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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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李起哲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유리의 나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등이 있다. poetone@chollian.net

 

 

 

약대를 몰고 가을로

 

 

우는 내가 울지 않는 약대를 몰고 가을로 간다

작은 슬픔을 나는 울고 큰 슬픔을 약대는 참는다

가을이면 성경책처럼 경건해지는 내 곁에 가을꽃들은 피어

한 해의 마지막 언어들을 쌀알처럼 쏟아놓는다

가을꽃들이 차려놓은 난전 속으로 나는 소멸처럼 작게 걸어간다

내 몰던 약대는 어디 갔느냐, 나 혼자는 이 가을을 견딜 수 없구나

무더기무더기 탕진이 즐거운 가을꽃들의 청루를 나 혼자는 그냥 지나갈 수 없구나

 

어떤 태형으로도 붉어지지 않는 저 홍염들을

운문산이 저 혼자 가질까 봐

오늘은 산기슭 싸리나무 곁에 보름살이 셋방을 든다

셋방마다 걸려 있는 추억의 진열장들

기쁨 한 움큼 슬픔 한 광주리

 

 

나는 산길에 놓쳐버린 소년을 불러와 시를 쓰고 싶었다

경운기에 빼앗긴 송아지 울음을 데려와 시를 쓰고 싶었다

내 열까지 세기도 어려웠던 때의

못물에 띄운 수제비를 헤아려 시를 쓰고 싶었다

아카시아잎 따며 가위바위보하던 소녀는

세월에 묻혀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정직하게 살고 싶어서 시를 택했다

눈물겹고 애린 것 많아서 시를 썼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정겹고 안쓰러워

내가 만든 손수건만한 시에 그것 이름 담았다

 

그 많은 실험시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그 높은 운동시에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한두가지 문학상도 받았지만

지금은 그 상이 오히려 황송하다

할 수만 있으면 반납하고 싶다

 

지나온 언덕마다 꽃이 피었더냐고

돌아보아 물을 사람 어디에도 없다

피는 꽃은 계절의 숨소리라고

남몰래 일기장에 써넣던 시절의 은싸라기 눈물

 

이제 조그만 시인이 되어

약대를 몰고 가는 이 가을

풀잎에 맺힌 이슬의 말을 모아

비둘기 울음 같은 시를 쓰는 황혼녘

 

 

 

어린 벗에게

길을 따라 아이는 가고 세월 따라 아이는 어른이 된다

 

아이야, 너의 복사꽃 맨발도 돌 지나면 신발을 신어야 한다

땅은 울퉁불퉁하고 고개는 가파르고 물은 빨리 흐른단다

너는 어느 하나에도 익숙지 않을 것이니

우선 너의 몸을 발 위에 얹고 꼿꼿이 서서 걷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길에는 웅덩이가 있고 낭떠러지가 있고 자동차가 달리고

신호등이 명멸한다

그것을 익히는 데 너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네 앞에 보이는 사물들의 이름, 숟가락 양말 신발 연필 공책 컴퓨터 학교 나무 꽃 창 하늘 바람 새 나비의 이름 익히기에도 너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것들 이름 다 부르고 나면 너는 어언 소년이 되어 너의 어깨에는 무거운 책가방이 메어질 것이다

 

소년이 된 아이야, 가다가 길섶에 핀 복사꽃에 마음 홀리지 말아라

색은 현란한 것, 색을 탐하면 너의 길은 굽이칠 것이니

새가 날아간 하늘을 쳐다보면서 새처럼 날아오르려 해서는 안된다

걸어서 가는 길이 너의 발을 아프게 할지라도 걷는 길이 너의 삶이니

그 끝에 스물이 기다리고 서른이 기다릴 것이니

 

아이야, 또 나는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구나

너도 제비를 보면 하늘을 날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희망이라는 말을 손바닥에 쓰면서 가슴 두근거릴 때가 있을 것이다

산은 바라보는 것이지 옮기는 것이 아님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네가 앉았던 자리에 풀이 돋고 꽃이 피었음을

또 그 자리에 가을이 조락을 데리고 옴을 알고 눈물지을 때가 있을 것이다

 

아, 너는 진달래꽃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는 Ash Wednesday를 읽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거대한 뿌리를 읽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싸이버스페이스의 어두운 책상에서 네 청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경마장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CGV에 가서 하염없는 허상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술의 달콤함 연애의 현훈에 탐닉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이야, 너는 본래 풋순을 닮았으나, 너는 나비처럼 연하고 동풍처럼 부드러웠으나 아랫도리를 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과 불화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불운이 너를 휩싸고 돌지 너는 모를 것이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형극임을 아무도 너에게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가르친다 해도 너는 추상으로 들을 것이다

모든 달콤함 속에는 독배가 모든 노래 속에는 비애가 모든 향기 속에는 아편이 들어 있음을

알 때쯤에는 너의 이마에는 주름이 늘고 너의 턱에는 드문드문 수염이 자랄 것이다

돈의 유혹 지위의 손짓 이름의 현혹에 너는 몸을 떨 것이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그처럼 멀고 험난함을 너는 비로소 알 것이다

 

사랑스런 송아지가 검은 황소가 되듯 너의 손은 거칠어지고 너의 발에는 굳은살이 박힐 것이다

불러도 사랑은 오지 않고 다가가도 연애는 멀어질 것이다

책 속에 있던 길은 사라지고 책 밖으로 나온 삶이 거기에 있음을 알 때

너는 벌써 중년이 될 것이다

아이야, 나는 슬픈 어조로 너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구나

그것이 생임을 그것이 네가 가꾸어야 할 꿈임을 굽이 많은 길이 네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내 이리도 수다하게 말했구나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