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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불온한 미(美)와 다른 현실
정한아 김성규 서대경의 시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여기 네가 있다: 공감각(共感覺)의 정치학」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공감각, 타자의 현실에 머물기
시인이 자신의 삶을 이루는 구체적인 조건들, 즉 현실에 반응하는 것은 마치 봄날의 벚나무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1)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에 반응하고 개입하는 방식일 텐데, 이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시적인 것’이다. “시적인 것이 없는 시인의 발언이란 게 무슨 힘을 갖겠는가.”2) 여기서 시적인 것을 이루는 언어는 단일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나 정치적 쎈티멘털을 토로하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자명해졌다). 시인의 언어는 그야말로 시인의 몸을 통과하고 정신을 포괄하고 무의식을 관통하여 간신히 흘러나오는 말,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면) 말의 고갈상태에서 나오는 한계체험으로서의 말(이영광)이며, 삶의 모든 부면을 필요로 하는 언어(이장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실과 정치를 다루는 시인의 언어는 벚나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개인의 실존적인 곤경을 다루는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모든 부면에서 시인의 몸, 즉 현실을 경험하는 시인의 몸은 특별해 보인다. 이를테면 나의 일상이 특정한 삶의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 나의 몸이 현실자본주의의 야만을 실감하고 있다는 것. 또한 내가 용산이나 강정 같은 우리 사회의 파국의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 나의 몸이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공명한다는 것. 이처럼 언어의 갱신이란 무엇보다 몸의 경험을 통해 이끌리는 것이 아닐까.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타자의 현실에 머무는 것, 이같은 몸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공감각(co-sensation), 즉 파국의 현실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함께-느낌을 통해, ‘우리’라는 존재를 수행해가는 것이다.3) 이때의 수행이란 우리라는 공동체를 무한히 연습해간다는 의미이며 또한 우리라는 공동체로 무한히 이행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컨대 제주 강정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들을 떠올려보자. 함께-있음의 이유와 근거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해도 그들이 지금 강정의 주민들과 함께 있다는 것, 함께 부르는 노래, 함께 먹는 밥을 통해, 서로의 표정・목소리・눈빛을 통해 어떤 정념을 나눈다는 것. 이같은 함께-있음과 실존의 나눔을 통해 ‘우리’라는 존재는 실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함께-있음의 감각이 비단 특정한 공간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먼 이국에서 “저 멀리 용산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허수경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시인의 몸이 그러할 것이다.4) 비록 용산참사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우는 몸’으로의 시 쓰기가 곧 타자와 함께-있음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시인과 독자와 희생자들은 보이지 않는 눈물을 함께 나눔으로써, 시 텍스트를 통해 모종의 ‘우리’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를 향한 시인의 기투는 엄밀한 의미에서 언어와 현실과 시인의 삶 전부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시인의 시적 투쟁은 언어와 현실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서정성의 옹호를 위하여 시에 도입되는 현실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나, 미적인 것의 옹호를 위하여 언어실험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서정의 의미를 특정한 제도 안에 가두거나, 미의 이름으로 미적인 것 자체를 질식시키는 역설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시적인 것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불온함, 불온한 아름다움 자체이기 때문이다.
불온한 아름다움이란 주류 질서가 고정시킨 사회적 배치에 균열을 가하고 동시에 기존의 문학적 제도와 관습에 위협을 가하는 시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위와 진보, 즉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진보는 필연적으로 한몸이다. 김수영(金洙暎)이 프랑스 작가 뷔또르(M. Butor)의 말을 인용하여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5)다고 썼을 때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이분법은 무의미해진다. 시적인 것을 불온한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했을 때, 시적인 것 안에는 이미 정치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와 현실, 시와 정치라는 이질적인 두 대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은 ‘시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어려운 가능성을 해명하고 실험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범위는 끊임없는 물음과 실험을 요하는 진행형의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수많은 담론적 논의를 거쳐왔으므로 이 자리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정치적인 것의 핵심을 몸의 공감각을 통해 타자의 현실에 머무는 것, 즉 함께-있음을 통해 우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겠다.
