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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늘, 세계문학을 다시 읽다

 

세계문학 속의 중국문학

모옌이라는 난제

 

 

백지운 白池雲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중문학. 역서로 『제국의 눈』 『열렬한 책읽기』 『리저널리즘: 동아시아의 문화지정학』 『위미』 등이 있음. jiwoon-b@hanmail.net

 

 

1. 반/체제 인사?

 

2012년 모옌(莫言)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중국문학 연구자인 내게 자주 오는 질문이 있다. 모옌이 반체제 인사냐 친정부 인사냐는 것이다. 이제까지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인(가오 싱젠高行健, 류 샤오보劉曉波)의 경우 ‘반체제’ 레떼르가 비교적 명확한 데 비해, 모옌에게는 그게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작가회의 부주석에 공산당원이라는 신분도 미심쩍은데다, 인권이나 검열 같은 민감한 이슈에 대해 ‘바깥’에서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좀처럼 속 시원히 하지 않은 것도 한몫을 했다.1) 여기서 우리는 레이 초우(Rey Chow)가 말한 “이미지로서의 토착민”(the native as image)의 전도된 형태를 본다. 공산주의 국가의 지식인은 자신의 공식적 정치이념에 충실해야 한다는 서구 좌파의 토착민 상2)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중국 작가는 사회주의체제에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통념 또한 추상화된 토착민의 이미지이다. 물론 작가가 자신이 속한 체제에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맞다. 문제는 ‘비판적’인 것의 함의다. 구 유고 연방의 티토(J. Tito)가 편을 바꾸어 자본주의 진영으로 갔다면 스딸린체제에 진정한 균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젝(Slavoj Žižek)의 말3)을 떠올린다면, 사실 체제를 떠나 바깥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망명작가의 비판처럼 손쉬운 것도 없다. 모옌과 동시대 작가 한 샤오궁(韓少功)은 중국인의 ‘저항’을 재단하는 서양인의 정치감각이 각양각색의 좋은 맛을 오로지 ‘달다’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빈궁한 시골 사람들의 미각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꼬집었다.4) 친체제냐 반체제냐라는 이분법으로는 오늘날 복잡한 중국의 사상지형에서 ‘비판적’인 것의 심층으로 들어갈 수 없다. 문학작품의 경우는 더더구나.

지금 중국문학에서 ‘비판적’인 것처럼 모호한 말이 있을까. 우선, 무엇에 비판적이어야 하는가? 사회주의라는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해?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정부의 주도 아래 파죽지세로 밀려들어온 전지구적 자본주의화 추세 속에 일상적 차원에서 개인이 받는 억압은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적인 것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판은 알게 모르게 그 배면에 숨은 신()을 섬기게 되는 아이러니와 맞닥뜨린다. 반대로 중국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비판은 다시 체제옹호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신좌파와 자유주의의 오랜 논쟁은 이처럼 좌와 우 어느 한쪽을 진보라고 판가름하기 힘든 복잡한 중국의 현실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면 집단주의에 대해? 2009년의 한 문학좌담은 90년대 중국문학, 더 나아가 개혁개방 이후 30년 중국문학의 특징을 “다수의 결석”으로 개괄했다. 80년대 ‘소수(개인)’ 담론을 밑에서 지탱해줄 ‘다수(인민대중)’가 특히 90년대 이후 눈에 띄게 줄어듦으로써 소수 담론까지 파편화공동화된 현실이 지금 중국문학이 직면한 난제라는 것이다.5) 이런 진단에 따르면, 사실 지난 30년간 중국문학의 주인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문학에서의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주류의 목소리가 아닌가.

모옌을 ‘비판적’ 작가로 보는 일련의 시각이 때로 그를 어용작가로 매도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이처럼 비판의 타깃이 모호하고 주류와 역류를 구분하기 어려운 중국문학판의 복잡성에 기인한다. 거기에 최근 10년간 인터넷을 문학의 새 영토로 개척하고 자본과 결합해 새로운 생산 및 소비구조를 창출한 ‘신자본주의 문학’이 기성 문학판에 가한 천지개벽할 충격을 참고한다면,6) 중국 작가를 정치에 억눌린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보는 냉전시대의 무지에서 벗어날 때는 지나도 한참 지났다. ‘반/체제 인사’는 초우가 비판한 ‘토착민’의 다른 이름이다. 이제 중국문학을 게토에서 끌어낼 때다. 더구나 중국은 더이상 세계체제의 주변이 아니지 않은가. 포스트냉전 및 자본주의적 지구화라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집약된 곳이 바로 중국일지 모른다. 이러한 동시대성을 인지하면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지만 적이 보이지 않는 각자의 곤경을 참고하면서, 상호텍스트적으로 중국문학을 읽어야 한다. 그 점에서 모옌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논의는 일국의 시각을 넘어 세계문학이라는 지평에서, 더 정확하게는 세계문학을 새롭게 구상하는 시야 속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7)

