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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핵 그림자에 덮인 한국의 정전체제
전쟁도 평화도 아닌 60년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세계적 전문가이며, 2007년 후광김대중학술상을 수상했다. 국내 번역 출간된 저서로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대학과 제국』 『김정일 코드』 『미국 패권의 역사』 등이 있다.
201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60년이 되었다. 휴전은 단지 교전을 중지한다는 합의에 불과한 것이지 평화조약이 아니므로 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내지는 못했다. 따라서 휴전의 주된 유산은 평화가 아니라 남북한에 더하여 미국까지 가세한, 엄청난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끊임없는 위협이다. 2013년 4월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B-52와 B-2 스텔스 폭격기를 파견해 남한의 섬들에 모형폭탄을 투하했으며, 미 국방부는 이 비행기들이 ‘핵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온 세계에 알렸다. 그 무렵에 서울의 군당국자들은 평양의 어떤 창문에도 명중이 가능한 순항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론에 밝혔는데, 그것은 북한 지도부를 제거하겠다는 암암리의 위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위협은 격앙된 언사를 동원한 평양의 거친 공세—특히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미국을 향해 발사하겠다는 위협—에 대한 대응이었다. 물론 북한은 몹시 화가 나 있다. 그들은 적을 비난하고 조롱하며 거칠게 위협한다. 북한은 종종 무례하고 분별없고, 어쩌면 미쳤을지 모른다는 인상을 준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그들이 일부러 보여주려는 이미지이다. 게임이론의 기본에 따르면 양쪽 다 핵무기가 있어서 상호파멸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교착상태에서는 이쪽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기꺼이 사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적의 심중에 심는 것이 핵심이다. 미친 것 같은 태도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유용하다. 이것은 또한 어느정도는 미 언론매체들이 조장하는 이미지이다. 그들은 항상 북한이 던진 미끼를 물고서, 다리를 곧게 뻗은 채 행진하는 병사, 굶주린 아이들, 흥분한 지도자와 전반적으로 과장된 평양의 군사능력 같은 끝없는 이미지들로 북한의 위협을 과대선전한다. 할리우드 역시 이제는 「레드 던」(Red Dawn, 1984)의 리메이크작(2012)에서 시작해 최근의 여러 영화들에 보이듯이 북한을 사납고 미친 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몇몇 경우 초기 씨나리오에서는 원래 중국이 적이었지만 할리우드가 중국에서 영화표를 엄청나게 팔게 되면서부터 북한의 미국 침략이 전혀 터무니없는 발상인데도 북한으로 적이 대체되었다.)
끔찍했던 한국전쟁의 폭력성과 그 여파를 살펴볼 때면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2006년에 첫 핵실험을 하기 전까지 북한은 비핵국가들 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으로부터 핵무기 위협을 끊임없이 받은 나라였다. 그 위협은 전쟁 중인 1951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미국 언론의 논의는 사실상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드물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물론이고 이 분야에 아주 밝은 사람들조차도 사실을 전혀 모른다.1) 하지만 북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평선에 걸려 있는 비유적이지만 상존하는 붉은 빛, 곧 미국 핵에 의한 순식간의 몰살이라는 주기적으로 되살아나는 유령과 함께 60년이나 살고 있다. 휴전은 미국의 핵위협을 배경으로 맺어졌으며, 그때 이래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1. 핵공갈
휴전에 이를 때까지의 몇달 동안 미국은 자신의 병기고에 있는 가장 큰 무기들을 위협적으로 휘둘러댔다. 1953년 5월 26일 『뉴욕타임즈』는 최초로 대포로 핵포탄을 발사한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는데, 그 포탄은 네바다 주의 프랜치플랫(French Flat)에서 10킬로톤(혹은 히로시마 핵출력의 절반 이상)의 위력으로 폭발했다. 며칠 후 네바다 실험장에서 그때까지 폭발된 것 중에 ‘가장 강력한 핵폭풍’이 일어났다. 일부는 그것이 수소폭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네바다 실험은 적에게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더 낫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인 핵공갈에 필수적이었다. 예전의 비밀문서들 역시 1953년 5월과 6월에 아이젠하워 정부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망설이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을 예증한다. 5월 중순에 아이크(아이젠하워의 별칭—옮긴이)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재래식 무기보다 싸게 먹히리라고 말했으며, 며칠 후 합동참모본부는 중국에 핵공격을 하도록 권고했다. 실제로 그들은 핵공격을 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킬 몇가지 씨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씨나리오들은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크의 핵위협이 전쟁을 끝내기로 한 공산주의자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결정은 이런 화려한 위협이 있기 전인 3월에 이미 내려졌다.