2008년 진은영(陳恩英)의 글6) 이후로 근 사오년간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얼마간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현실정치의 여전한 파탄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야만이 시인의 실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며, 그럴수록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함축하거나 현실정치에 실제적인 압력을 가하는 문학언어의 (불)가능한 존재론을 고민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의 정치’의 의미와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물음처럼 논의가 반복됨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을) 문제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시인들은 ‘이미 모험을 시작’했는데도 “‘시의 정치’가 갖는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사변적인 논의를 반복하는 것”7)에서 오는 피로감도 없지 않았다. 또한 논의의 대상이 된 텍스트가 이 논의를 촉발시킨 진은영을 비롯하여 이영광 이장욱 심보선 등 비슷한 세대의 시인들을 주축으로 공전된 느낌도 없지 않다.
최근의 우리 시단에선 ‘시의 정치’에 대한 ‘이미 시작된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다양한 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시는 소재의 차원이나 주제의 영역에서 타자의 현실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타자의 보이지 않는 눈빛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경험하게 하며 그를 통해 세계의 수상한 협잡과 현실의 은폐된 병을 목도하게 한다. 그들은 아마도 타자의 일부가 되어, 현실에 깊게 내속된 채, 타자의 시간 속에 머물면서, 현실을 날카롭고 쓸쓸하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8)
수상한 세계를 탐문하는 역설적인 발화
정한아(鄭漢娥)의 시를 읽으면 좋은 시의 운명이란 결국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는 싸움”9)의 성실한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 인간은 “충분히 역겹”지만 동시에 “충분히 이해할 만”(「가위」)하다. 인간의 자리에 자아를 넣어도 세계를 넣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대한 조롱이며 거대한 협잡인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인은 (불)가능한 싸움을 한다. 그리고 이는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자신 안의 균열을 직시하는 것과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현실의 모순을 감지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자신의 균열과 세계의 모순과 더불어 사랑하는 싸움을 수행하는 것이 시인의 ‘정수’이며 ‘궁지’임을 확인하게 해준다(“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과 싸우고 있는 이/독, 정수일까 궁지일까”, 「쪽팔리는 일」).
대량 재배된 슈퍼옥수수와 대량 도축된 돼지고기에
공정무역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 우리는
조금 괜찮은 대량 슈퍼사람 같지
않나 기부라도 한 것 같지
않나 내가 진짜 식당 얘길 하는 것
같나
살금살금 이를 쑤시며 문을 나설 때 우리 몸엔
이 집만의 비밀 특제 양념 냄새가 배지 달큰쌉싸름매콤하고 새콤짭조름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뒤섞은 맛을 뛰어넘는 모든 것을
뒤섞은 맛을 뒤섞은 한결같은
이 집에서 우리는
매립지처럼 식욕이 왕성해, 헌데
왜 찜찜한 표정인가 이마에 빨간 딱지 붙은 기분인가 제대로 저당 잡혔나
벗들, 우리는
허기와 무관한 우리의 식욕을 믿을 수 있나 조련된 금수의 자세로 죄 똑같이 개성적인
무개성의 식사를 즐길 준비가 됐나 이미 즐기고 있나
나를 의심하지 마, 벗들, 나는
동네 사람들을 믿지만 가끔 동네 사람들 말은 수상하고 동네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 말을 믿지만 가끔 동네 사람들도 동네 사람들 말이 수상하고 동네 사람들은
당분간 프랜차이즈를 선호하지만
동네 사람들도 불신을 적립할 줄 알아 아무도
현금으로 돌려주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포인트는 가끔
다른 용도로 쓰이지 어마어마하게 다른 용도로
용도를 초과하는 동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서두를 쓰기 시작한다;
진짜 식단이 필요해 모든
별들은 폭발하며 태어난다 그걸
내파라고 불러야 하나 외파라고 불러야 하나 최초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움은 협잡에 대해서는 늘 볼셰비키다
—「프랜차이즈의 예외적 효과에 관하여」 부분