 

 

2. 해체라는 무딘 날

 

당대 중국문학사를 잘 살펴보면 생각보다 애매한 모옌의 위치에 놀라게 된다. 굳이 노벨상이 아니더라도, 중국문학 하면 모옌을 떠올리는 것이 그간 외국 독자들의 현실이었다. 물론 모옌의 애매한 위치를 말하기 앞서 중국문학 지형 자체의 모호성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2009년, 정부수립 60주년을 기해 대대적으로 출간된 『중국신문학대계』(제5집: 1976~2000) 책임편집자 왕 멍(王蒙)은 ‘총서(總序)’에서 80년대에 이어 90년대 문학엔 주류도 없고 운동도 없고 대가도 없다며, 이 선집의 공과(功過)를 시간이라는 법관에 맡긴다고 썼다.8) 1930년대 이래 중국문학의 경전을 선정해온 최고 권위의 목소리가 이렇게 힘빠진 적이 있었던가. 모옌은 이처럼 안개 자욱한 문학사의 황야를 어슬렁거리는 한마리 야생이리다. 흔히 그는 1980~90년대 ‘심근문학(尋根文學)’이나 ‘선봉문학(先鋒文學)’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홍 즈청(洪自誠)의 『중국당대문학사』(1999)를 보면 양쪽 어디에도 모옌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이름은 별도로 마련된 ‘시정(市井)향토 소설’절 한켠에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9) 그런가 하면 같은 해 출판된 천 쓰허(陳思和)의 『중국당대문학사교정』은 모옌의 중편 「붉은 수수밭(紅高粱)(1986)을 ‘신역사소설’에 넣고 있다.10)

역시 모옌이 작가로서 명성을 높이게 된 데는 초기작 「붉은 수수밭」이 장 이모우(張藝謨)의 동명의 영화(1987)로 서구세계에 알려진 게 컸음을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중국현대문학이 서구 독서계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1993년, 장편 『붉은 수수밭 가족(紅高粱家族)(1987)이 하워드 골드블래트(Howard Goldblatt)의 뛰어난 번역으로 영어권에 등장했을 때, 이미 영화로 모옌에 친숙해진 독자들은 그의 강렬한 실험적 서사와 곳곳에 넘실대는 붉은 상징, 폭력, 부조리 등을 통해 중국문학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를 충족시켰다.11) 반면 국제사회에서 얻은 호평과 대조적으로 「붉은 수수밭」을 필두로 한 장 이모우의 영화는 정작 중국 안에서는 추한 중국인 상을 만들어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기호에 영합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또한 1995년 『풍유비둔(豊乳肥臀)』 출간 후 학계에서 쏟아진 비난—도착적 성묘사와 혁명사의 모독이라는—으로 모옌이 2년 동안 붓을 접었던 상황으로 보건대, 당시 중국에서 모옌이 지금처럼 ‘국민작가’로 성가를 올렸던 것 같진 않다.

한편 상대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던 서구 학계에서 모옌은 정치적미학적 의미에서 ‘비판적’ 작가로 주목되었다. 그중 하나는 모옌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복자로 보는 시각이다. 가부장적 마오()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견지에서 『풍유비둔』을 고평한 셸리 찬(Shelley Chan)은 ‘풍만한 유방과 살진 엉덩이’라는 모체의 에로티시즘이 가부장적 공산주의 규범을 뒤흔들었으며 주인공 샹관 진둥의 도착적 유방집착증이 전체주의 사회의 압제가 낳은 기형성을 반영한다고 풀이했다.12) 둘째는 더 전면적인 해체주의의 관점이다. 즉 마오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복에서 더 나아가 근대성 전반에 대한 해체의 기획으로 모옌을 읽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술의 나라』(酒國, 1993)를 분석한 샤오빈 양(Xiaobin Yang)의 글이다. 『술의 나라』에서 수사관 딩 거우는 ‘지우궈(酒國)’라는 시()에서 사내아이의 고기를 먹는다는 제보를 받고 진상조사에 나서지만 곳곳에 잠복한 유혹과 덫으로 인해 그의 수사여정은 미궁으로 빠진다. 성에 초대받았으나 좀처럼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카프카의 K처럼 사건을 풀기 위해 적진으로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그는 사건의 본질로부터 멀어진다. 이러한 딩 거우의 곤경을 샤오빈 양은 역사의 진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 역사의 총체성을 실현할 임무를 더이상 수행할 수 없는 실패한 주체의 상징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계몽주의적 구원에 대한 신념 및 그 이념적 기초인 진보적 시간관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도출해냈다.13)

