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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저렇게 불안은 익어가고

여태천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안지영 安智榮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름 없는 부재를 향한 노래정한아, 심보선, 이이체의 시를 중심으로」 등이 있음. sunshinemaru@hotmail.com

 

 

2031여태천(余泰天)은 줄곧 불안이라는 문제를 천착해왔다. 첫번째 시집 『국외자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에서부터 그는 일상화된 도시적 삶의 불안을 고통스럽게 응시하며 그것에 자신의 내면을 침식당하지 않기 위해 ‘바깥’을 모색하는 외부자의 시선을 보여주었다. 이후 『스윙』(민음사 2008)에서 불안을 날려버리는 우아한 ‘스윙’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민음사 2013)에 이르러서는 불안을 ‘파란’ 오렌지처럼 숙성이 필요한 과일 같은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방법적 불안’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데까르뜨가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인식을 제거하고 확실한 인식만 확보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를 택했다면, 여태천은 세계의 불확실함을 일깨우기 위해 방법적 불안을 실험한다. 그에게 불안은 이 세계의 실체 혹은 내막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며 그럼에도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된다. 그런 점에서 불안은 세계의 불확실성뿐 아니라 주체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불안은 언제나 낯설고 날선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그는 매번 좌절을 경험한다. “한 문장에서 한 문장으로 건너가는 죽음”(「번역」)으로 인해, 타자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문장도 완성할 수 없는”(「여자의 바깥」) 현실 속에서, 그는 “당신이 말한 것들보다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연연”(「잃어버린 우산」)한다. 여태천에게 소통이란 항상 타인의 ‘바깥’을 맴돌며 번역이 불가능한 ‘당신’이라는 유령의 문장을 ‘번역’하고자 시도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번역 불가능성에 부딪히면서도 ‘당신의 끝’에 닿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가 “마침표처럼/혼자”(「보이저 1호가 힐리어포즈를 넘어가는 저녁」)임을 깨달으면서도 “기약하지 않은 곳에서/간신히 날아온 기별”처럼 찾아올 ‘우리’를 기다리는 것도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우리로부터 우리에게」).

이번 시집에서도 ‘우리’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우리’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가 “선만 그어도 금방 남남”인 사이가 되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아홉 번째 독서」). 그럼에도 그가 ‘우리’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아이’라는 새로운 주체의 언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시집의 표제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를 보자. 여기서 그는 파란 오렌지처럼 설익은 “아이의 말”을 발견한다. 처음에 “아이의 말”은 너무나 아득하여 무서운 것으로 여겨진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의 언어는 이 세계와 마찬가지로 불확실성을 지닌 미지(未知)의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가 내딛는 발자국마다/파란 오렌지가 시도록 눈이 부”시다며 오히려 이를 긍정하기에 이른다. 어른이 파란 오렌지에 대해 회의하고 의심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때”(「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여덟 번째 독서」), 아이는 “아직 읽지 않은 긴 문장의 색깔처럼” 파란 오렌지에 대해 ‘재잘거림’으로써 어두운 복도마저 “눈이 부”시게 만드는 역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방법적 불안은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세계의 불확실성을 일깨움으로써 실존의 확실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불안은 이제 한낱 ‘재잘거림’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에 대해 재잘거리는 행위를 통해 불안은 더이상 불안이기를 그친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아무리 고통스러운 감정도 우리가 그것을 묘사하는 순간, 고통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여태천이 “아이의 말”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이는 “새로 태어나는 단어 앞에서/자꾸만 흔들리”면서도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가지를 뻗듯 사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재잘거림’을 멈추지 않는다(「대화」). 만일 이러한 재잘거림을 통해 방법적 불안이 아니고서도 주체가 실존의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환한 순간이 온다면 그토록 기다리던 ‘우리’가 ‘우리’에게로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순간이 오기까지 그는 “어떤 물에도 녹지 않는 오래된 환약(丸藥)(「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3」) 같은 슬픔을 앓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이제 그는 “당신과 이별”하기 위해,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백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만큼 사라짐에 대해 여유있는 자세를 보여준다(「유성(流)」). 그리하여 이별 때문에 불안에 떨지 모를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이 건네지기도 한다. 완전한 이별이 찾아오지 않은 동안에는 “시간은 시간대로/감정은 감정대로/글씨는 글씨대로/괜찮은 거다/모두가 괜찮은 거다.”(「마지막 목소리」) 이번 시집에서는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우리’에 대한 탐색이 다음 시집에서 어떠한 풍경으로 펼쳐질까. 힐리어포즈를 넘어가는 보이저 1호처럼 그는 저 미지의 ‘우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