사실 프랜차이즈는 ‘예외적’ 효과를 살펴봄으로써 오히려 그 본질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는 말 그대로 사회의 예외적인 사람들의 관심일 뿐 대부분의 동네 주민들에게 프랜차이즈의 효과는 평균적 일상성의 삶, 그에 대한 선호이며 신뢰다. 3퍼센트 정도의 불신은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으레 감당해야 하는 믿음의 세계다. 하지만 착실히 적립해놓은 포인트는 별다른 용도가 없고, 오늘의 요리는 아주 조금의 할인으로 그 효과를 전시하며, 지배인 추천메뉴는 언제나 값비싼 요리인 걸 보면 프랜차이즈에서는 어딘가 “협잡”의 냄새가 난다. 그 집만의 “특제 양념”은 비밀이지만 어딜 가도 “한결같은” 맛이듯, 프랜차이즈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개성적이라는 착각 속에서 “무개성의 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무언가 “제대로 저당 잡혔”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비단 식성만이 아닌 우리의 삶 전반일지도 모른다. 근사한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면 “괜찮은 대량 슈퍼사람 같지/않나 기부라도 한 것 같지/않나”라는 얼마간의 냉소적인 물음과 부자연스러운 행갈이는 현실에 대한 상투적인 믿음을 가볍게 비틀면서 프랜차이즈와 자본에 포획된 삶에 대한 부정적인 함의를 강화한다. 세계의 어떤 불편한 진실은 매끄러운 호흡을 방해하는 행갈이로 인해 그 수상한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어딜 가도 “한결같은” 맛에서 정작 수상한 것은 사람들의 입맛을, 그러니까 사람들의 일상과 취향을 상품의 코드에 맞게 기호(嗜好)화하는 프랜차이즈의 세계와 그 배면의 현실자본주의 시스템일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무역 커피”를 마신다는 우쭐한 자의식이 아닌 “진짜 식단”을 위한 싸움, 이를테면 공정한 노동과 공정한 교류에 대한 실천적인 감각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치 “별들”이 “폭발”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것처럼, “내파”이든 “외파”이든 이 삶에 대한 어떤 폭발의 계기가 필요하다. 그 “최초의/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같은 흐름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바로 시인의 화법과 태도이다. 이를테면 ‘나’는 프랜차이즈와 자본의 협잡을 비판하지만 그것은 자신과 대상을 분리하는 차가운 냉소와는 무관하다. “동네 사람들을 믿지만 가끔 동네 사람들 말은 수상하고”의 반복에서와 같이 ‘나’의 내부에서는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이때 “믿지만” “수상하고”, “선호하지만” “불신”하는, 믿음과 불신의 언어적 연쇄와 반복은 독자들에게 프랜차이즈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키는 시적 효과를 낳는다. ‘나’는 동네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과 프랜차이즈의 효율성의 논리에 저항한다. 하지만 현실의 바깥에서 그 삶과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자신을 모순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화자가 처한 이같은 역설적인 상황으로 인해 시 속에서 화자의 목소리는 하나의 중심으로 모이기보다는 계속해서 흩어진다. 회의하고 의심하는 화자의 발화는 시 속에 어떤 이질적인 목소리를 틈입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이렇듯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오는 것이다. “내가 진짜 식당 얘길 하는 것/같나”. 마치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목소리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아름다움은 협잡에 대해서는 늘 볼셰비키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아름다움”과 “협잡”과 “볼셰비키”라는 낯선 조합으로 우리의 일상적 감각에 충격을 가하는 이 이상한 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특히 볼셰비키라는 말은 어떤 맥락으로 이 문장 속에 도착한 것일까. 문맥적인 의미와 사전적인 의미를 고려해볼 때 볼셰비키는 새로운 생성을 위한 폭발, 폭발을 실행하기 위한 비타협적인 자세 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아름다움은 협잡에 대해서는 늘 과격하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세계의 협잡 혹은 수상한 세계에 대하여 늘 비타협적으로 싸운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의 불온한 아름다움 또한 이 싸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가 주의할 것은 자신이 저항하는 세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시인의 (무)의식이며 그 세계에 내속된 ‘나’의 회의와 의심이다. 