이같은 해체주의적 시각은 모옌 해석에서 어느정도 공통된 자장을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마오시대 공식적 역사서술을 대체하는 비공식 역사라든가 54시기 좌익문학의 정당성을 묻는 질의, 작은 인물에 의한 거대주체의 해체라는 관점14)이나 포스트사회주의의 파편화된 현실에 대한 후기모더니즘적 재현이라고 보는 입장15) 역시 대체로 이 자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서구 학계만이 아니다. 최초의 ‘순종’ 중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이제 중국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계몽혁명현대라는 중심서사를 해체하는 지방서사로 중국문화의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 노벨상을 거머쥐게 한 동력이라는 어느 중국 평론가의 논지16)에는 민족주의와 해체주의가 놀랄 정도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물론 이러한 해석들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탈이데올로기라는 해석을 보면 모옌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거침없는 입담이 마오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신성성을 가차없이 벗겨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붉은 수수밭 가족』 『풍유비둔』 『탄샹싱(檀香刑)(2001)이 보여주듯, 모옌에게 좌와 우의 이념적 선택은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공산당은 국민당과 별 차이가 없으며 심지어 일본군, 독일군과도 마찬가지다. 모옌이 적대시하는 것은 가오미(高密) 둥베이향(東北鄕)이라는 원형적 고향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모든 이질적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옌의 작품을 근대성 전반에 대한 해체로 간주하는 두번째 해석에 더 설득력이 있다. 확실히 모옌에겐 근대에 대한 비아냥이 있다. 『술의 나라』 후반부에서 향락과 퇴폐의 상징인 유람선을 향해 “나는 저항한다”라고 외치며 덤벼드는 딩 거우의 입을 배설물이 틀어막는 장면이 ‘아이를 구하라’17)라는 계몽자의 절규를 패러디한 것임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해체의 칼날이 구체적 대상을 집요하게 캐묻지 못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무뎌진다는 데 있다. 모옌이 해체하려는 대상을 54, 마오시대, 1980년대 개혁개방 이데올로기까지를 두루 아울러 ‘계몽주의’ 혹은 ‘근대성’이라 명명한다면, 거기서 구체적인 역사의 디테일은 사라지고 만다. 숱한 이데올로기적 충돌과 격변, 전복을 거듭한 20세기 중국의 사상지형을 ‘근대’와 ‘계몽’이라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개괄한다면, 그렇게 뭉뚱그려진 대상에 대한 해체 역시 날카로움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모옌이 조롱하는 것은 권위적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상품경제의 만연이 불러온 배금주의, 욕망과 방종을 비롯한 당대의 모든 세태이다. 여기서 해체주의적 해석은 한층 갈피를 잃는다. 샤오빈 양의 결론이 “20세기 중국의 역사적 진실은 담론규범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18)라는 지극히 밋밋한 비관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해석적 곤경의 근본 원인은 사실 작품에 있다. 『술의 나라』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아이를 구할 사명을 저버린 주체의 자격상실뿐 아니라 구할 아이조차 부재하게 되는 대목이다. 지우궈시에서 욕망의 세계를 거머쥔 난쟁이 위 이츠는 오래전 부모에 의해 식재료 특별구매처로 팔려간 그 ‘아이’가 아니었던가.19) 딩 거우의 타락보다 더 충격적인 반전은 희생자와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한 위 이츠이다. 이처럼 계몽의 주체도 없지만 계몽의 대상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지점, 그래서 딩 거우가 파헤치고자 했던 ‘악’이 애초에 존재했는지조차 모호해지는 지점, 이것이 모옌의 해체의 궁극점이며 그의 해체가 끝까지 날을 세우는 데 실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3. 베일 속의 얼굴, ‘원시성’

 