더욱이 아이젠하워는 핵무기의 실제 사용에 대해서는(단순히 핵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과는 달리)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덜레스(John Dulles) 국무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여러 위원, 외부 조언자들보다는 확실히 더 그랬다.2) 1953년 5월에 아이크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여러차례 논의했지만 결국 으름장을 놓기를, 즉 핵무기를 실제 사용하지는 않고 사용할 수도 있다는 암시와 경고를 하는 편을 택했다.3) 그사이에 미 장성들은 북한의 큰 댐들을 겨눈 비핵 공습을 강화했다. 1953년 5월 20일에 합동참모본부(JSC)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북한과 중국에 수백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전쟁계획을 제출했다.4) 그러나 며칠 후 중국과 북한은 미국이 받아들일 만한 조건들을 합의했는데, 핵공갈이 그들의 결정을 촉진했다는 증거는 없다. 아이크(와 덜레스)는 공식설명 선상에서 여전히 제3국을 통해 전달된 핵위협이 전쟁을 끝냈다는 주장을 견지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회고록 초고를 쓴 아들 존은 추측이었음을 인정했다. 새 책에서 진 에드워드 스미스(Jean Edward Smith)는 아이젠하워가 자신은 덜레스나 국무부의 핵무기 사용에 관한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핵무기 사용에 관한 “이 모든 장난을 그만두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5) 1986년에 내가 한국전쟁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위해 딘 러스크(Dean Rusk)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나에게 자신이 1961년 국무부 장관 시절 핵외교가 이 전쟁을 끝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 직원에게 정보를 조사하도록 시킨 적이 있으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후 한반도에 핵무기가 도입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아이크의 위협 이전: 매카서의 광기?
중국이 전쟁에 개입한 후인 1950년 12월 9일에 매카서(Douglas MacArthur, 맥아더)는 사령관으로서 한국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재량권을 요구했다. 2주 후 그는 26개의 핵폭탄이 필요한 ‘저지 목표물 목록’(a list of retardation targets)을 제출했다. 사후에 발표된 인터뷰에서 그는 열흘 만에 한국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계획이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만주의 남단에 걸쳐 연이어 30~50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려 했다.” 그러고는 50만명의 중국 인민군을 압록강에 끌어들이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우리 배후에 방사능 코발트 띠를 형성하려고 했다. 그 띠는 60년에서 120년 동안 실제적인 효력을 지닌다. 적어도 60년 동안 북한은 지상으로 한국을 침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의 계획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것이 미친 짓이었다 하더라도 매카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기 전에 합동참모본부의 한 위원은 원자폭탄이 중국의 한국진출을 막을 ‘결정적인 요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원자폭탄은 “유엔이 만주 경계선 바로 북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지역에 설정할지도 모르는 완충지대”에서 유용할 수 있었다. 몇달 후 국회의원 앨버트 고어(Albert Gore, 뒤에 부통령이 된 Al Gore, Jr.의 아버지—옮긴이)는 “한국이 미국의 장정을 잡아먹는 고기분쇄기가 되었다”고 불평하며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획기적인 무엇인가’를, 즉 한반도를 분할하는 방사능 띠를 제안했다.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코발트 폭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1951년 5월에 매카서의 12월 24일자 요청을 되풀이하면서 이번에는 38개의 원자폭탄을 요청했다(그 요청은 부결되었다).6)
1951년 가을에 미국은 전장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능력을 확고히 굳히기 위한 프로젝트인 허드슨항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을 수행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B-29 폭격기들이 1951년 9월과 10월에 한대씩 오끼나와에서 발진해 북한으로 파견되어 모의 원자폭탄 투하항로를 따라 ‘모형’ 원자폭탄이나 무거운 TNT 폭탄을 투하했다. 그 프로젝트에는 ‘무기의 집결과 시험, 지휘, 포격 조준에 대한 지상통제 등을 포함한 핵공격에 관련된 모든 활동의 실제 작동’이 필요했다. 그 결과 대규모 적군을 제때에 식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로 인해 핵폭탄이 필시 유용하지는 않다는 결론이 났다.7) 불과 6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를 폐허로 만들었던 B-29폭격기 공격라인의 모의실험을 지켜보는 평양의 지도자들에게 강철 신경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매번 그 폭탄이 진짜인지 모형인지 확신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1951년초에 국방부에서 기밀업무를 담당한 쌔뮤얼 코언(Samuel Cohen)이라는 한 젊은이는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한 전투를 지켜보고는 이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도 적군을 파괴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성자탄의 아버지가 되었다.8) 같은 해에 미국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는 원자폭탄의 전술적 사용이 실현 가능한지 가늠하기 위해 고안된 ‘비스타(Vista)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전후에 남한은 유럽의 중부전선과는 달리 상대방이 핵폭탄을 갖고 있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로 미국의 주된 전술핵무기 사용 시험장이 되었으며, 따라서 기동연습과 실제 전쟁계획에서 핵폭탄 사용은 일반적인 작전절차가 되었다.
전쟁은 쾅 하고 끝난다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북한이 휴전에 응하도록 최대한 압력을 가하기 위해 미 공군은 북한의 큰 댐 스무곳을 공격해 막 추수를 앞둔 25만톤의 쌀을 파괴한다는 독창적인 구상을 했다. 그 결과 폭격기들은 막 모내기가 끝난 1953년 5월 중순에 덕산, 자산, 구원가의 큰 댐 세개를 폭파했으며, 그 직후 남시와 대천에 있는 두개의 댐이 더 공격을 당했다. 이 댐들은 역사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관개용 저수지로 불리지만 미국의 많은 대형 댐과 같은 종류의 주요한 시설이었다. 압록강의 거대한 수풍댐은 세계에서 후버댐 다음으로 큰 규모인데 1952년에 처음 폭격을 당했다(베이징과 모스끄바를 자극하는 것이 두려워 폭파시키지는 않았다). 부전강댐은 6억 7천만 세제곱미터의 물을 담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은 999미터의 압력경도를 지니고 있으며, 20만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9) 미국의 공식 공군사(史)에 따르면, 59대의 F-84 썬더제트기가 1953년 5월 13일에 덕산의 높은 담수벽을 터뜨렸을 때 쏟아져나온 물로 6마일의 철도와 다섯개의 다리와 2마일의 간선도로와 5제곱마일의 논이 파괴되었다. 덕산의 첫 파괴는 27마일의 강 계곡을 “깨끗이 쓸어갔으며”, 평양까지 물이 밀려들었다. 전후에 이 저수지를 재건하는 데는 연인원 20만의 인력이 들었다.
