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문학사적 감각과 미학적 모험의 결속

남진우 평론집 『나사로의 시학』 『폐허에서 꿈꾸다』

 

 

유성호 柳成浩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근대시의 모더니티와 종교적 상상력』 『침묵의 파문』 등이 있음. annieeun@hanmail.net

 

 

2031남진우(南眞祐) 비평은, 적어도 우리 세대에게는, 그 선구성과 지속성과 균질성에서 압도적 풍경으로 들어서 있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평론집 두권은, 이러한 남진우 비평의 고유한 특성을 충실하게 잇는 것이면서도 텍스트 범주나 그 해석 과정에서 일대 광정(匡正)을 보여준 결실로 보인다. 가령 비평이 텍스트 혹은 문학 현상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기초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남진우 비평의 해석적 촉수는 여전히 섬세하고 정확하고 풍요롭다. 다른 한편으로 비평이 텍스트에서 받은 주관적 매혹에 비평가의 자의식을 반영시켜 비평적 자아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남진우 비평은 실존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미학적 모험가로서의 속성을 첨예하게 띤다. 두권의 평론집(『나사로의 시학』 『폐허에서 꿈꾸다』, 문학동네 2013. 이하 『나사로』, 『폐허』로 약칭)은 각각 동시대 혹은 문학사를 빛내고 있는 시와 소설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 저작들을 통해 비평의 목표가 텍스트의 창조적 차원을 적시하고 문학을 둘러싼 반성적 의식을 제시하는 데 있다는 점에 새삼 상도(相到)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키치적 감수성이 쌓아놓은 수사적 성채를 넘어, 논쟁 과잉의 척박하고 폭력적인 담론적 늪을 지나, 시선의 날카로움과 문장의 세련 그리고 문학사적 감각과 미학적 모험이 조화롭게 통합된 비평적 진경을 목도하게 된다.

『나사로』와 『폐허』의 구성은, 독립 비평의 속성을 띠고 있는 서문들에 잘 집약되어 있다. 먼저 『나사로』에서 남진우는 예수의 지극한 애정으로 부활한 ‘나사로’ 상징을 빌려 “그에겐 예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전해야 할/전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한다. 그동안 바울이나 요한, 더러는 막달라 마리아 등에 주목했던 한국문학의 성서적 상징은 남진우 비평으로 하여 ‘나사로’까지 넓혀진다. 이때 나사로는 “내면의 공동”을 응시하는 자로서 이 세상과 저세상을 넘나드는, 고통과 희열과 비의로 가득한 언어를 매만지는 시인의 운명을 가졌다. 각론에서 살핀 시적 언어들 역시 낙원 저편에서 펼쳐지는 나사로의 언어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가장 이색적인 아티클에서 김남주(金南柱) 시편을 통해 “언어의 명료성과 윤리적 성실성이 만나 이루어진, 우리 시사에서 만나기 힘든 희귀한 정신의 결정체”를 바라보기도 하고, 김용택(金龍澤) 시편에서 “우리가 망각해버린 리듬과 멜로디를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음악”을 발견하기도 한다. 민중적 유토피아의 성채를 쌓아간 동시대 시인들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그들을 새로운 나사로로 수렴해 들이는 비평적 균형을 보여준다. 더불어 윤동주(尹東柱) 시편을 통해 그의 ‘향암성(向暗性)의 상상력’을 풀어가거나 전봉건(全鳳健) 시의 시사적 위상을 밝혀간 노작들은 그동안 알려진 그들 시세계에 커다란 독법의 확장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폐허』에서는 한국소설의 세 충동과 지향을 분석하고 있다. 한때 가장 열정적인 기획이었지만 지금은 노스탤지어로 물든 유토피아 지향, 우리 시대의 묘혈과 암실과 골목과 황무지로서의 묵시록적 징후들을 보여준 디스토피아 충동, 그리고 상호이질적인 것들의 불가피한 병립과 공존을 보여주는 헤테로토피아 지향의 소설들이 그것이다. 시원과 귀향의 이야기인 이청준(李淸俊) 소설을 비롯하여, 박완서(朴婉緖) 최인호(崔仁浩) 황석영(黃晳暎) 등의 유토피아 서사를 정치하게 내다보고, 천운영(千雲寧)이나 편혜영(片惠英) 황정은(黃貞殷) 등의 헤테로토피아 징후로 시선을 옮겨가는 그의 시선과 필치는 그를 잘 알려진 ‘시 비평가’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특별히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복수의 세계, 존재의 시원도 역사의 완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새로운 상상력으로 펼쳐가는 작가들에 주목한다. 물론 본인은 정작 헤테로토피아 지향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의 성실하고 지속적인 동시대 서사 검토의 열정은 젊은 작가들의 ‘육체’와 ‘잔혹’과 ‘작은 주체’와 ‘환상’과 ‘미로’의 서사를 섬세하게 탐사하게끔 하였다. 남진우 비평의 진화에 시대의 추이와 접점에 대한 관찰이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남진우 비평은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자유로이 오가는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을 통해 발원하고 완성된다. 하여 논증이 필요한 대목에서 수사로 시종한다든가, 수사에 갇혀 논증의 명석성이 방해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비평이 예술과 과학의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자기 고유의 문체와 세계관, 무의식까지 반영하는 창의적 원()텍스트로 자신의 비평을 밀고 나간다. 보들레르는 비평을 과학이 아니라 예술적 협력이라 했고, 아나똘 프랑스는 비평을 비평가의 영혼이 걸작 속에서 어떤 모험을 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했다. 그 점에서 남진우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외경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협력이고, 텍스트의 여러 심층을 향한 미학적 모험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문학사적 감각과 미학적 모험을 결속한 그는, 이제 더이상 심미적 비평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공동체, 역사와 순간, 운명과 의지의 길항에 대한 비평적 편폭과 세목이 온전한 균형으로 그의 언어 안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