모옌을 해체적으로 읽는 해석의 곤경은 어쩌면 중국문학을 보는 이분법이라는 더 근본적인 한계와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 해체라는 틀은 기본적으로 중심-주변, 국가-개인, 주류-비주류 같은 이원구도를 전제하는데, 그것이 20세기 중국의 복잡한 사상지형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또다른 의문은 모옌 문학의 주제인 ‘원향(原鄕)에 대한 동경’을 해체론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모옌 문학의 골간은 ‘원시적 고향에 대한 동경’과 ‘종()의 퇴화’라는, 둘이지만 하나인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종의 퇴화’에 관해서는 주체의 죽음, 권위의 상실, 가치의 부재 등으로 풀이되며 해체주의와 그럭저럭 어울려왔다. 하지만 원시적 생명력의 상징인 원향은—설사 그것이 반근대반이데올로기의 지향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시종 구축(構築)의 욕망에 이끌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가오미 둥베이향이라는 원향이 창조된 배경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의 노벨문학상 수상(1982) 이후 지방적인 것으로 세계성의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당시 중국 작가들에게 충일했던 현대화 욕망과 무관치 않음을 생각할 때, 근대에 때묻지 않은 순결무구한 ‘원시성’이란 말엔 확실히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붉은 수수밭」 이래 모옌은 가오미 둥베이향을 거점으로 자기만의 왕국을 구축해왔다. 물론 시작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의 긴 작품여정을 돌아보건대 그것은 결코 마술이나 환상만은 아니다. 100년간의 현대사를 끊임없이 곁눈질하면서 그 안도 아니지만 완전히 바깥도 아닌 곳에서 모옌은 역사를 ‘이야기’해왔다. ‘해체’로는 원향을 향한, 역사 구축을 향한 모옌의 욕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옌이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축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동경하는 원향 및 그 에센스인 ‘원시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러저러한 해체론 속에서 모옌의 ‘원시성’은 근대, 국가, 이데올로기 등의 ‘부재’ 혹은 ‘안티’로서, 다시 말해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정의되어왔다.20) ‘원시적 생명력’은 해석을 불허하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에 둘러싸여 성역화된 것이다. 이 ‘원시성’의 베일을 벗기지 않는 한 모옌에 대한 해석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18)

모옌의 ‘원시성’을 탈신비화하는 데 지대한 공언을 한 것이 천 쓰허의 ‘민간(民間)’ 개념 아닐까. ‘민간’은 1993년 천 쓰허가 제출한 ‘민간문학론’의 핵심어이다. 국가 및 정치 이데올로기의 전제 아래 잃어버린 지식인의 지위를 회복하여 문학의 내적 규율을 중심으로 문학사를 재구성하자는 당시의 전반적 추세와 달리, 천 쓰허는 ‘국가-지식인’의 이분법을 넘어 ‘묘당(廟堂, 국가이데올로기)-광장(지식인담론)-민간’이라는 정족(鼎足)의 구도로 20세기 중국문학을 볼 것을 역설했다. ‘민간’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아메바처럼 카멜레온처럼, 부단한 자기변형을 통해 질긴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이 ‘민간’이다. 즉 국가권력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약한 주변부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권력에 편입되기도 하고 또 피억압자로서의 독자적 역사와 전통을 견지하는, 인민 생활과 정서의 진면목이다. 정치적 용어로 표현하면 ‘민간’에는 민주의 정수와 봉건의 찌꺼기가 뒤섞여 있다.21) 이로 보건대 ‘민간’은 과거 좌익문학에서 말하는 ‘하층계급’ 같은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문제적이다. ‘하층계급’과 마찬가지로 피억압자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지배이데올로기와 확연히 대결하는 것도 아닌, 시세(時勢)에 따라 강세문화와 영합하다 또 여의치 않으면 잠류하여 생존을 보존하는 22) 양면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제 ‘민간’ 개념에 기반한 천 쓰허의 『탄샹싱』 분석을 살펴보자. 『탄샹싱』은 ‘쑨빙항독(孫丙抗獨)’이라는 산둥지방의 민간전설을 모띠프로 삼고 있다. 실제로 1899년 독일군이 착공한 자오지(膠濟, 칭다오-지난 연결) 철도공사가 쑨 빙이 주도한 대규모 무장농민투쟁으로 1년간 중단되었다 하니, 쑨 빙은 산둥의 민간 영웅인 셈이다. (아마도 민간의 원시성 효과를 위해) 모옌은 쑨 빙을 마오창(猫腔, 원 명칭은 茂腔. 산동지방의 전통 민간극)을 부르는 민간극단의 배우로 설정했다. 독일군에 의해 아내와 아이들이 처참히 살육당한 쑨 빙이 마오창 극단을 모아 독일/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잡혀 ‘탄샹싱’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광서제 때까지 존속한 것으로 알려진 ‘탄샹싱’은 박달나무를 참기름으로 매끈하게 다듬어 죄인의 몸을 항문에서 입까지 내장을 손상하지 않고 관통시키는 형벌이다. ‘민간문학’의 관점에서 천 쓰허는 『탄샹싱』의 인물을 국가-지식인-민간의 구도로 나눈다. 즉 쑨 빙과 그의 딸인 쑨 메이냥을 ‘민간’에, 가오미 현령인 첸 딩을 ‘지식인’에, 그리고 퇴직한 형부(刑部) 수석망나니인 자오자를 ‘국가’에 대입시킨다. 이런 배치엔 억지스런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삼각구도는 천 쓰허의 해석을 ‘국가에 대한 민간의 저항’이라는 기존의 이원론적 해체론과 확연히 차별화한다. 그는 『탄샹싱』으로부터 대립이나 해체가 아닌 상호 침투와 보완을 통해 확보되는 다원성을 읽어낸다. 특히 첸 딩으로 상징되는 지식인서사와 쑨 빙/쑨 메이냥이 대표하는 민간서사 간의 “상호언설성”과 “다성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는 “민간의 단일성의 타파”이다.23) 『탄샹싱』을 ‘철도’로 상징되는 근대에 대한 저항서사로 보는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천 쓰허는 이 작품이 민간의 저항과 더불어 저항하는 민간의 낙후성을 노출24)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근대성 서사를 내포한다고 보았다.25) 이 역시 ‘민간’의 양면성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탁견이다.