1953년 6월 20일에 『뉴욕타임즈』는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줄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와 에슬 로젠버그(Ethel Rosenberg)가 씽씽(Sing Sing)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고 보도했으며, 작은 활자로 된 일일전황 보도란에서 미 공군이 북한의 구성과 덕산에 있는 댐을 폭격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라디오도 (북한 식량생산에 드는 물의 75퍼센트를 공급하는) 이 큰 저수지들이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고 더 작은 활자로 인정했다. 이런 행위는 국제법에 따르면 분명히 심각한 전쟁범죄지만 당시에는 어떤 논평이나 사설도 ‘우리의 신문’에는 실리지 않았다.10) 미국의 또다른 공식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민간인을, 우호적인 민간인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폭격했으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네이팜탄으로 마을 전체와 그곳 주민, 여자와 아이들과 열배나 되는 매복한 공산군 병사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조종사들은 자신이 해야 했던 행동의 충격으로 장기에서 쏟아져나온 토사물의 악취 속에서 배로 돌아왔다.11)
이어서 필자들은 이것이 대형 고성능 폭탄과 원자폭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민간인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었는가 묻는다. 적이 가한 야만행위는 나치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한 테러활동보다 훨씬 잔인했기 때문에 실상 더 나쁘지 않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놀라운 왜곡은 별문제로 하고 그 논리를 살펴보라. 야만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네이팜탄을 쏟아붓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진상은 백인 미국인이 한국에서 적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상대는 아시아인, 공산주의자, ‘야만인’이었으며, 따라서 분명한 인종적 적대감이 이 전쟁에서 미국인의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냉전의 입안자인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중국인들을 “야만적이고 건방지다”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리지웨이 장군에게 공산주의자는 ‘믿을 수 없는 야만인’이었으며, 리빈 리비(Luthven Libby) 장군은 트루먼에게 ‘말하는 짐승들’과 협상을 하는 데 7개월이나 걸렸다고 했다.12) 아시아계 사람은 백인에게 말대꾸도 할 수 없는, 인종적으로 분리된 사회 출신인 이들에게는 그런 협상 자체가 불쾌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북한과 중국은 그때 미국과 유엔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북한은 여전히 그렇다. 그래서 그들(과 특히 북한 사람들)은 복장, 표정, 자세 및 미국에 대해 굽어보며 맞추어준다는 식의 태도로 위엄을 내보임으로써 반격하려고 했다. 기자들은 항상 북한 측 협상자인 남일(南一)이 말쑥하고 초연하고 오만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결코 남한이 주도권을 쥐게 하지 않았다. 백선엽(白善燁) 장군은 대개는 유일한 남한 대표였는데 그후 50년 내내 미국이 주도하게 되는 유엔 대표단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쳤다. 내가 볼 때 그들은 이것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남한 통역자이던 내 친구 하나는 내게 북한 대표단이 나타나 미국인들과 직접 거래를 할 때면 자신이 왜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쟁은 끝날 무렵이 되자 미국에서 거의 인기가 없어졌다. 트루먼은 갤럽 여론조사에서 겨우 27퍼센트의 지지도를 얻은 상태에서 퇴임했다. 갤럽 여론조사 역사상 오직 2008년에 조지 부시(George W. Bush)만이 22퍼센트라는 더 낮은 지지도를 기록했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미국은 결코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다. 로즈매리 풋이 말하듯이, “1776년부터 1950년까지 미국은 무력행사에서 놀랄 만큼 성공을 거두었기에 특별히 외교와 타협의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13)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어떤 진지한 외교도 피한 채 교착상태에 이를 때까지 계속 싸웠다. 현장에서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지는 모르지만 많은 미국인은 대체로 그것을 패배로 인식했다.
