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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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愼鏞穆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게으른 시체

 

 

화살이 날아가 꽂혔을 때 비로소 정확히 보이는 과녁,

아름다운 회오리

그러나 한번 화살이 꽂히고 나면 과녁은 제 이름을 벗어날 수 없지, 그때

 

칼날이 손목을 긋고 갔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죽음처럼

 

이곳은 바다야

넓고 푸르고 평화롭지,

미늘에 꿰어지기 전까진 누구도 그 속에 저렇게 슬픈 표정을 가진 짐승이 헤엄치고 있다는 걸 모르지

물고기는,

바다의 동맥처럼

믿기지 않겠지만

 

불가해한 사건만이 분명한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다—유리컵의 깨진 금들과 쏟아진

물의 얼룩

혹은 잘린 나무의 나이테거나 편지의 찢긴 조각

그리고 불탄 재의 빛깔,

날카롭게 휘어지던 오토바이가 맹렬하게 달리던 택시와 부딪쳤을 때, 뜨거운 아스팔트

교차로에 생겨나는 붉은 피의 오아시스를,

십자가처럼

 

정확하게는, 육체 속에 숨어 있던 시체를

 

—그 모든 게 시체였다니!

 

나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2008711일 대학병원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아버지가 시체였다니

어머니는 젊은 의사의 꼬질꼬질한 가운을 붙잡고 고함을 쳤습니다, 왜 육체가 시체가 되었냐고

왜 시체는 육체가 못되냐고, 형들이 흘리던 눈물이

빨간색을 뺀 피였다니,

그때 나는 나의 육체를 고향으로 가는 영구차 뒤칸 아버지 시체 옆에 앉힌 채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지요

아버지는, 내가 처음 본 시체다

 

—이제부턴 미늘에 걸려 찢긴 물고기의 입으로 말할 수밖에

 

아니 화살이 꽂힌 과녁의 구멍으로,

사실은 말이야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연금술일지도 몰라,

나는 유리컵 속에 숨은 아름다운 금들을 본 적도 나무가 가진 신비로운 나이테를 본 적도 없거든,

그것들이 깨지거나 잘리기 전에는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눈물에 빨간 물감을 섞어 시체에게 수혈하면, 피 대신 눈물이 돌고 있는 육체가 된다

물론,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이 세계에 들어오면

 

이해되었다고 간주하니까

 

가령 이런 식이다, 우리는 음악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악기는 무기가 아닌가—허공에 숨어 있는 고요를 쏘아 음악을 떨어뜨리는 총

살해된 고요 앞에 우는 가수여,

너마저 흉기가 아닌가

망각을 갈라 슬픔을 꺼내놓는,

 

그 칼의 진짜 이름은 절망인데

 

피 대신 눈물이 도는 육체인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198732일 중학교 입학식장에서 처음 보았던

그 애 이름,

겨울이 제 심장을 먹인 봄꽃과 봄이 제 허파를 바친 바람 속에서

밤새 편지를 쓰고

며칠 뒤,

뜯지도 않은 채 되돌아온 편지를 찢어 나는 내 기억의 가장 아름다운 노을 속에서 불살랐지요

 

나는 명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그 애는 여전히 회오리라고

 

물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후부턴 단 한 문장도 자기를 위한 것이라 착각하는 여자를 위해 써본 적 없으니까

내가 문장을 바친 여자들은 그 화살이 뚫지 못할 과녁들이니까, 죽음을 잃은 시체처럼

내 문장 속엔 묘지가 없으니까

 

—그저 미늘에 걸려 입이 찢긴 물고기의 입장에서 말한다

 

이곳은 생이야

넓고 푸르고 평화롭지,

시청 앞에서도 서울역 광장에서도 여전히 불타는 용산이나 부서지는 강정에서도

모스끄바와 베를린과 여기 멜버른에서도

인생은 고요했지,

아무것도 쏘지 않았고 아무것도 찌르지 않았지 아무것도, 깨거나 자르거나 구기거나 태우지

못했다는 것,

게으른 죽음처럼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이지색 팔걸이가 있는 소파와 저녁만 되면 쉽게 열리던 현관문과 별들이 부리를 쪼아대던 창문이 있는 집으로

그러므로,

시메사바에 사께를 시켜놓고 밤새 웃고 떠들며 취해선 비오는 거리를 말없이 바라보던 집 앞 뒷골목 임가주방으로

 

—더는 눈물 속을 헤엄칠 수 없는 물고기로서

 