목소리의 균열 혹은 이질적인 목소리는 이같은 역설적인 상황이나 자기모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협잡에 대해서는 늘 볼셰비키다”라는 결정적인 문장은 타락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현실에 발 딛고 있는 ‘나’와 우리에 대한 반성적 응시의 언어가 아닐까. 이같은 고투를 통해 시인은/우리는 수상한 세계를 탐문하고 그를 내(외)파하는 “어떤 서두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과 싸우고 있는”(「쪽팔리는 일」), 그 싸움의 기저에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한 “더러운 사랑”(「하필, 사랑」)이 존재한다. 이것은 일종의 싸움의 원인으로서의 독(毒)이고 싸움을 견뎌내는 힘으로서의 약(藥)이다. 정한아의 시는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토대로 하되 “더러운 사랑”의 역설처럼, 목소리의 균열이나 자기모순의 응시 같은 이질적인 요소를 통해 단선적인 현실비판이라든가 그에 대한 윤리적 요청을 넘어서는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준다.
은폐된 병과 시인의 피
김성규(金聖珪)의 시는 가난과 재앙에 대한 은유적인 서사다. 그는 은유와 서사를 통해 현실과 그에 내속된 자신을 시적으로 구성한다.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과 시인은 한편으론 매우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과 자신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인’ 인식과 묘사의 효과다. 언뜻 들려오는 우울한 감상의 목소리는 매너리즘이나 감상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재앙의 세계를 살아내는 고독한 시적 투쟁의 일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현실 속에서 시인의 이야기는 한없이 무력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혈국(血國)」)를 말함으로써 재앙의 은폐된 근원을 탐문한다.
서른한살, 직업은 없음, 가족사항은 아내와 딸 하나
우물에서 팅팅 불은 사내가 끌려 올라온다 이장은 소주를 마시고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은 거대한 구덩이에 빠진다 자주 들락거리드라고,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니께, 터널에서 빠져나온 듯 소란스러운 마을, 수돗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아낙(43세)은 경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방역반이 돼지의 마릿수를 센다 마을 입구에 뿌려지는 흰 가루들
피리를 불면 귀 달린 뱀이 나타난단다 뱀을 보면 사람의 눈이 멀게 된단다, 그렇게 애들한테 얘기하더라니까, 머리 위로 흙이 쏟아질 때마다 꽥꽥거리며 우는 돼지들, 이래야 나도 먹고살지, 포클레인 기사(47세)는 삽으로 흙을 뜬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먹듯 흙은 가볍게 구덩이 위로 올려져 하얀 수퇘지들의 머리 위로 뿌려진다 우글거리며 구석으로 달아나는 돼지들, 시체를 비닐에 싼 경찰이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가고……
수도관이 놓인 후 우물을 찾는 사람은 없다 보건소 직원이 가끔 우물에 약을 풀어놓으러 올 뿐, 돼지비계처럼 떠다니는 구름과 시체의 얼굴로 부풀어오르는 달, 사내는 왜 이 마을까지 들어와 죽어 있었을까 질문은 병을 부르고 병은 서둘러 잊혀져야 한다 우물을 메워야 한다고 소리 지르는 노인(73세), 눈꺼풀에 잠깐 경련이 인다 구경 나온 아낙들이 공무원들에게 삿대질을 하고
포클레인 기사가 흙을 퍼올려 우물에 쏟아붓는다
썩은 물이 흘러넘치고
뱀의 허물처럼 아이들의 꿈이 밤하늘에 떠다닌다
완장을 찬 방역반이 이장과 함께 회식자리로 몰려가고 포클레인 기사는 굉음을 앞세우며 집으로 돌아간다 흉악범죄가 발생하거나 병의 진원지로 지목되기 전까지 마을은 다시 조용한 잠에 빠질 것이다
—「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 전문
분명 병이 횡행하고 있으나 누구도 병의 원인을 질문하지 않는다.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 병의 진원지는 모종의 공모 속에서 은폐되어버린다. 병든 자는 있으나 왜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으며 병에 대한 책임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은 거대한 구덩이에 빠”지고, 무직의 가장이 오래된 우물에 빠져 시체로 떠올랐다. 돼지와 사내의 동질성은 그들이 모두 병에 걸렸다는 것이며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의지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구제역에 걸린 돼지와 동일한 운명에 사로잡힌 사내의 병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업은 없음”이라는 시체의 이력 속에, 효율성의 세계가 부여한 무능력과 무기력의 표지 속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그러니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살처분하는 현장이 드러내는 진짜 서사는 사내의 죽음 이면에 매설되어 있으며, 이때 물어야 하는 것은 “사내는 왜 이 마을까지 들어와 죽어 있었을까”라는 물음이다. 