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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인간희극

권여선 소설집 『비자나무 숲』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계명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저서로 『근대의 불안과 모더니즘』 『비평극장의 유령들』 『비평의 우울』 등이 있음. youngcritic@kmu.ac.kr

 

 

2031권여선(權汝宣) 소설의 일관된 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억이다. 저 스스로 잊었거나 묻어버렸던 과거의 조각이 뜻하지 않은 시간, 엉뚱한 장소에서 수면에 떠오르고, 오래전 심상히 지나쳤던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오늘 돌연 인물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과거의 자기가 현재의 자기에게 무심결에 부친 편지는, 오랜 시간 먼 곳을 돌고 돌아 결국은 기억의 이름으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불현듯 ‘나’는 깨닫는다. 그 편지는 ‘나’의 것이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진짜 진짜 좋아해」)

그런 까닭에(겉보기엔 혹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권여선의 대개의 소설은 본질적으로 후일담이다. 그것은 그녀의 소설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기 때문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저 우연한 과거의 조각들에 의해 균열되고 몸서리치는 현재의 표정을 예민하게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 기억 못 하는 ‘나’의 어제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고 또 그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이 다시 오늘의 ‘나’를 뒤흔든다. 그러니 권여선의 인물들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나’의 어제는 ‘나’가 알지 못한 ‘나’ 안의 타자다. 권여선의 인물들을 문득 사로잡는 느닷없는 분노와 죄의식, 수치(羞恥)와 자학, 쓰라린 쾌와 달콤한 불쾌 같은 기이한 정념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분출한다. 멀리 의식 뒤편으로 던져버렸으나 결국은 돌아와 목적지에 도착하는 저 실패한 기억의 복수, 이것이 권여선식 기억의 현상학이다.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 2013)의 세계 또한 이에서 멀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 권여선의 세계는 한 걸음 더 자신의 보폭을 넓혀놓았다. 어떻게? 작가에게 익숙한 지식인 커뮤니티의 풍경에서 저자바닥 장삼이사의 닳고 자질구레한 의식의 행태로, ‘나’를 상처 내는 실패한 기억의 현상학에서 저들 스스로의 삶을 관장하는 실패한 행위와 자기기만의 생태학으로. 『비자나무 숲』에서, 저들의 삶은 과연 하나같이 실패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과거를 되짚어보기도 하지만, 안다고 한들 그것은 교정할 수 있는 것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그 실패의 몫을 짊어지면서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진짜 진짜 좋아해」의 ‘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의도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었다.”

단 한번 ‘길모퉁이’를 잘못 돌아 다단계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빚만 짊어지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길모퉁이」의 ‘나’가 깨닫는 것도 그런 것이다. 너무 멀리 왔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재생이라니, 그건 간단한 만큼 불가능한 개소리였다.”(「길모퉁이」) 어렵사리 직장을 얻었지만 속절없이 속물로 늙어가는 지방대 여교수 양숙현도 그에 동조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 먼 길을 달려와 미술관에 가려다 전당포로 잘못 들어오고 만 느낌이 들었다.”(「꽃잎 속 응달」) 그들은 잘못 들어섰다. 하지만 애초 잘못 들어설 수밖에 없는 길, 속절없이 쓰라린 실패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이다. 그들도 전혀 모를 리 없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애초부터 그곳은 전당포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꽃잎 속 응달」) 그래서 저들은 애초 가려고 한 ‘비자나무 숲’에 끝내 가지 못하고(「비자나무 숲」), 남자친구가 붙잡아온 여자애를 이용해 사채를 청산하려다 일이 꼬여 뜻하지 않게 살인공범이 되어버린다(「소녀의 기도」). 악에 받친 그녀라면 마침내 이렇게도 외쳐볼 터. “다 저 새끼 탓이었다.”(「소녀의 기도」)

하지만 정말 “다 저 새끼 탓”일까? 그렇지 않다. 권여선의 소설은 이 실패의 책임은 다름 아닌 저 자신의 ‘오인(誤認)’에 있음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그(녀)들은 자기를 알지 못한다. ‘나’는 ‘나’ 안의 ‘나’를 외면했고, ‘너’ 안의 ‘너’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나’로 인해 실패하고, ‘너’와의 관계에서도 실패한다. 소설집 『비자나무 숲』 전체에서 권여선이 펼쳐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오인의 심리지도다. 예컨대 「은반지」에서, 심여사에게 베풀었던 ‘나’의 친절은 황당하게도 심여사의 지독한 악다구니로 보답받는다. ‘나’ 안의 ‘나’를, ‘너’ 안의 ‘너’를 외면했던 결과다. 권여선의 소설에서 그녀들은 모두 그렇게 오인하고, 오해한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결과는 시간이 흐른 뒤에 불쑥 출몰해 그녀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 뒤에 오는 것은 오로지, 속수무책일 뿐이다. 그리고 속수무책을 봉합하는 자기기만이라는 또 하나의 오인이 있을 뿐. “그렇다.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그분께서 이런 시련을 통해 그녀에게 이런 소명을 주신 것이다.”(「소녀의 기도」)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은 이 실패와 오인의 숲이다. 이 소설집의 여기저기에 작가가 숨겨놓은 저 오인의 쓰라리고 달콤한 비밀을 여기서 구구절절 파헤치는 것은 삼가기로 한다. 그것은 그 비밀을 하나하나 스스로 찾아내며 즐거워할 독자에 대한 도리도 아니고, 제한된 지면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다만 끝으로, 이것 하나만은 말해둔다. 권여선의 소설은 이로써 비로소, 남과 ‘나’를 기만하고 오해하고 실패하며 또 그렇게 비루와 자질구레를 살아가는 속물들에 대한 권여선식 ‘인간희극’의 공연에 어느새 한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