미국의 수도는 “다들 관심이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가운데” 종전을 맞이했다고 기자들은 썼다. 뉴욕에서는 텔레비전 카메라기사들이, 평화가 찾아온 것을 환영하며 소리 지르도록 구슬릴 변덕스러운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타임스퀘어에 나왔지만 지하철 요금이 막 15쎈트로 인상되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 적었다. 다음날 아이오와 주의 한 법원은 의회가 전쟁이 실재한다고 선언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어떤 전쟁상태도 없었다고 판결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전쟁은 3년 동안 매일 24시간 내내 실재했다. 미 공군의 평가에 따르면,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도시의 파괴규모는 결국 독일과 일본에서의 규모를 훌쩍 넘어섰다. 요그 프리드리히(Jörg Friedrich)는 영국 공군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 65만 7000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총 투하량은 120만 톤이라고 추산했다. 미국은 2차대전 때 태평양지역 전체에 50만 3000톤의 폭탄을 쏟아부은 것에 비해 한국에 (3만 2557톤의 네이팜탄은 제외하고도) 63만 5000톤을 투하했다. 60개의 일본 도시들이 평균 43퍼센트 파괴된 데 반해 북한 시읍의 파괴에 대한 평가는 “40에서 90퍼센트까지 걸쳐 있었다.” 적어도 북한의 22개 주요도시 중 18개 도시의 50퍼센트가 흔적조차 사라졌다. 표본을 추출한 파괴규모는 다음과 같다.14)
평양 75%, 청진 65%, 함흥 80%, 사리원 95%, 신안주 100%, 원산 80%
(디엔비엔푸Dienbienphu 전투15) 이후) 한국과 베트남에서의 평화협정을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덜레스는 북한・중국과의 평화조약에 서명할 의사가 없었다. 1986년에 나는 한국전쟁에 관한 템스(Thames)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위해 제네바협상의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알렉시스 존슨(U. Alexis Johnson)과 인터뷰를 했는데, 존슨은 우리에게 한국의 휴전을 지속적인 평화로 대체할 예정이었던 제네바회담이 미국 대표부에게는 단지 치러야 할 무의미한 활동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협상으로 무언가가 바뀔 거라는 기대를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회담 준비를 하죠?” 하고 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아, 연설을 하고, 또 한국의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이 제대로 자리잡아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끔 하고…… 에에, 이승만(李承晩)이 그걸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2. 한반도의 핵지대화
한국전쟁이 끝난 지 4년 후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반도에 핵무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정전협정 13d항 위반의 법적인 결과에 대해 우려했지만 남한 대통령 이승만의 변덕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덜레스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38선 너머로 김일성(金日成)을 노려본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는 마치 뱅쿠오(Banquo)16)의 유령이 그의 피투성이 머리채를 흔들어대고 있는 것처럼 그 갑작스러웠던 일요일로부터 들려오는 심란한 속삭임 소리에 여생을 시달린 것 같다. 1954년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한 회의에서 그는 북한이 전쟁을 다시, 그리고 좀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시작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덜레스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주도로 적대행위가 시작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남한 부대들에 침투해 북한의 방어선을 공격하도록 꾸밈으로써 공격을 시작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했다.17)
몇차례의 다른 고위급회의에서 덜레스는 미국이 한국에서 새로운 전쟁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을 것이며, 이승만이라면 능히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몹시 우려했다. 1953년 10월에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168차 회의에서 덜레스는 이승만이 전쟁을 재개하는 것을 사전에 제압하는 데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했으며, 1957년의 332차 회의에서 그는 여전히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걱정했고 2주 후에는 “만약 한국에서 전쟁이 난다면 (…) 어느 쪽이 전쟁을 시작했는지 판가름하는 것이 사실상 매우 힘들 것이다”라고 염려했다.18)
덜레스가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합동참모본부의 요구에 동의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그는 딘 애치슨(Dean Acheson)이 한국전쟁 전에 한국에 적용했던 내전 억지력을 이용해 양쪽을 제지하기를 바랐다. 이승만과 김일성 같은 성미가 급한 사람들도 전쟁이 한반도를 핵으로 파멸시킬 것이라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뜻을 달성하기 위해 수소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바 있으며, 1954년에는 미국 상하양원 합동연설에서 수소폭탄의 사용을 요청함으로써 공화당 지지자에게마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덜레스의 핵무기는 미국의 배타적인 통제 아래 있을 것이며 북한이 대규모의 제어할 수 없는 침략을 할 경우에만 사용될 것이었다.
1958년 1월에 미국은 남한에 280밀리 원자포와 핵을 장착한 어니스트존(Honest John) 미사일을 배치했으며, 일년 후에 공군은 “핵탄두를 장착한 마타도(Matador) 순항미사일 비행대를 한국에 영구 주둔시켰다.” 사정거리가 1100킬로미터인 마타도 미사일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까지 겨냥했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의 방위전략은 어떤 새로운 전쟁에서든 일찌감치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기본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967년의 미 국방부 기동훈련 교본에 씌어져 있듯이, “한국군 12개 사단과 남한에 주둔하는 2개의 미군 사단은 (…) 방어계획을 거의 전적으로 핵무기의 조기 사용에 맞추고 있었다.”19)