그럼에도 천 쓰허의 『탄샹싱』 해석엔 어딘가 말을 끝맺지 못한 느낌이 있다. 국가-지식인-민간의 삼자구도를 말하면서 『탄샹싱』에 관해서는 지식인-민간의 상호성만 강조할 뿐 ‘국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강조하는 ‘상호성’ ‘다성성’도 어딘지 불완전하다. 모옌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탄샹싱』 역시 복수(複數)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그 ‘다성성’이 최고조에 이르는 곳은 단연 쑨 빙이 ‘탄샹싱’의 형벌을 받는 대목이다. 이 형벌의 핵심은 형을 집행한 후부터 자오지 철도 개통식인 나흘 뒤까지 쑨 빙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붉은 수수밭 가족』에서 산 채로 루어 한의 껍질을 벗기는 대목을 연상케 하는 탄샹싱의 집행 장면은, 형벌이라기보다 한편의 장엄한 의식(儀式)이자 연극이다. 쑨 빙은 물론 자오자, 첸 딩, 쑨 메이냥, 마오창 극단까지 모두가 이 극을 완성하기 위한 배역에 다름아니다. 예술에 가까운 고난도의 형을 성공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자오자, 박달나무로 몸을 관통당한 뒤에도 극의 완결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 숨을 놓지 않는 쑨 빙, 쑨 빙을 위해 마오창을 부르다 독일군의 총탄에 장렬히 쓰러지는 극단 배우들, 마지막으로 쑨 빙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넣음으로써 “극을 완성”26)하는 첸 딩. 『탄샹싱』은 이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한편의 숭고한 서사시이다.

문제는 『탄샹싱』의 ‘다성성’이 어떤 세계관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독백, 대화, 합창이 뒤섞인 복수의 목소리 속에 국가-지식인-민간은 대립하는 듯 연결되며 대결하는 듯 화해한다. 첸 딩은 현령이라는 직책 때문에 쑨 빙을 체포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쑨 빙의 항거에 깊이 공감한다. 또한 냉혈한(冷血漢) 자오자가 연출하는 예술가적 엄숙성은 쑨 빙의 죽음에 극적인 긴장감과 함께 숭고함의 효과를 배가한다. 거기에, 쑨 메이냥을 축으로 쑨 빙, 첸 딩, 자오자 사이의 뒤얽힌 혈연-애정 관계도 있다. 첸 딩은 쑨 메이냥의 연인이고 자오자는 또 그녀의 시아버지이다. 이런 복잡한 감정선은 삼자 간의 형식적인 대결구도를 뒤집는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쑨 빙의 저항 자체가 모호해진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쑨 빙의 저항은 ‘근대’를 내세워 민간을 억누르는 국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첸 딩, 자오자 들과 ‘탄샹싱’이라는 장엄한 극을 완성해가는 중 어느새 그는 ‘근대’와 ‘국가’의 준엄한 법을 수호하기 위한 순교자가 되고 만다. ‘탄샹싱’이라는 전근대적 혹형이 원시성의 아우라에 감싸여 미화되는 지점도 이곳이다. 이 순간, 모옌의 ‘다성성’이 낼 수도 있었던 균열의 틈이 닫힌다. 쑨 빙의 저항은 그가 속한 세계를 균열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봉합한다. 그의 죽음은 “대타자의 균열을 치유하는 희생의 메커니즘”이자 “대타자의 욕망을 만족시킬 화해의 선물”27)인 것이다. 모옌의 ‘다성성’이 궁극적으로 진정한 헤테로글로시아(heteroglossia, 異種發話)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원환(圓環)의 완성