하지만 ‘죽었을까’가 아닌 ‘죽어 있었을까’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이것은 마치 “직업은 없음”과 호응을 이루는 ‘죽음으로 있음’이라는 존재 형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유령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유령의 존재가 아니라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어버린 이 세계의 병이 “서둘러 잊혀”진다는 것이며, 병의 진원지 또한 서서히 은폐된다는 것이다. ‘동면’(冬眠)과 ‘폐정’(廢井)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물이 폐쇄되고 다시 조용한 잠에 빠진 마을, 그 위장된 정적 속에 흐르는 것은 다름 아닌 재앙의 전조와 불안이다. “돼지비계처럼 떠다니는 구름과 시체의 얼굴로 부풀어오르는 달”의 ‘이미지’, “피리를 불면 귀 달린 뱀이 나타”나고 “뱀을 보면 사람의 눈이 멀게 된”다는 이야기는 병이 다시 발생하리라는,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게 한다. 병의 진원지는 잊혀지고 은폐되었으나 재앙은 언제든 도래할 것이다. 오히려 병인(病因)은 “뱀의 허물처럼” 남아서 다음 세대로, “아이들의 꿈”에까지 유전될 것이다.
이 시에서 인물과 공간은 병과 재앙의 서사를 일종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내든 돼지든 어떤 생명이 상실된(되는) 현장에서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은 채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사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경찰의 사무적인 사고 수습, 포클레인 기사의 밥벌이의 경제, 이장과 방역반의 공모 등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타자의 죽음, 즉 병의 발생 및 병의 진원지와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무관하기를 바랄 뿐이다. 시는 우리 사회의 큰 이슈였던 구제역 파동 등 현실적인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지만, 시 속의 마을은 어딘가 비현실적이며 가상적인 공간으로 감지된다. 시인은 현실을 은유적으로 서사화하여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삶 이면의 위험과 불안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이렇게 설정된 인물과 공간이, 꼴라주의 형식을 통해 현실의 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단편적인 이야기와 이미지가 마치 퍼즐의 조각처럼 엮여 병의 은폐와 위험에 관한 서사가 완성된다. 살처분되는 돼지들의 비명, 동네 사람들의 일상과 공모, 사내의 죽음과 시체의 수습, 재앙의 전조와 유전 등이 떠도는 말과 이미지의 형태로 각각의 서사 사이사이에 불규칙적으로 배치된다. 그리고 이렇듯 소란스러운 배치 속에서, 동면과 폐정으로 은폐된 우리 사회의 무섭고도 초라한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수족관에 소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잉어는 늙은 어머니의 화난 얼굴로 변해가고
잉어야, 너도 나와 같이 죽자꾸나
잉어의 배에 칼을 집어넣었다
어머니는 잉어를 좋아하는 저를 웃으며 바라보셨지요
내 얼굴에서 콧물이 흘러내리고 이불이
잠을 빨아들이듯 방바닥의 핏물을 삼키며 뚱뚱해졌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누구의
조금만 더 숨죽이고 기다려보자꾸나, 조금만 더……
—「잉어사육」 부분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시인의 죽음이다. 김성규는 병든 현실과 타자의 죽음에 대해 단순히 공감하거나 연대하기보다는, 그 현실과 타자 속에서 그들의 일부로 혹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한다. 자신의 고통과 병에 대해 눈감지 않는 것, 달리 말해 자신의 비극을 처절하게 응시하고 승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그의 시에서 몇차례 반복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모티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는 상징적인 행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상상함으로써 자신과 세계에 대한 역설적인 사랑을 추진한다. “조금만 더……”의 시간은 언제까지 유예되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시인의 죽음은 종료될 수 있을까. 나의 몸과 나의 병이 고통받는 타자의 현실 속에 이미 내속되어 있다는 사실, 그에 대한 실감이 바로 김성규의 시가 실현하고 있는 우리의 있음과 공감각이다.