예는 얼마든지 있다. 1968년 1월에 북한은 미국 간첩선인 푸에블로(Pueblo) 호를 나포했으며, 승무원을 체포해 11개월 동안 감금했다. 피터 헤이즈(Peter Hayes)에 따르면,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최초 반응은 평양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비행장에서 끊임없이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미국의 모든 F-4 전투기가 오로지 핵폭탄만 장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도자들이 사태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의 원자파괴지뢰(ADM, atomic demolition mines)는 남한에서 “진격지역을 오염시켜 장갑차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고안된 방어용 무기였다.” 이 원자파괴지뢰는 무게가 60파운드에 불과해서 배낭으로 운반할 수 있지만 20킬로톤의 폭발력을 지녔다. 한 전직 원자파괴지뢰 기술자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지역을 아무도 통행할 수 없도록 2주 정도 오염시킬 수 있다.” 『무기와 희망』(Weapons and Hope)에서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그것은 지프차로 운반될 수 있어서 그 물리적 보안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즉 적이 그것을 취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든 전술핵무기 중 가장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가 1974년에 지적했듯이 미국 헬리콥터들은 핵무기를 일상적으로 비무장지대 근처로 실어 날랐다. 그 헬리콥터 중 하나가 (1994년 12월에 소형 정찰 헬리콥터가 그랬듯이) 훈련 중에 항로를 벗어나 비무장지대 너머로 날아가서 평양에 원자폭탄을 안겨줄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 핵무기의 전진배치는 또한 ‘쓰든가 빼앗기든가’라는 심리상태를 낳았다. 북한의 소규모 공격에도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더욱이 나중에 전두환(全斗煥)정권 때 주한 미 대사를 지낸 리처드 ‘딕시’ 워커(Richard Dixie Walker)는 1975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의 재래식 전력과 심지어 전술핵 전력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것은 토오꾜오에 전략적인 보장을 확실히 해주고 일본이 독자적인 핵 억지력을 갖겠다는 프랑스식 해결을 모색하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토오꾜오의 많은 정파 지도자들이 잘 이해하고 있으며 베이징 역시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한국인의 생명은 공산주의진영을 제지하고 토오꾜오의 동맹자를 억제하는 미국의 이중 봉쇄정책의 인질이었다.20)
핵무기를 방어용과 공격용 둘 다로 사용하는 데 가장 매료된 사령관은 리처드 스틸웰(Richard Stilwell) 장군이었다. 그는 1970년대말부터 1990년대까지 계속된 팀스피리트(Team Spirit) 기동연습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다. 팀스피리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훈련으로 종종 20만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는데, 그중 약 7만명은 이미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과 다른 곳에서 증원된 해외미군으로 구성되었다. 스틸웰의 전략에서 기동연습은 “북한을 보복공격하기 위한 예비훈련”과 적의 경계선 후방에 대한 공격적인 타격을 강조하는 1980년대의 “공지전(AirLand Battle) 정책의 선구”였다. 1976년 8월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은 비무장지대 대치상태가 유난히 ‘인계철선’의 성격을 가졌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곳에서는 거의 언제든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말에 따르면 북쪽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기 위해 몇몇 미군과 한국군이 판문점 근처 비무장지대의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갔다. (그 미루나무는 덜렁 혼자 서 있었다. 판문점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지역은 전쟁 중에 맹포격을 당했기 때문에 주위에 나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안다.) 북한군이 가지를 치던 이들과 맞닥뜨렸으며, 뒤이어 일어난 싸움 도중에 한 북한 병사가 미군의 도끼를 빼앗아 그걸로 두명의 미군을 죽였다. 이것은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무장된 ‘비무장지대’의 점증하는 긴장을 고려하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21)
스틸웰 장군은 이후의 대치기간 동안 미군과 한국군에 (1953년 이후 처음으로)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했으며, 한국이라는 무대를 미군으로 장식했다.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한국 영해로 들어왔으며 핵공격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B-52 편대가 괌에서 발진해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향해 날아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회항했다.” 한 분석가에 따르면, 스틸웰은 그의 부하들이 자신과 교신이 끊겨 협의를 할 수 없게 되면 포와 로켓을 발사할 권한을 그들에게 위임하게 하는 허가를 펜타곤에 요청해 (받아냄으로써) 전술핵무기가 중앙의 명령과 통제 없이 사용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미합동 기동부대는 그들을 보호할 1개 소총 중대 전부를 실은 20대의 헬리콥터와 그들을 호위할 또다른 일곱대의 무장 헬리콥터를 이끌고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갔다. 그들은 마침내 문제의 미루나무 가지를 잘라내버렸다.22)
1991년에 나는 퇴역한 전직 주한미군 사령관이 1980년대에 개발된 미국의 전략에 대해 비보도를 전제로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1) 만약 대규모 북한군이 비무장지대 남쪽을 공격한다면 미국은 새로운 분쟁의 아주 초기단계인 ‘H+1’ 즉 전쟁 발발 한시간 이내에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것을 유럽에서 시행하기로 확립된 전략과 비교했는데, 유럽에서의 전략은 재래식무기로 침략을 지연시키며 오직 공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상대방도 핵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핵무기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지만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남한 지휘관들은 미국이 북한과의 전쟁 초기에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2) 1970년대 중반에 개발된 ‘공지전’ 전략에서는 초기에 재빨리 적진 깊숙이 공격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특히 (북한에 많이 있는) 요새화된 지하시설물에 대해 그랬다. 바꿔 말하자면, 이 전략 자체가 단순한 북한 침략의 억제보다는 북으로의 진격을 함축한다.
(3) 만약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고, 따라서 건물은 보호하면서 적을 살상해야 한다면 중성자탄—곧 소위 ‘향상된 방사능’무기—을 사용할 수도 있다. (1980년대 초의 뉴스 해설은 한국에 중성자탄을 배치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4) 북한군은 공지전 정책에 대응해 1970년대말에 확대 재배치되었다. 그 배치전환으로 북한 지상군의 거의 80퍼센트가 비무장지대 인근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국과 남한의 정보원들은 이런 확대와 재배치를 북한이 호전적인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로서 상투적으로 인용한다. (사실 그것은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든 간에 핵무기가 사용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병사들이 남한으로 내려가서 남한 군인 및 민간인과 뒤섞임으로써 핵무기의 사용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 행해졌다.)
