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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주은 『기획된 가족』, 서해문집 2013
‘수퍼우먼’ 맞벌이 엄마들의 가족전략
황정미 黃晶美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jmhwang12@gmail.com
한국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누군가에게 가족은 누적된 과거의 저장소이자 자신을 만들어준 뿌리로 기억될 것이다. 명절 때면 고속도로에 펼쳐지는 긴 행렬, 부모님 방문, 제사와 성묘 등은 가족의 의미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의례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가족을 친밀한 관계를 통해 험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언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압축성장에 이어서 신자유주의적 속도경제를 헤쳐나가고 있는 한국인에게 가족은 훨씬 역동적이고 다양한 각본들로 점철된다. 사랑 때문에 결혼했으나 돈 때문에 헤어지기도 하고, 가족이라는 장막 뒤에서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기도 하며, 소통은 사라진 채 피곤하고 지친 투명인간들이 잠시 머물러가는 숙소가 되기도 한다. 『기획된 가족』은 ‘화이트칼라 맞벌이 가족’이라는 또 하나의 가족 각본을 ‘전일제 노동자이자 어머니’인 여성의 시선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의 부제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요약한다. 맞벌이 화이트칼라 여성들은 어떻게 중산층을 기획하는가? 연이은 경제위기로 중산층의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중산층을 기획’하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는 이 여성들은 누구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저자와 이들의 만남은 첫장의 제목처럼 ‘쫓기는 여자, 바쁜 그녀’ 이야기로 시작된다. 직장생활과 자녀 돌봄이라는 전혀 다른 시간구조를 갖는 두가지 일을 해내기 위해 한정된 24시간을 쪼개고 이어붙이는 이 여성들의 압축적 시간경험을 저자는 섬세하고도 분석적인 시선으로 관찰한다. 전작인 『현대 가족 이야기』(이가서 2004)에서 보여준 뛰어난 분석과 명쾌한 글쓰기를 이 책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사실 가족의 일상생활을 분석한다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누구나 겪는 일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각을 적용하기도, 사소한 경험들로부터 일정한 흐름을 포착하여 어떤 일반화된 주장을 펼치기도 쉽지 않다. 이 책의 장점은 소소한 일상생활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하면서도 나름의 체계적·분석적 발견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이 가리고 있던 때로는 아이러니한 삶의 단면을 발견하게 해주기도 한다. 예컨대 주5일근무제가 여성 근로자의 삶도 여유롭게 해주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평일에는 근무 부담이 증가한 데다 주말에는 오히려 자녀교육을 ‘기획’하느라 더욱 바빠졌다고 한다. ‘신붓감 1순위’로 꼽히는 교사가 실상은 다른 직업의 여성들보다 더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오후 4시에 ‘칼퇴근’하는 중등교사는 누구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 것 같지만, 퇴근이 빠르다는 이유로 따로 도우미나 다른 가족의 도움을 받지 못하다 보니 돌봄과 가사노동을 혼자서 감당하느라 더 피곤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이처럼 과중하고 힘든 수고를 감내할 뿐 아니라 스스로 가족을 ‘기획’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 갈등과 불화가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자의 말대로 맞벌이 가족은 ‘성평등에 가장 가깝게 다갈 수 있는 조건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가사노동은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고, 여성들은 그러한 불평등에 갈등하고 저항하기보다 현재의 안정적인 가족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시간압축적인 노동을 감당하고 남편의 가장(家長)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저자는 ‘기획된 가족’이 여성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사회적 제도와 공모(共謀)하고 있고, 이에 따르는 보수적 가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정적 고수입을 확보한 능력있는 여성들이 그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부과하는 가족전략의 기획자를 자임하는 아이러니의 사회적 기반을 좀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양육기의 압축적 시간경험이 이러한 현상의 횡적 단면을 보여준다면, 생애주기라는 종적 시간에 대한 전망이 여기에 결합되어 있다. 중산층 맞벌이 가족의 기획은 일차적으로 부부가 확보한 경제적 자원과 친족 자원을 최적화하여, 조부모-부모-자녀를 연결하는 이른바 3대 협력체계를 통해 자녀를 키우고 중산층 가족을 재생산하는 전략이다. 이것은 매우 사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선택을 유인하는 사회적 제도와 체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복지정책은 노동시장의 상층부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에게 복지혜택을 집중적으로 제공한다. 육아휴직이나 안정적 연금이란 비정규직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기획된 가족’은 부부가 모두 안정된 정규직을 확보함으로써 한국형 복지정책에 최적화된 가족이 되도록 하는 전략이다. 자녀 양육기에 집중되는 여성의 과도한 부담은 그 성공에 대한 사회적 칭찬과 정규직 남편의 연금을 확보하는 은퇴기의 여유로운 생활로 보상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획된 가족을 위협하는 최대의 요인은 (저자가 여기저기에서 언급하는 불륜의 욕망이라기보다는) 남편의 경제적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모성이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지 않는 점도 눈에 띈다. 기존 연구들에 따르면, 한국 고학력 여성 중 많은 이들이 노동시장의 높은 문턱이나 성차별로 인해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이들은 무엇보다도 중산층 가족전략의 핵심인 자녀교육의 성공을 위해 기획자로서의 어머니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입시전략 짜기와 스펙 쌓기, 사교육에 관한 정보 수집과 바쁜 자녀의 일정관리 등은 중산층 어머니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전업주부와 화이트칼라 어머니의 모성 수행이나 ‘기획자’로서의 역할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들의 기획은 똑같은 중산층 가족 만들기 전략으로 수렴되고 있는가? 혹은 사회생활을 경험한 어머니들은 자녀의 미래를 다르게 전망하고 좀더 성찰적인 기획을 모색하고 있는가? 저자는 화이트칼라 어머니들의 경험을 해석하기 위한 준거로 전업주부의 사례도 소개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 질문에 대한 뚜렷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화이트칼라 여성들이 자녀교육에 대한 투자를 중요시하지만, 자녀의 시간 대부분을 사교육으로 채워넣는 것을 ‘비합리적 투자’로 생각한다는 대목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기획된 가족’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이며, 이러한 가족전략은 지속 가능한가이다. 이 질문은 맞벌이 여성들의 압축적인 시간경험에 집중하고 있는 저자의도에서는 다소 벗어난 것일 수 있지만, 여전히 모든 독자들의 관심사가 됨직한 것이다. 자녀 돌봄을 위해 최적화된 가족주의적 전략은 자녀가 자라서 30대까지 연장된 후기 청년기를 거치며 경쟁사회로 진입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이들을 뒷바라지할 수 있을까? 또 지금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얻고 맞벌이 부부가 되어 바쁜 시간을 쪼개가면서 자녀를 키우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여성들은 자신의 경력과 더불어 자녀 돌봄을 기획하면서 시간에 쫓기는 삶을 계속 감내할 것인가?
‘기획된 가족’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인 동시에 그러한 선택을 유인하는 사회적 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가족의 기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획과 그러한 선택을 일정하게 유인하거나 제한하는 국가정책의 기획이 적절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개인의 근로소득이라는 경제적 자원을 최대화하면서 사적인 가족 돌봄을 결합하는 가족주의 전략의 힘은 갈수록 약해지는 것 같다. 점차 늘고 있는 비혼, 만혼 인구와 세계 최저 수준의 낮은 출산율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성공한 중산층의 가족주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실패자로 만들고 ‘대안적 기획’의 기회를 차단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돌봄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제도화하는 동시에, 돌봄에서 면제된 남성전일제 노동자 기준의 사회제도 전반을 다시금 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그러한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