소외되고 고립된 존재들이 실현하는 삶의 경이
서대경의 시에서 ‘공장지대’와 ‘꿈’은 마치 현실과 무의식처럼 공존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꿈을 꾸고, 꿈은 인간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현실과 무의식은 우리의 생활에서 낯선 듯하지만 익숙하게 공존한다. 내가 무심코 행한 말(실수)이나 행동이 무의식의 계기에 의해 촉발된 것일 수 있다. 공장과 꿈, 현실과 무의식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는 기성의 감각체계에서 보면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우리는 서대경의 시를 읽으며 그 이질적인 얼굴이 품고 있는 우울과 그 낯선 얼굴이 풍기는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서대경의 시에 구축된 현실을 우리의 이성이 파악하고 있는 객관적인 현실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은 오히려 객관적인 현실이란 게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서대경 시에 나타난 현실은 시인의 상상에 의해 구성된 비현실적인 세계다. 그럼에도 서대경의 시가 기어코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 현실감을 박탈하여”10) 창조한 그의 ‘다른 현실’이, 비현실적인 거울이 되어 지금 이곳의 현실에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현실의 비밀스러운 정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글이 자네에게 전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어쩌면 꿈 밖의 나는 벌써 깨어 일어나 창백한 몸을 사무실 의자에 기댄 채 내게 할당된 업무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와, 나를 태운 이 열차와, 어둠 속으로 뻗어가는 겨울의 어두운 광채와,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는 모든 꿈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곧 소멸하고 말 것이네. 하지만 친구, 어쩌면 지금도 자네 곁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을 나를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J양을? 통근 열차의 흔들림을? 우리 곁을 자전하는 찬란한 업무의 성좌를? 자네는 알고 있을 걸세. 자네는 서류를 필사하는 틈틈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자네가 알고 있다는 것, 자네가 부인하는 꿈속의 자네 역시 북구의 어느 이름 모를 정거장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쓸쓸히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걸세.