이런 참혹한 씨나리오는 1980년대에 군의 야전교범에 적힐 만큼 표준적인 작전절차가 되었다. 연례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은 공지전 연습을 수행했다. 이것은 북한의 공격을 초기에 억제하고, 곧이어 북한으로 진격해서 궁극적으로는 평양을 장악해 접수하며, 그 정권을 전복하는 것을 뜻했다. (1993년 12월에 『뉴욕타임즈』는 그런 계획을 1면 기사로 자세히 다루면서 그 계획이 막 개발된 것이라고 오보했다.) 1980년대 초에 유럽에서는 NATO 국가들과 강력한 평화운동이 비슷한 훈련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기동연습이 한국에서 실시된 이유였다.23)
그 퇴역 사령관에 따르면, 걸프전은 핵무기의 역할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표물에 정확하게 도달하는 ‘스마트’폭탄이 등장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엉망진창의 결과를 가져올 핵탄두 사용보다 고성능 재래식무기가 더 유용해졌다. 군은 가능한 한 빨리 전장에서 핵무기를 제거하기를 원한다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구식이 된 핵무기를 1991년 가을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데 이르렀다. (40대의 203밀리와 30대의 155밀리 핵포탄 외에도 다수의 원자파괴지뢰를 포함한 핵무기가 철수했다. 그러나 공식 대변인들은 1985년에 군산에 있는 미 공군기지에 저장된 것으로 보도된 F-4와 F-16용의 약 60개의 핵중력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24)) 또한 걸프전에서 세계를 반바퀴나 돌아가는 대규모 군대의 배치에 성공했다는 인식 덕분에 한국에서 미국 지상군을 철수하라는 (주로 예산을 삭감하려는 국회의원들의) 압력에 응하기가 훨씬 쉬워졌다고 그 장군은 말했다. 그러나 물론 2만 8000명의 미군이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의 위기 때 그리했듯이, 일주일 중 어느 때든 트라이던트 잠수함이나 B-2 스텔스 폭격기가 한국 현장에 배치될 수 있다. 그런 와중에도 미국 언론은 거의 언제나 이 긴 역사를 무시하고 그 대신에 북한이 얼마나 도발적이고 위험하며, 심지어 미쳤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제는 핵을 보유한 북한을 마주한 미국은 1950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우리 자신의 핵위협과 공갈의 회오리바람이 일으킨 결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전쟁 이래 북한은 미국의 핵정책에 대항해 군부대와 군수품보관소부터 무기공장 및 지하 격납고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시설을 지하나 산간요새에 건설했다. 1970년대 중반에 평양은 박정희정부가 핵능력을 개발하려고 하자 더 큰 위협에 직면했다. 이 계획은 미국의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중지되었지만 만만찮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은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만들 독자적인 능력”을 개발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다. 남한은 또한 남아프리카, 교전 중인 이란과 이라크 같은 왕따 국가들에 무기를 공급하는 ‘배신자’라는 명성을 얻었다.25) 마치 남한이 아니라 북한을 두고 쓰인 것처럼 읽힐 법한 이런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평양의 행동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즉 평양의 행동의 상당부분은 미국의 압력과 남한의 선제행동에 대한 반응이었다.
3. 60년 후의 휴전
올해 초 북한은 2013년 3월 11일자로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이 무효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열린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그렇다면 다시 북한과의 전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 “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법적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함을 강력히 권고해두겠습니다.”
1991년 3월에 미군 사령관이 한국군 황원탁(黃源卓) 소장을 군사정전위원회의 한미합동 수석대표로 임명하자 북한이 반대했기 때문에 3월은 휴전과 관련해 중요한 달이다. 남한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1953년 이래 55명의 미국인 장교가 연속해서 그 지위에 있었다. 대한민국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협상 파트너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었다. 군사정전위원회가 3년간 기능이 마비되고 나서 북한 인민군은 앞으로는 새로운 기관인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가 위원회에서 북측을 대표할 것이라고 서면으로 발표했다.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는 지금도 여전히 군사정전위와 접촉하는 북한 측 조직이다. 1953년 이후 몇차례에 걸쳐 북한은 정전협정이 무효라고 선언했지만 협정의 어느 한 당사자가 그것을 무효화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한국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법적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주요 당사국이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데 비참하게 실패한 탓에 오늘날 정전협정과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된 매우 어려운 상황에 관해 두가지 예를 들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한 예는 항상 거짓말을 퍼뜨린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소식통인 조선중앙통신에서 가져온 것이며, 다른 예는 『뉴욕타임즈』에 게재된 칼럼에서 얻은 것이다. 어느 정보원이 정직하며 어느 쪽이 그렇지 않은지, 누가 합리적이고 불합리한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최근의 위기가 정점에 달한 4월 8일에 북한은 미국이 북한에 가한 핵위협에 관한 ‘백서’를 발간했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과 남한은 “정전 이후 북한을 겨냥해 1만 8000회 이상의 전쟁연습과 군사훈련을 남조선에서 실시했다.” 미국이 “남조선 괴뢰군대”와 협력해 자행한 전쟁연습은 “한반도, 동북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핵에 의한 대량학살을 초래할 가증스러운 핵전쟁 예행연습이다”라고 그 백서는 밝혔다. 백서는 미국이 “포커스 렌즈(Focus Lens),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 및 북한을 겨냥한 다른 전쟁연습에 사용하기 위해 남한에 어니스트존 로켓과 280밀리 원자포를 도입”할 것이라고 1957년 7월 전세계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고 기록했다. 그후 대규모 팀스피리트 기동연습이 “F-16 전폭기, B-1B 장거리 전략폭격기 및 핵잠수함을” 도입했다. 그 보고서가 이어서 밝힌 바로는 1994년에 미국은 “작전계획(OPLAN) 5026, 작계 5027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선제 핵공격을 염두에 두고서 영변을 폭격할 계획 같은 핵전쟁 씨나리오를 입안한 후 최신의 공격수단을 동원한 핵전쟁 예행연습을 했다.” 2002년 9월에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제 핵공격 대상 명단에 올린”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을 채택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2013년 기동연습에서는 “B-2A가 핵폭탄을 투하하는 모의훈련을 위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서 남조선 하늘로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두대의 핵항공모함 전대(戰隊)가 한반도 해안에 배치되었다.26)