 

모옌이 구축하는 ‘원시성’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류에 따라, 힘의 관계에 따라,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거나 그와 협상하거나,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질펀하게 뒤섞이는 등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에서 살아남는다. 그 점에서 모옌의 ‘원시성’은 세속적이다. 그것의 생존방식은 결코 소극적이지 않다. 「붉은 수수밭」에서 근작 『생사피로(生死疲勞)(2006)와 『개구리()(2009)에 이르기까지 모옌은 역사구축이라는 오랜 시도를 끈기있게 이어왔다. 특히 『생사피로』는 그 결정(結晶)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생사피로』28)의 이야기는 195011일에서 시작하고 또 195011일로 끝난다. 즉 이 소설은 ‘윤회’라는 원환구조로 되어 있다. 어느 대담에서 모옌은 『생사피로』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중국 특색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했는데,29) 초기에 다소 환상적 색조를 띠었던 ‘원시’가 ‘윤회’라는 형식으로 지상에 내려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윤회의 바퀴는 ‘착한 지주’ 시먼 나오(西門鬧)와 그의 후손이자 분신인 란 첸수이(藍千歲)의 두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토지개혁 과정에서 지주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총살당한 시먼 나오가 나귀, 소, 돼지, 개, 원숭이를 거쳐 환생한 것이 란 첸수이이다. 그런데 족보를 잘 따져보면, 란 첸수이는 시먼 나오의 수양아들이자 충성스런 종인 란 리엔(藍)의 가계〔란 리엔 → 란 제팡(藍解放) → 란 카이팡(藍開放)〕의 후손이자, 시먼 나오의 친아들 시먼 진룽(西門)의 (혼외관계로 얻은) 손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먼 나오의 직계아들과 수양아들 공동의 후손으로 2000년 벽두 “밀레니엄 베이비”로 태어난 란 첸수이가 다시 시먼 나오인 것이다.

이러한 원환 안에는 하나의 대립구도가 들어 있다. 대약진 → 문화대혁명 →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는 각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영리하게 살아남는 시먼 진룽으로 대표되는 시먼촌() 사람들과 시류에 아랑곳 않고 고지식하게 16푼의 땅을 지키는 외고집 란 리엔 간의 대립이다. 소설 전반부의 상당부분이 토지개혁 후 ‘합작사’(그리고 훗날의 ‘인민공사’)에 들어오라는 갖은 협박과 압력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개인농’을 고수하는 란 리엔의 ‘곤조’에 맞춰져 있다. 그 점에서 『생사피로』 역시 사회주의 시기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한 인민의 저항이라거나, ‘근대’ 또는 ‘국가’라는 외래적인 것으로부터 자연의 본래적 상태(즉 원시성)를 지키려는 민간의 욕망이라는, 예의 이분법이 가동되기 쉬운 작품이다. 물론 이런 해석이 전적으로 틀리진 않다. 날 때부터 얼굴에 파란 점이 있었던(‘藍’) 란 리엔은 분명 지신(地神)의 알레고리다. 땅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농민의 반근대적 ‘곤조’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개혁개방 시기 물질만능주의를 거부하는 서사의 줄기는 모옌의 초기작부터 이미 익숙한 것이다. 국유화된 땅 위에 홀로 섬처럼 고립되어 있던 개인농 란 리엔의 땅은 개혁개방 후에는 부동산 개발의 세파를 힘겹게 버텨낸다.