이제 열차는 불 꺼진 공장 지대를 벗어나 눈 덮인 황량한 숲 속을 통과하고 있네. 내 앞에는 책상이 있고, 백지가 있고, 그 위로 흘러가는 겨울 가지들의 무수한 검은 선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는 내게 쓰도록 명령하는 집중된 허공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내 손의 움직임을 듣고 있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밤, 어둠, 고독한 불빛들. 철로를 깨무는 추위,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철교의 속삭임. 얼굴을 쓸어내리면 두 손에 묻어나는 메마른 불빛.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고통의 소리.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의 어두운 비명을 들으며 나는 자네를 생각하네. 사무실의 뿌연 조명 아래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자네와 나를 생각하네. J양을 훔쳐보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을 생각하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소멸하는 열차들의 침묵을. 여관방에서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자네의 눈꺼풀 뒤로 열리는, 영원한 철도의 밤을……
—「철도의 밤」 부분
「철도의 밤」은 꿈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다. 그 속에서 열차를 타고 줄곧 북상하고 있는 ‘나’와 사무실에서 “업무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나’는 객관적인 시간 개념에 의해 분리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이 꿈에서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지만 어쩌면 ‘나’는 “벌써 깨어 일어나 창백한 몸을 사무실 의자에 기”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편의적으로 꿈속의 ‘나’와 “꿈 밖의 나”로 분리하기보다는 우리의 삶에선 무의식의 욕망과 일상이 뒤섞여 있지만, 현실의 자아 속에선 이들이 분리 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꿈(속)’의 의미 또한 실제가 아닌 일종의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꿈의 존재와 꿈속의 나를 부인하곤 하지만(“자네가 부인하는 꿈속의 자네 역시”),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지금 “창백한” 얼굴로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을” 꿈 밖의 “나를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 자아는 그렇게 단일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나려는 현실의 욕망이, 그렇게 이어지는 “고통”과 “불면의 밤”이, ‘나’를 반복되는 꿈속의 시간에 머물도록 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북구의 겨울’ 속으로 “항진하는” 열차의 시간을 개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의 밤」의 ‘다른 현실’이 매설하고 있는 현실의 얼굴은 다름 아닌 ‘소외’다. 꿈속의 열차는 언젠가는 멈출 것이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한 “기차표”를 끊을 것이다. 열차는 결국 멈추어야 하지만 노동과 일상은 중단되지 않는다. “꿈속의 자네” 역시 어느 정거장에서 “쓸쓸히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걸세”라는 말은 그래서 아프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소외된다. 하지만 동일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와 ‘자네’는 서로를 경멸한다. 거래처와 미결 서류와 “J양”으로 채워지는 대화를 나누면서,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틈틈이 그들은 서로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화자가 ‘자네’에게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전해질 수 없을 것이다. 꿈에서마저 이들은 ‘홀로’ 정거장에 서 있다. 이들은 동료지만 ‘관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러니 일상이란 얼마간의 고독이며 차이 없는 반복이 아닐까. 욕망과 관계의 결핍 속에서 이들은 결국 노동으로부터도 삶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철도의 밤」에서 각자의 삶에 내재된 고립과 분리의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더불어 시 속에 잠재되어 있는 고독한 목소리들, ‘밤과 어둠과 추위와 불빛’ 사이를 흐르는 존재의 “어두운 비명”을 듣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비단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고통의 소리”는 오히려 삶의 쓸쓸한 ‘신비’와 닿아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삶의 존재론적 조건이 된다. 마치 기차가 고요하게 북상하듯 산문체의 문장과 문장 사이를 흘러가는 리듬, “불면의 밤”을 채우는 기묘하고도 서정적인 분위기, 그 침묵과 비명의 음화(陰畵) 속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존재들’의 쓸쓸한 형상이 서서히 돋아나온다. 그렇게 완성된 삶이라는 음화는 쓸쓸하고 경이롭다.