나흘 후 역사학자인 제러미 쑤리(Jeremy Suri)는 『뉴욕타임즈』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너무 늦기 전에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지난해 12월에 위성을 우주로 발사하고 2월에 3차 핵실험을 한 것을 포함해 북한이 저지른 여러차례의 위협을 열거한 후 쑤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반도의 위기는 이제 미국의 핵심적인 국익을 해치는 전략적인 위험이 되었다. 최상의 선택은 북한의 미사일이 발사되기 전에 그것을 지상에서 파괴하는 것이다. 미국은 미사일과 그 이동발사체를 못 쓰게 만들기 위해 정밀공습을 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것이 북한의 명백한 위협과 준비된 무기에 관한 분명한 증거에 대응한 자위행위라는 것을 분명하고도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 미국이 공격하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북한이 긴장을 계속 고조시킬 수도 있고 김정은이 체면을 살리기 위해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불행한 상황에서라도 미국과 동맹국들은 아직 갈등이 주로 한반도로 국한되어 있는 지금 북한과 전쟁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북한의 백서는 (비록 미국과 대한민국의 의도에 대해서는 틀리거나 과장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실에 충실하다. 그러나 이 자료는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제 『뉴욕타임즈』로 돌아가보자. 먼저 제러미 쑤리가 사실 차원에서 저지른 오류를 살펴보자. 북한이 1953년 이래로 늘 그랬듯이 정말로 미국의 핵심적인 이익에 ‘전략적인 위협’이라는 증거가 없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 같은 신중한 전문가들은 현재의 북한 미사일은 미국에 닿을 수 없다고(그리고 만약 미국에 닿게 된다면 북한은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주장이 20년 동안이나 있어왔지만, 우리는 “준비된 무기에 관한 분명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은 세개의 플루토늄 장치를 폭발시켰는데, 하나는 실패했고, 다른 하나는 4~6킬로톤 크기이며, 마지막 것은 (60년 전의 핵 발사용 대포의 폭발력이며 원자파괴탄의 위력의 절반인) 최대 10킬로톤이다. 이런 장치들이 목표지점에 도달 가능한 무기라는 증거는 없으며, 그것들을 미사일 탄두에 적합하게 소형화할 능력이 있다는 증거도 없다.
이제 쑤리의 논리를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미국은 여전히 전쟁상태에 있는 상대 주권국가를 선제공격해서, 어떤 미사일이 미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이익에 타격을 가할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에 따라 그것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알 필요도 없이 제거한다. 그러고는 북한이 반격을 하면 북한이 ‘전쟁을 시작한’ 쪽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선제공격으로 핵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평양의 잘못이다. 쑤리는 오바마가 B-52와 B-2 스텔스폭격기로 모의 핵무기를 아주 도발적으로 투하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오웰적인 논리28)는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거의 70년에 걸친 갈등을 전혀 알지 못하고, 북한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도무지 존중할 필요를 못 느끼며 새로운 전쟁으로 희생될 수백만의 목숨에 대해 철저히 냉담한 사람에게서나 나올 수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아주 불합리하게 들린다면 그건 실제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쑤리는 그저 1994년 6월에 실행 일보직전으로 치달았던 선제적 공격전략을 되풀이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때 클린턴 대통령은 국방장관인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와 그의 고문인 애시튼 카터(Ashton Carter)의 조언에 따라 영변 플루토늄 시설에 미사일을 발사할 참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핵을 보유한 북한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만약에 이 선제공격으로 제2차 한국전쟁이 일어난다면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었다(카터는 지금 국방부 차관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이 직접 김일성을 만나 영변시설을 동결하는 데 동의하게 만듦으로써 전쟁을 향한 행진을 막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2000년 10월에 백악관에서 조명록(趙明綠) 장군을 만났다. 조지 부시는 북한을 자신의 ‘악의 축’으로 만들기 위해 그 합의를 무시하기로 결심했으며 북한이 정당하게 주장하듯이 북한을 선제공격 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지금 쑤리 교수는 클린턴의 임기말에 외교적으로 해결됐던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한 선제공격 정책의 재개를 바라면서, 부시가 그 외교를 방해하기 위해 썼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전쟁을 시작하기를 (설령 전쟁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닐 테니까 하는 식으로) 바라는 것이다.
양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들이 모두 북한에 대해 정당한 이유가 없는 공격을 계획한 것은 미국의 호전성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예인 동시에 7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실패—한국에서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끝없이 우리보다 오래 기다릴 결심을 하고 있는 적과 평화를 맺는 데서의 실패—를 놀랍게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정치 분야에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이해하려는 열정이다. 그 열정이 곧장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보존하고 방어하면서 나머지 모두를 부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무엇인가를 하려다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게 한다”라고 고(故) 크리스 마커(Chris Marker, 프랑스 작가・사진가)는 썼다. 그러므로 이 작동 불능의 관계에 바치는 묘비문으로 끝을 맺자. 북한은 여전히 반항적이고 적대적이며 아직도 우리를 조롱하고 있고, 미국은 자신의 매우 오래된 적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항상 스스로의 행동과 책임에 대한 자기변명에 급급하며 북한에 대한 어떤 적대적인 의도도 부인하지만 “이해하려는 열정”은 여전히 없다. 따라서 우리는 60년이나 되었고 (전직 국방장관 레온 파네타가 2012년에 한 말을 인용하자면) 항상 재발 “직전 상태에 있는” 전쟁을 부인하는 데 몰두해 있다.