희미한 등을 켠 오피스텔에서,

방부제처럼 순결한 손가락으로 번역본 페이지를 숭고하게 넘기는 윤리학자로서,

논리와 분석만이

피와 땀과 살이 뒤엉킨 삶을 갈라낼 수 있다고 믿는 진리의 신앙생활 속으로,

그 시체 없는 비문 속으로

 

희미한 등을 켠 이자까야에서

빤한 삼차원의 골목도 인텔리답게 이차원의 지도를 확인해야 걸어갈 수 있는,

사회학자로서

발언은 독점하고 잘못은 분배하며 타인의 상처를 제조해 자신을 치유하는 연대의 화학작용 속으로,

 

—그리고 바다에 빨간 물감을 타는 시간이 온다

 

태양의 아름다운 회오리가 시간의 화살에 꽂혀 문득 과녁으로 멈추는 순간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유리컵의 영원

혹은 톱날을 삼키는 나무의 휘청임,

그리고 구겨지는 종이의 비명과 하얀 재로 남는 연기의 문장들,

 

택시 위로 날아오른 오토바이의 허공—죽음이 분명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이곳으로부터

 

나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희미한 집어등에 걸린 활자들이 욕망의 해변에 치욕의 모래를 나르는,

그 섞지 않는 시간 속으로—아무것도 살해할 수 없었던

그때로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아직도 죽지 않고 그저 죽어가는 물고기의 육체로

언제쯤 끝이 날까

언젠간 끝나겠지, 게으른 시체처럼

 

잔뜩 반품된 기억들을 차곡차곡 먼지로 쌓아올린 채 바라보면

 

아버지가 물고기 한마리 갈대에 꿰고 돌아오는 저녁 같은 것

갈대 끝에서 뻐끔대는 아가미 같은 것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나는 아버지의 육체가 되어 있겠지

 

 

 

미친 여자의 잃어버린 사랑

 

 

유칼립투스 그늘을 걷어와 밥 짓는 냄새에 헹궈서는 밤새 발코니에 널어놓았네,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녀서

 

미친 여자의 잃어버린 사랑처럼,

쉽게 더러워져서

 

여자는 하얗게 드러난 허벅지 사이에 솥을 끼고 밥을 퍼먹네, 밥 냄새……

 

밥 냄새를 맡아야 깨끗해진다는 것은

할머니의 말,

소반에 흰밥과 들기름 뜬 쑥국을 담아 열 끓는 방으로 들고 온 것은 누나였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미쳐 있었나?

 

하얗게 떨어진 밥찌꺼기를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유칼립투스를 만나고

 

저녁 해에 까마귀 눈물과 바람을 반반씩 넣고 끓이면 어둠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느낌에 대하여, 까만 건 다 지워진 거냐고 물을 수 있다—어둠처럼

덮여 있을 뿐이라고,

여자가 둘둘 말아서 안고 다니는

까만 보따리처럼

더러워진 것일 뿐이라고, 그러면 어둠을 풀면 네가 들었느냐고 어둠을 빨면 네가 보이느냐고?

 

이런 상상에 대하여, 우는 건 다 슬픈 거냐고 물을 수 있지—끓어서 넘치는……

 지는 해에 담겨 흔들리며 어둠을 젓고 있는 유칼립투스

 

모든 잎의 그늘이 까마귀처럼 날아오르는 동안의 저녁,

 

그렇지만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인생이라는 것이 미친 여자가 마침내 걷어찬 밥통처럼 굴러간다는 것을,

운명이라는 것이

달려가 흙바닥에 뒹굴던 숟가락을 다시 쥐고 빨듯이,

밥 냄새 따라 펄럭인다는 것을

 

오늘만큼은 반드시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면, 여보시오

누구요? 어머니는 들리지 않는다 살다가 미치는 게 아니라 미쳐서 사는 것이라고,

그 한마디를 어머니는 하지 않는다

둘둘 말아 안은 보따리처럼

 

배고픔보다 더 더러운 건 없어

 

그것은 할머니의 말—누나는 지금 흰밥에 숟가락 꼿꼿이 꽂고 할머니의 본관을 써 소지를 병풍 앞에 세운다고 하네,

그러고는 밥을 향해 엎드리겠다……

 

웃다가 밥통을 걷어찼다가 다시 허벅지에 끼고 밥을 먹는 여자의 눈 속으로 까마귀들이

줄지어 날아 들어가고,

저 끝에서부터 유칼립투스가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는데

숟가락을 쪽쪽 빨면서도 모두들

 

사랑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