시인은 꿈의 행로와 현실의 행로를 경계 없이 묘사하고 있으며, 그렇게 구축된 ‘다른 현실’은 그 어떤 사실주의적인 의지에 의해 묘사된 현실보다 더욱 실제적으로 현실의 피로와 경이에 근접해 있다. 서대경의 다른 현실에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도시의 변두리에서 시스템에 안정적으로 틈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시스템의 바깥에 존재하므로 가난하고 외롭지만 시스템에 포획되지 않았으므로 시스템이 강제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 현실감이 탈각된 서대경의 다른 현실과 그 속에 사는 현대자본주의의 외톨이들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 상상적으로 대응하면서 인간의 얼굴이 사라진 사회를 창조적으로 반성하게 한다. 서대경의 시에 나타난 다른 현실의 상(像)을 초현실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시를 통해 “꿈과 신비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삶과 현실의 문제를 떠난 초현실주의는 진정한 초현실주의로 보기 어렵다”11)는 오래된 문화운동의 명제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다른 현실의 기획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는 신자유주의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활이 튕겨나가기 직전의 항시적인 공포와 긴장이, 교환가치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마케팅 사회’(김인환)의 자아를 겨냥하고 있다. 이 공포와 긴장 상태가 강제하는 절망이란, 절망은 유전되고 증식되어야 한다는 듯 다른 현실에 대한 상상을 절대적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문학이 다른 현실을 발명하는 방식은 언어의 운동을 통해서일 텐데, 다음과 같은 부조리한 문장이 그 예가 될 것 같다. “나는 알았다. 나는 창녀지만, 내가 창녀가 아니란 걸 그가 이해한 것처럼.”(서대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우리가 특정한 시스템이 부여한 이름과 그 이름에 고정된 고유한 분수(分數)를 거부할 때, 그러니까 ‘나’에게 부여된 “창녀”라는 이름과 그에 고착된 사회적 한도들에 저항할 때 우리는 비로소(어쩌면 간신히) 그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나는 창녀지만, 내가 창녀가 아니란 걸 그가 이해”하고 내가 선언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부조리한 이해와 선언들이 늘어갈 때, 그 역설적인 말은 현실의 비밀스러운 질병을 폭로하고 현실의 낡은 의미체계에 균열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언어는 다른 현실을 기획하고, 그 언어 속에서 다른 현실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시는 그 불온한 아름다움을 자처한다.
정한아의 ‘역설적인 발화’와 김성규의 ‘죽음에의 투신’과 서대경의 ‘초현실적인 문장’을 통해 불온한 아름다움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고통받는 타자와 시인의 윤리라는 시의 정치의 미덕을 새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나의 현실과 타자의 현실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타자는 공감하고 연대해야 할 대상으로 그곳에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쓸쓸하고 날카롭게 직시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의 현실 속에 타자의 일부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몸의 차원에서 나의 현실을 실감하고 타자의 현실에 머문다. 그들이 수행하는 시의 정치는 개별적으로 빛나면서 또한 함께-있음으로 시의 정치성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간 이들의 시가 시와 정치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그들의 시를 통해 마케팅 사회의 자아와 무기력한 실용주의를 넘어서 이 현실을 다른 현실로 바꾸어내려는 문학적인 고투의 현장을 본다. 불온한 미와 다른 현실이 그들의 부조리한 문장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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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성호의 말(“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해 느낌이 없으면 예술가가 아니잖아요.”), 손홍규・정지아・함성호・정홍수 좌담 「작가들이 만난 현실」, 『창작과비평』 2013년 여름호, 297면.
2) 황현산의 말, 황현산・박수연・진은영 좌담 「시민(市民)들이 시 쓰는 시민(詩民)이 됐으면 좋겠다」, 『한겨레21』 제922호.
3) 공감각(co-sensation)이란 개념은 장-뤽 낭시 「마주한 공동체」(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박준상 「환원 불가능한 (빈) 중심, 사이 또는 관계-타자에 대하여」(『빈 중심』, 그린비 2008) 등의 글을 참조했다.
4) 이에 대한 논의로는 졸고 「여기 네가 있다: 공감각(共感覺)의 정치학」, 『POSITION』 2013년 봄호, 67~71면 참조.
5)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1981, 158~59면.
6)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7)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377면.
8) 이 글에서 다루는 시와 시집은 다음과 같다. 정한아 「프랜차이즈의 예외적 효과에 관하여」(『발견웹진』 2011년 겨울호), 『어른스런 입맞춤』(문학동네 2011), 김성규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창비 2013), 서대경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 2012)
9) 김인환 「김수영론」, 『문학과 문학사상』, 한국학술정보 2006, 198면.
10) 황현산 「상상력의 원칙과 말의 힘」, 앙드레 브르똥 『초현실주의 선언』 해설, 미메시스 2012, 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