번역 | 이진준(李鎭準)・영문학 박사
*이 글의 원제는 “Not War/Not Peace: The Korean Armistice Under A Nuclear Shadow”로, 2013년 8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학술회의 ‘동아시아에서 한국전쟁: 정전체제에서 지역 평화체제로’에 제출된 발표문의 축약본을 옮긴 것이다. 축약본의 원문은 일본정책연구소(Japan Policy Research Institute)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다(http://www.jpri.org/publications/workingpapers/wp120.html). Ⓒ Bruce Cumings / 한국어판 Ⓒ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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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나는 한국에서의 미 핵전략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미 출간된 나 자신의 저서로 종종 돌아간다. 그건 적절한 다른 저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2) 학자들이 정부와 은밀히 협의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알려주는 또 한가지 사례로, 1953년 3월말 국가안전보장회의 모임에서 코넬대학의 딘 맬로트(Deane Malott) 총장은 핵폭탄에 대한 “대중의 히스테리”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한국에 핵무기 두어개를”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Evan Thomas, Ike’s Bluff: President Eisenhower’s Secret Battle to Save the World, 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2012, 72면에서 재인용.
3) Evan Thomas, 같은 책 75~76면.
4)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54) 15: 1059~68면.
5) Rosemary Foot, A Substitute for Victory: The Politics of Peacemaking at the Korean Armistice Talks,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0, 99면과 Evan Thomas, 같은 책 80~81면.
6)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34A박스 G-3작전파일의 결론이 첨부된 1950년 11월 16일자 볼트(Bolte)의 메모 참조. 1984년 9월에 열린 트루먼 시대에 관한 우드로윌슨센터의 학술회의에서 바튼 번스타인(Barton Bernstein)이 준비한 발표문 「한국전쟁과 봉쇄」(The Korean War and Containment)에는 고어의 말이 1951년 4월 중순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리지웨이의 요구에 대해서는 38-A박스 G-3파일의 「필요한 조치들」(Actions Necessary) 참조.
7) 「필요한 조치들」이라는 제목의 하스브록(S. V. Hasbrouck)의 1951년 11월 7일자 메모, 육군 참모총장에게 보내는 1951년 11월 20일자 메모, Schnabel and Watson,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및 The Korean War 제1부 v면과 제2부 614면, 그리고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RG349, FEC G-2 Theater Intelligence, box 752, 1951년 9월 30일자 CINCFE to CG SAC(“Requests SAC to execute simulated atomic strikes on tgts. vic. CT402453 and CT576484”)와 1951년 10월 1일자 CG FEAF to 98th Bomb Wing commander, Okinawa, 1951년 10월 13일의 작전 적요(“지상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핵무기의 전술적 사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다”) 참조. 허드슨항 작전에 관한 많은 문서는 여전히 기밀로 취급되고 있다.
8) 쌔뮤얼 코언은 허먼 칸(Herman Kahn,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전략이론가—옮긴이)의 어릴 적 친구였다. Fred Kaplan, The Wizards of Armageddon,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3, 220면 참조.
9) Hermann Lautensach, Korea: A Geography Based on the Author’s Travels and Literature, Trans. Katherine and Eckart Dege, Berlin: Springer-Verlag 1945, 1988, 202면.
10) Conrad C. Crane,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0, 160~64면.
11) Karig, Walter, Malcolm W. Cagle, and Frank A. Manson, Battle Report: The War in Korea, New York: Rinehart 1952, 111~12면.
12) Rosemary Foot, A Substitute for Victory, 1990.
13) Foot, 같은 책 232면.
14) Jörg Friedrich, The Fire: The Bombing of Germany 1940~1945, trans. by Allison Brow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75면, 89면 및 Foot, 208면, Crane,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2000), 126면, 168~71면.
15) 2차대전 후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배하려는 프랑스를 상대로 1954년에 베트남이 마지막으로 벌인 전투. 베트남의 승리로 프랑스군이 철수했다—옮긴이.
16)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장군. 맥베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며, 그후 맥베스는 그의 유령에게 시달린다—옮긴이.
17) NSC 179차 회의, 1954.1.8, Anne Whitman file, Eisenhower Library, box 5.
18) 같은 자료 boxes 4 and 9.
19) Peter Hayes, Pacific Powderkeg: American Nuclear Dilemmas in Korea, Lexington, MA: Lexington Books 1991, 35면.
20) Hayes, 같은 책 47~50면, 58~59면.
21) Hayes, 같은 책 60면.
22) Hayes, 같은 책 59~62면. 한편, 워싱턴의 또다른 정보제공자는 내게 이 에피소드에서 ‘억지력’을 발휘한 사람은 실제로 스틸웰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멀리 떨어진 워싱턴에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다가오는 선거에서 레임덕에 빠진 제럴드 포드(Gerald Ford)의 승산을 높이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23) Hayes, 같은 책 91면.
24) Hayes, 같은 책 94~95면.
25) Janne E. Nolan, Trappings of Power: Ballistic Missiles in the Third World, Washington: The Brookings Institution 1991, 48~52면.
26) 조선중앙통신 2013.4.8.
27) Jeremy Suri, “Bomb North Korea, Before It’s Too Late”, New York Times Op-Ed, 2013.4.12.
28)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장편소설 『1984』에서 그려지듯이 선전활동을 위해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것을 말한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