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이제니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funnypen@hanmail.net
사몽의 숲으로
여기 누군가 두고 간 바둑판이 하나 있다
흰돌 검은돌 흰돌 검은돌
흰돌 흰돌 흰돌 검은돌 검은돌 검은돌
검고 흰 들판이라 불러도 좋겠지
명백함에 대한 명백함은 명백함의 명백함을 넘어서지 않는다
꼭 그만큼의 명백함에 대해
꼭 그만큼의 암묵적 동의에 대해
거짓을 말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도의를 도리를
저버리지 말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숲은 격앙의 진원지
진심을 다해 전하고 싶은
무엇을
그것을
그리하여 우리의 사몽
우리의 사몽은 어제의 기억처럼 늘어서 있지
양탄자와 구두 단추
빗자루와 빗자루와 빗자루와 빗
자루와 빗자루
빗자루에 집착하는 마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 오래된 약속이 하나 있다
잊으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잊지 말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더이상 울지 말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진홍의 붉은 불그레한 누군가의 식도 언저리를 지나는
초록의 검은 빛나는 이끼 이끼 이끼 웃자란 이끼들
웃자란 찌꺼기들 내뱉지 못한 찌꺼기들에 대해
목소리의 색깔을 식별하라는 목소리가 하나 있다
식별할 수만 있다면
식별할 수도 있을까
그리하여 사몽은 오늘도 빗자루질을 한다
사몽 사몽은 낙엽을 쓸고 쓸고 또 쓴다
서투른 문법으로 빗자루질을 한다 한다 한다
그러나 사몽은 긴머리 긴머리보다 더 긴머리
나뭇잎은 계속 계속 떨어지지 쓸고 쓸어도 쌓여만 가지
말할 수 없이 긴 머리로
사몽은 나아가고 사몽은 되돌아오고
이 끝없는 공허의 숲의 적막의 둔덕의 언덕에 앉아
둥글게 퍼져나가는 구름의 빗자루질을 낙엽의 빗자루질을
공원의 두이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라면 굳이 떠날 필요가 있을까. 공원은 자란다. 무럭무럭 자란다. 공원 밖은 공원 공원 밖은 공원 공원 밖은 공원. 언제부터 우린 이곳에 갇혀 있었던 걸까. 너무 넓어 갇힌 줄도 모르겠구나.
눈을 감으면 슬픈 노래처럼 두이의 목소리가 어른거린다. 두이, 내 검은 망막의 스크린 위에서 뛰노는 진회색의 작은 털뭉치, 오래전 잃어버린 갈색의 책,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어두운 다락방. 떠나기 전 두이는 소심하게 몇번 공중제비를 돌았다. 두 귀를 날개처럼 펄럭이면서. 마지막이라는 신호로. 나는 작고 진실하고 잘 우는 것들에만 귀가 열린다. 우린 너무 가까워 들리지 않는 귓속말 같구나.
비밀의 서랍 같은 얼굴로 라일락이 돋아난 얼굴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두이의 벤치에서 두이가 바라봤던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이란 결국 두 개의 의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일. 이 의자에서 저 의자로, 저 의자에서 이 의자로. 네 목소리 위에 내 목소리를, 내 목소리 위에 네 목소리를 덧입혀보는 일.
이제 남은 일은 말하지 못한 말들을 삼키거나 뜻 없는 문장들의 뜻 없는 의미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일뿐. 공원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하염없이 걸으면서. 울적하고 피로한 제자리걸음으로. 공원 밖은 공원 공원 밖은 공원 공원 밖은 공원. 무럭무럭 지상의 공원들이 자라나는 밤. 닿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