하기 때문에, 경희라는 서술자의 도움을 통해 번역되어야 하고 그 번역의 과정을 통해서 순간적으로 현존하지만, 그들은 곧 자취를 감춘다. 일테면 배수아의 글쓰기 형식인 번역과 이를 통한 월경(越境)은 한계에 봉착한다. 말하자면, 배수아에게 여행은 그 자체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들은 “무엇을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걸어”갔단 말인가? 해명할 ‘말’을 찾는 길이 아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발걸음, “걸어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22면)이 된다. 이는 ‘팸플릿’(행동지침)을 확인하고, “신념을 골라서, 찾아다니고, 선택”(231면)하는 것과도 대비된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이렇게 걸어가는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이야기들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수많은 불특정한 목소리들의 일방적 질주와도 같”(269면)이 진행되기에, 우리는 배수아의 인물들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모습을 자주 확인한다. 북쪽 거실에서는 수니와 벙어리 여배우, a여인 등이 중첩된 모습을 보여줬다면, 서울의 낮은 언덕들의 ‘낭송극 전문 배우’ 경희는 라디오 오디오북 성우의 목소리, 낭송극 혹은 어떤 이야기 자체와 중첩된다. 종국엔 경희라는 실체는 사라지며 경희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경희에게 보내는 편지 사본”(283면)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인물들이 중첩되고 중첩되어 끝내 ‘누가’ 그/녀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낯선 타인의 삶과 ‘나’는 “서로 관통하고 작용한다.”(같은 책 173면) 이러한 중첩은 “한국에 결코 없는”(서울의 낮은 언덕들 265면) ‘낭송극 전문 배우 경희’의 존재가 “그의 원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까닭에”(같은 책 59면) ‘미스터 노바디’라 불리는 어떤 남자의 (비)존재와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나’는 도시의 방랑자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만나면서 증명되는 ‘무엇’이기에 이러한 배수아의 소설을 (비)존재들의 보고서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바람에 묻혀버린 ‘나의 목소리’(허무의 도시), 전화를 받지 않던 ‘너에게 할 말’(200호실 국장)은 이야기하는 자들의 세계를 통해 들린다. 이는 ‘나/너’의 존재가 ‘너/나’의 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너’가 ‘너/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독학자’의 ‘에세이’(목소리)를 통해 문학의 자리는 종언과 파국이라는 이름 대신 경계의 목록을 늘려 다른 세계로 이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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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90년대 여성주의운동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독해는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이매진 2008 참조.

2)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갈무리 2012, 52~54면.

 

 

 

평론 | 심사평

 

평론부문 응모작은 고작 10편, 작년에 비해 흉년이다.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삼지 않은 논설 비슷한 에쎄이도 한편 껴묻어 있으니, 실제로는 9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질적으로도 높지 않다. 왜 지금 그 작가/그 작품/그 현상 들이 문제로 되는지를 진중히 의식하지 못한 평범한 리포트 비슷한 글들이 많았다. 느닷없이 주관적인 감상문들도 없지 않았다. 다시 강조컨대 평론의 생명은 살아 있는 문제의식이다.

9편을 통독하고 2편, 「몰락하는 주체들과 해방구들: 동시대 작가 2인의 이색(異色)적 작품 통해 대면하는, 점멸중인 인간 존재지위와 치열한 몸부림」과 「독학자 그리하여 이행하는 자의 산문: 배수아와 이행하는 말과 이야기들」을 골라냈다. 골라내긴 했으되 제목부터 난감하다. 요령부득의 긴 부제를 거느린 전자나, 설명이 지나치다 못해 제목과 부제가 중복된 후자나, 글쓰기 훈련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던 것인데, 그래도 본문은 다르니 다행이랄까.

