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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윤천 鄭閏天
1960년 전남 화순 출생. 1990년『실천문학』으로 등단함. 시집『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흰 길이 떠올랐다』『구석』등이 있음. jyc023@hanmail.net
청, 청, 청 깨져버린다는
강진의 청자 가마를 다녀온 뒤의 일이다. 하루는 깜냥껏 시를 써서 모아두었던 글 창고에 들어가 사정없이 몇편인가를 날려버렸다. 가마가 열리던 날. 백여점 남짓이나 한날 한시에 세상에 나왔던 그릇들, 기중에 온전할 것은 몇점이나 되는 것일까. 청 청 청, 한쪽으로 밀려난 것들의 깨지며 조각나는 소리가 가마터 안의 공기마저 일시에 얼어붙게 하였다. 때로는 사심없이 사라진다는 일이, 애를 쓰며 남아 있는 일보다 하등에 가볍지 않을 것 같음을 보여주던 도장밥만큼이나 깊은 한 순간. 매 맞은 장딴지같이 청자가 푸른 이유는 무엇과 무엇 때문이라는 잡소리인들 없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저렇게도 있을 것만 있게 하는 꼿꼿한 서슬, 천년인들 이어져 내려온 무대포 같은 외곬 때문이었음을.
세상의 모든 구라
섬진강변 매운탕집의 그늘 끼친 평상 위에 앉아
잘 덥혀진 국물 한 소배기를 가운데 놓고
멀리서 온 그와 구라를 한판 풀어제꼈습니다
세상의 높거나 귀한 자리에 애초부터 인연 없거나 밀려난 이들에겐
구라가 때론 첩약 같거나 간식거리만 같을 때가 빈번한 법이었지요
어디 당신뿐이겠습니까
나도 일정부분 구라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의 구라로 인해 하마터면 잠시 슬퍼질 뻔하기도 했습니다
시나 소설에다 비비고 감쳐 구라를 굽거나 끓이기도 하는 치들을
그래도 알 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의 구라는 어딘지 서늘하거나 짭조름한 면도 없지 않아서
마냥 무릎을 치거나 고개를 주억거려줄 수만은 없기도 했답니다
“그때 소설 쓴다는 아무개란 놈이, 저 강 너머, 저 구부러진 골목 뒤창 오두막에 한동안 처박혀 있었을 것이었지, 한번은 그놈 왈, 섬진강 물고기나 조개 껍데기 몇닢쯤은 제 놈 자식이고도 남는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그놈이 어느 마음 외롭고도 삭신 뻐근한 새벽녘이면, 아무도 없는 강변에 혼자 나와 딸딸이를 쳤다던가 어쨌다던가. 거기서 끝났으면 물론 지저분한 한토막의 썰이나 다름없었겠지만, 그랬는데 그 작자가 그러더라고, 제 몸 것의 어느 한 대목으로 강물 속의 고기밥이라도 한톨 감당하고 싶었던 날이 있었노라고, 물론 조금은 입냄새 구린 구라에 다름 아니었겠지만.”
때맞추어 강심 위로는
해오라기 한마리도 제 날개 두 짝을 마악 들쳐 업었을 적에
바닥까지 잘 비운 국물 대접 하나 밥상 위로 올려놓고
나는 느닷없는 호연지기에 잠시 안겨보기도 했던 것이었는데
이 다음엘랑, 하다못해 어느 후생의 재수 좋은 행간에서라도
남보다 돈 많이 벌게 되는 불상사가 찾아오시는 일 있거들랑
오늘 것보다 더욱 진하고 고소한 매운탕 일천 뚝배기
어죽이라도 백열 솥단지 질펀하게 끓여놓고
잔치 한마당 열어보자는 속셈이 불쑥 찾아왔던 것이었는데
세상의 모든 구라들을 방방곡곡에서 불러올려서
“청아, 이 가시낭구야. 니가 정말로 청이더란 말이냐.”
그런 일 닮은 왁자지껄함이 어디선가 몽골군처럼 쎄하게
한바탕 쳐들어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