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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길들여진 공포’를 보았다
조갑상 장편소설 『밤의 눈』
오창은 吳昶銀
문학평론가. 평론집 『비평의 모험』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가 있음.
longcau@hanmail.net
공포는 미래의 선택을 부식(腐蝕)시킨다. 물리적 강제력 때문이 아니더라도, 공포가 반복되면 삶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는 레드콤플렉스, 국가보안법, 불고지죄, 연좌제 등이 그 사례다.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는 것, 이것이 공포가 만들어낸 선택적 방어기제다. 최악을 상상하며, 미래의 가능한 선택을 최소화하는 것이야말로 정신의 비극이다.
조갑상(曺甲相)의 『밤의 눈』(산지니 2012)은 보도연맹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보도연맹사건은 국민방위군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기에 발생한 가장 처절하면서도 비극적인 국가폭력이다.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비전투지역에서 비무장한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20만명이나 학살당했다. 보도연맹사건은 1996년에야 비로소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었으니, 46년 동안 진상규명작업이 금기시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국민방위군사건의 경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귀환장정」(1951)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 비극적 참상을 즉각적으로 소설화했다. 하지만 보도연맹사건은 이창동(李滄東)의 「소지」(1985)가 발표될 때까지 근 35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조갑상이 『밤의 눈』에서 이 사건을 장편소설로 형상화한 것은 소설가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단편소설 「사라진 하늘」(1990)과 「어느 불편한 제사에 대한 대화록」(2009)에서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한 갈등을 형상화한 적이 있다.
나는 『밤의 눈』에서 ‘길들여진 공포’를 보았다. 주요인물인 한용범은 ‘동물화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당한 비극적 인물이다. 해방기에 그는 양심적인 지식인이었고, 지역사회의 안위를 걱정하는 공적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의 반복되는 ‘소환과 감시’로 인해 자동반응적으로 ‘기호 1번 여당 후보’에게만 ‘붓뚜껑’을 누르게 되었다. 그는 집단적 공포의 기억에 사로잡혀 가능한 선택을 최소화하도록 길들여졌다. 소설의 전체 서사에서는 비껴서 있으면서도 소설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옥구열 역시 ‘길들여진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는 피학살자 유족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수십년 동안 공안당국의 ‘표적’이 되었다. 옥구열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표출할 수 없었다. 단지 기억하고 견뎌내려 할 뿐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시민이면 되었다.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할 말을 하는 국민이고 싶었다”고 절규했다. 한용범과 옥구열처럼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굴종의 시간’을 이 소설은 추적하고 있다.
소설은 1950년의 대진읍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룬 대목에 이르러 압도적인 힘을 발산한다. 한국전쟁기의 서사적 흐름은 빠른 물살을 이루며 숨가쁘게 굽이친다. 개인의 의지 바깥에서 엄습해오는 운명의 사슬이 소설의 두께를 잊게 할 정도다. 작가는 ‘대진읍’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 피의 축제와 거리를 두려 했다. 나는 그 사건의 구체적 장소가 ‘진영읍’(경남 김해시)이라고 적시하고 싶다. 소설 속 한시명 선생과 남상택 목사는 고(故) 김영명(金永明) 선생과 고 김정태(金廷泰) 선생이며, 학살의 주재자인 지서주임 이주호와 청년방위대장 김기환 등은 진영읍의 지서주임 김병희(金炳喜)와 청년방위대장 하계백(河啓伯) 등을 염두에 둔 형상화다.
어떤 이들은 『밤의 눈』이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에 소설적 성취가 미흡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의 서사가 역사적 사실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기에 ‘우리시대에 돋을새김된 역작’이라고 말하겠다. 또다른 이들은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야 할 과거 사건’을 소설화했기에 『밤의 눈』이 불편하다고 한다. 나는 이 소설이 ‘잊어서는 안될 공동체의 기억을 복원’하고 있기에 귀한 문화적 소통의 사례라고 말하겠다. 『밤의 눈』은 역사적 사실을 강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작중 인물의 내면에 가닿으려는 작가의식이 투영된 작품이다.
소설은 르뽀와 다르고, 역사적 기록과도 다르다. 소설은 잊혀진 공동의 기억을 이성적 논리로가 아니라, 감성적 공감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에스빠냐 출신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고 했다. 이 말은 한국사회의 아픈 역사와 결합하여 광주의 ‘5·18 기록관’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로 새겨져 있다. 잊지 않는 것 자체도 진실을 향한 치열한 투쟁이다. 나는 『밤의 눈』이 ‘공동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견딤의 미학’으로 직조된 의미있는 성취작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