문장력이 유려한 후자도 그렇지만, 현학적 문체를 끈덕지게 구사하는 전자 또한 읽을 만했다. 어느 작가 또는 어느 시집/단편집을 대상으로 한 손쉬운 접근이 대부분인 터에 이른바 ‘주체’가 최근 젊은 소설에서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지를 분석한 전자는 문제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나름 진지하다. 그런데 문제의식에 비해 논증은 허술했다. 배명훈과 이장욱의 단편, 단 두 작품이 이 거창한(?) 주제를 감당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해석도 적실한 듯싶지 않다. 아마도 외국이론들에 너무 의존한 탓일지도 모른다. 요즘 더욱 거세지는 해외문학파적 유행이 정말 골치인데, 텍스트가 비평의 알파요 오메가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이에 비하면 배수아의 장편들을 분석한 후자는 안정적이다. 난해한 배수아의 소설세계를 섬세한 문체로 점검해나가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정치적 자유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자유의 표현에 기초한 새로운 언어의 탐색에서 배수아 문학의 요체를 간파한 후자는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경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배수아의 외출은 리얼리즘만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도 감행되고 있음을 명쾌히 지적함으로써 배수아의 급진성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물론 이처럼 간명한 파악이 지닌 문제점이 없지는 않으나 배수아 속에서 길을 잃은 평론들이 적지 않음을 염두에 둘 때, 본질을 꿰뚫을 줄 아는 눈매야말로 비평가의 미덕이다. 다만 시야가 제한된 게 문제다. 배수아의 앞과 뒤, 그리고 옆이 부재한다. 더구나 해석만 있지 비판이 없다. 분석과 평가가 결합될 때 비평이 완성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두 글을 놓고 머뭇거렸지만, 이론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이 텍스트와 씨름하여 치밀한 문체로 독자적 논리를 구축할 줄 아는 후자의 가능성을 더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삼기로 하였다. 축하한다.

최원식 

 

 

 

평론 | 당선소감

 

한 세계를 만나는 방법이 하나의 길로 수렴될 수 없는 이유는 각자가 서 있는 곳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 걸음걸이의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발소리의 낌새는 함께 몸을 이끌고 걸어가는 사람들과의 보조 속에서만 애면글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낌새를 감지하고 말을 건네는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한 문장, 한 문단,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 하여 수상 ‘이후’의 시점에서 지금까지 글쓰기의 ‘조건들’을 다시 돌보며, ‘이후’의 걸음걸이(들)에 대해 고민해본다. 이 지면(紙面)이 하나의 단단한 지면(地面)과 다르지 않기에, 여태까지 쉽게 사라지는 연약한 말들을 무사히 안착시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응대하고 땅을 내어주었던 선배들의 고된 전통과 역사가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삶-연구-글쓰기의 인터페이스를 실험하며, ‘부대낌의 현장성’의 온도를 체감시켜주신 권명아 선생님과 ‘aff-com’의 선배들 그리고 홀로 발화된 말이 지치지 않게 서로의 말과 글의 온도를 밝혀주는 ‘웹진;아지트’의 선배, 동료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모두가 평등한 발화주체로 설 수 있다는 것, 서로의 발화가 존재들의 어떤 소중함을 가리키는지를 다시금 곱씹어본다. 한 개인의 아름다움은 대인・대물관계에 있어 그의 ‘태도’, 어떤 윤리적 일관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배웠다. 쉽게 냉소하지 않고 사람의 무늬를 바탕 삼아 어울려 공부할 수 있는 현명함을 주문하신 김영민 선생님과 ‘시독(時讀)’, ‘장주학숙’의 언니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함께-있음에 대한 현장들 속에서 전공성은 크게 발휘하지 못하였고 선배들의 ‘비평’을 통해 ‘문학’ 주변을 바장였다. 그만큼 ‘문학’을 읽고 쓴다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질감을 느껴온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문학청년의 감수성처럼 문학 자체에 대한 애정이 내겐 어떤 식의 강박을 낳기도 했다. 그 시간을 함께하며 비평과 문학 ‘사이’를 생활 속으로 내려앉혀 끊임없이 ‘셋’의 자리에서 말을 걸어준 김대성 선배에게 이번 글쓰기의 기쁨을 온전히 전하고 싶다. 그리고 부족한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해주신 최원식 선생님의 비평을 잊지 않으며 ‘이후’의 태도에 정진하겠다.

김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