그러나 이같은 란 리엔과 세상의 대결은 “땅에서 난 모든 것은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2474면)는 근원적 원환구조에 지배되어 있다. 낮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에 틀어박혔다가 밤만 되면 나와 달빛 아래 땅을 밟는 파란 얼굴의 란 리엔은 점점 인간세상을 초월한 귀신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그의 변모는 원귀(寃鬼) 시먼 나오가 이승에 대한 집착과 기억을 잃어가는 속도와 맞추어 진행된다. 그리고 그의 16푼의 땅은 반세기의 시대적 격동을 지나며 하나둘 죽어가는 시먼 나오와 란 리엔의 자손들의 무덤이 된다. 생전에 시먼 나오를 배반했거나 사랑했거나 관계없이 하나같이 죽어서는, 애초에 시먼 나오의 것이었고 지금은 란 리엔의 소유인 그 땅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여기서 땅은 『풍유비둔』에서 그렸던 ‘모체’이다. 토비, 항일대장, 국민당, 자본가, 정치가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간 자식들의 주검을 거두는 루(魯) 여인으로 상징되는 고향이자 자연인 것이다. 루 여인의 막내아들 샹관 진둥과 마찬가지로 ‘땅’의 마지막 후손이자 환생인 란 첸수이 역시 정상적으로 발육하지 못한 기형아이다. 그러나 모성에 대한 과잉집착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무기력한 샹관 진둥과 달리, 기이하게 큰 머리와 비상한 기억력을 지닌 ‘이야기꾼’ 란 첸수이는 역사와 운명의 거대한 원환을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한다.

여기서 원시성의 베일에 가려졌던 역사가 얼굴을 드러낸다. 란 첸수이는 바로 모옌이다. 이제껏 복수의 소리들 중에 숨어 있던 모옌의 목소리가 삶과 죽음, 하늘과 땅의 이치에 통달한 전지전능한 화자로 무대에 등장한다. 형식적으로 『생사피로』는 란 첸수이와 란 제팡의 대화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 대화는 란 첸수이의 목소리 내부에서 전개된다. 인간 시먼 나오, 동물 시먼 나오뿐 아니라 란 리엔, 란 제팡, 란 카이팡의 소리까지 모두 합쳐진 거대한 독백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세계의 총체성을 되찾으려는 거대서사의 지향을 담고 있다는 리 징저(李敬澤)의 진단30)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세계의 총체성을 찾아나선 목소리가 ‘잃어버린 고향’을 너무 쉽게 찾은 것은 아닌가. 이승에 대한 고뇌와 번민을 버릴 수 없던 시먼 나오가 다섯번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모든 집착을 버리는 순간 란 첸수이로 환생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역설, 그것은 ‘기억은 곧 망각’이라는, 의미를 버리는 곳에 모든 의미가 있다는 ‘심오한’ 역사의 진실이다.

이 심오한 이치 속에 대결은 의미를 상실한다. ‘장회체(章回體)31)’와 ‘윤회’라는 장치는 대립과 갈등으로 상처난 세상을 감싸안는 거대한 매트릭스다. 란 리엔이 저항했던 사회주의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더 큰 힘 앞에 스스로 무너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래한 새 시대의 선물 ‘자유’는 란 리엔의 착한 아들 제팡과 손자 카이팡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급기야 카이팡을 자살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바로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이자 역사인 것이다. 알 수 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 속에서 저항은 겨눠야 할 곳을 찾지 못한다. 세파에서 얻은 상처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자손들을 16푼의 품안으로 받아들이며 외롭게 죽어가는 란 리엔은 이 부조리한 세계에 숭고함을 덧입힘으로써 그 부조리를 완성하는 성스러운 희생양이다. 결국 란 리엔의 저항은 세계에 균열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균열된 세계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개구리』에서 고모를 역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바침으로써 경이로운 세계의 섭리를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농민을 대상으로, 아니 농민의 신분으로 작품을 쓴다고 했던 모옌은 그 평이한 문체에도 결코 해석이 쉽지 않은 작가다.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명쾌한 구도는 종종 그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파놓은 함정이기 쉽다. ‘저항’이라는 비서구 문학의 이미지화된 정치코드를 투박한 듯 능수능란하게 요리할 줄 아는 그는 분명 현대 중국이 낳은 역량있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옌의 문학은 ‘계급’이나 ‘민중’ 같은 분석개념의 유효성이 사라진 오늘날, 우리에게 문학에서 저항의 의미는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다시, “순수한 민간은 없다. (…) 오로지 이데올로기라는 때에 가려지고 얼룩진 민간만이 있을 뿐”32)이라는 천 쓰허의 말을 떠올린다면,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모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순수한 저항은 없다, 오로지 이데올로기라는 때투성이의 저항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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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형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한 몇가지 문제제기」, 『언어 너머의 문학』, 문학과지성사 2013, 264~69면.

