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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재연 河在姸
1975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으로 『라디오 데이즈』가 있음. hahayoun@hanmail.net
단 한번뿐인 일들
무엇이 일어났던 걸까
세계에는 단 한번 일어났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쓸모없이 아무 쓸모도 없이.
당신의 도덕적 결심은
고기를 조금만 먹는 것,이고
나의 도덕적 결심은
고기를 조금만 먹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고리에 걸린 살점들의 영혼을 잊고서
붉고 푸른 불꽃으로 살점들을 요리하는
나, 내가 물로 쓴 서명.
무엇이 그러니까 언제 일어났던 걸까
달리고 달려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늦어버린 이어달리기의 소년처럼
아무 손도 내밀지 않은 막대를 찾아
끝없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어달리기의 소녀처럼.
수선공들은
지구의 건너편에서 망가진 트랙들을 고친다.
내가 먹은 살점들을
단물 빠진 껌처럼 씹고
자라는 아기들의 단순한 식욕,
아기들이 낳은 나.
그렇게 우리는 별들이 지나간 투명한 궤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억만년 후에 혹은 일억만년 직전에
쓸모없이 아무 쓸모도 없이.
꼬리 달린 이야기들
미움과 기쁨에 관해서라면
단순하고 아름다운 꼬리들만큼
저마다의 세계에서는 분명한 이야기들도
고양이가 돌고래를 만나듯이
돌고래가 원숭이를 만나듯이
원숭이가 고양이를 만나듯이
순식간에 꼬리가 꼬리를 잡고
맛좋은 버터처럼 녹아내린다.
메리-고-라운드
우리는 하하 호호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돌아간다.
꿈에서도 외국어로 인사하는 나는
조금 징그럽지만 검둥이처럼 매혹적이다.
너는 참 멋진 꼬리를 가졌구나,
그런 나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지구의 다른 쪽에서 자라났다는 언니들
이제야 찾았구나 이제야 만났어
손에 손을 부여잡고 빙글빙글 돌며
메리-고-라운드
네 고독한 얼굴은 언니를 꼭 닮았다, 닮았어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수군거렸지만
나와 한배에서 태어났다는
내 언니들,
회전이 그치고 나면 어디로 간 것일까.
이야기는 나무말의 잔등을 뛰며
세계의 사촌, 이모, 삼촌들에게로 건너갔다.
호랑이가 맛있는 버터로 녹아내린 건
힘세고 아름다운 꼬리를 사랑했기 때문.
검둥이 삼보는 호랑이가 녹아서 된 핫케이크를 사랑했지.
사촌과 이모와 아줌마 아저씨들은 잔뜩 모여
하하 호호 웃고 있는 중인데
내 머릿속에서 달아난 이야기
빛나던 전구들이 꺼지고 나니
어디로 간 것일까.
미움과 슬픔에 관해서라면
나도 마치 꼬리라도 있다는 듯이
메리-고-라운드
그쪽 말을 다 배웠다는 듯이
불빛 아래 녹아내린다.
그런데 내 고독한 얼굴들은
왜 어느 나라에서나 불쑥 나타났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