2)Rey Chow, Writing Diaspora: Tactics of Intervention in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3, 27~28면.

3)Slavoj Žižek, “Rossellini: Woman as Symptom of Man,” October Vol. 54 (1990), 36면.

4) 韓少功馬橋詞典』,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2004, 17면.

5) 蔡翔羅崗倪文尖文學: 無能之力量如何可能?—“文學這三十年三人談」, 孫曉忠 巨變時代的思想與文化文化硏究對話錄』, 上海: 上海書店出版社 2011, 197~205면.

6) 왕 샤오밍 「육분천하: 오늘의 중국문학」, 백지운 옮김,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참조.

7) 모옌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한국어로 나와 있다. 그런데 상당수의 번역이 다양한 실험적 시도가 넘치는 다층적 문체의 생동감을 충실하게 전달하지 못해 아쉽다.

8) 王蒙王元化 「『中國新文學大系第五集總序」, 『小說界』 2009 4, 4~6면.

9) 洪自誠中國當代文學史』,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9, 330면.

10) 陳思和中國當代文學史敎程』, 上海: 復旦大學出版社 1999, 310~20면.

11) Jeffrey C. Kinkley, “World Literature in Review: China,” World Literature Today 68:2 (1994) 428~29면 참조.

12) Shelley W. Chan, “From Fatherland to Motherland: on Mo Yans Red Sorghum & Big Breasts and Full Hips,” World Literature Today 74:3 (2000), 499면.

13) Xiaobin Yang, “The Republic of Wine: An Extravaganza of Decline,” Positions 6:1 (1998), 13면.

14) David Der-wei Wang, “The Literary World of Mo Yan,” World Literature Today 74:3 (2000) 487~94면.

15) Xudong Zhang, Postsocialism and Cultural Politics: China in the Last Decade of the Twentieth Century, Duke University Press 2008, 241~44면.

16) 葛紅兵我們因何對莫言獲獎失語?」, 『社會科學』 2013 1, 175~77면.

17) 루 쉰(魯) 「광인일기」(1918)의 마지막 구절.

18) Xiaobin Yang, 앞의 책 28면.

19) 『술의 나라』는 딩 거우의 수사여정, 삼류작가 리 이떠우와 모옌의 서신왕래, 리 이떠우의 삽입소설이라는 세개의 내러티브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리 이떠우의 첫번째 삽입소설 「고기아이(肉孩)」 참조.

20) 모옌이 추구하는 것이 나이브한 원시회귀주의 아니냐며 그의 보수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Nikil Saval, “White Happy Doves: the real Mo Yan,” London Review of Books 35:16 (2013), http://www.lrb.co.uk/v35/n16/nikil-saval/white-happy-doves. 또한 전형준은 ‘원초성’으로 근대라는 역사공간을 비판하는 모옌의 시도를 의미있게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애매한 효과에 대해 지적했다. 전형준, 같은 책 280면.

21) 陳思和中國當代文學關鍵詞十講』, 上海: 復旦大學出版社 2002, 5면.

22) 陳思和, 같은 책 164면.

23) 陳思和, 같은 책 185~86면 참조.

24) 작품에서 모옌은 ‘쑨빙항독’ 이야기를 20세기초 전국적 반외세운동 ‘의화단의 난’과 연결시킨다. 당시 의화단원은 손오공을 비롯한 역사 속 신불이나 영웅의 신기를 받아 자신이 총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마오창 단원들에게도 그런 장면이 희화적으로 나타난다.

25) 陳思和, 같은 책 182면.

26) 莫言檀香刑』, 上海: 上海文藝出版社 2012, 413면.

27) Slavoj Žižek, 앞의 책 41면.

28) 한국어본은 『인생은 고달파』(전2권), 이욱연 옮김, 창비 2008.

29)莫言與敬澤對話生死疲勞』」, 『新京報』 2005.12.29.

30)敬澤 「“大我大聲”- 『生死疲勞筆記之一」, 『當代文壇』 2006 2 4~6면 참조.

31) 중국 고대 장편소설의 서사양식. ‘회’라고 부르는 ‘장’으로 나뉜다. 매 회 앞에는 한두 구절의 대구법으로 된 표제가 달려 있고, 회의 끝에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다음 회를 기다리시라” 같은 말이 쓰인다.

32) 陳思和, 같은 책 18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