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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경미 金慶美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쉿, 나의 세컨드는』『고통을 달래는 순서』등이 있음. lilac-namu@hanmail.net
전문가
1
남탕의 이발사 할아버지는 남자머리 하나를
최소 네시간 걸려 깎는 것으로 유명하다
목을 따거나 토막내달란 것도 아닌데
한쪽이 낮으면 다른 쪽 턱을 좀 자르고 왼쪽이
짧으면 오른쪽 눈꼬리를 자르며 자오선의 콧날까지
좌우대칭의 수천마리 나비날개들 잡아다
이마 숱이 틀리면 눈썹을 뽑아다 심으며 두시간 반
세시간쯤부터면 찰칵대던 흑백사진기 속 증명사진에
연한 살구빛 반창고와 갓 찍은 청잉크자국들 돋아
마침내 목에 두른 백골의 휘장 거두면
깜쪽같이 되붙은 목 하나
2
하루에 목 하나 남아날까 말까 하는
묘지 봉분같이 둥근 바깥 소파에 앉은
나도
네시간 동안 마당가 수국꽃에서 물을 길어올려볼까
막다른 골목길에 연못을 파볼까 노래를 네시간 불러볼까
울어를 볼까 네시간 두가지를 함께 해볼까
깊숙이 목 잘리워가는 동안에도 무료한 짐작 외에는
달리 무엇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들어가본 적 없는 탕,
총소리 세듯
네시간이라는 전문가를 세어보고 있다
육식성의 아침
오늘의 식탁은 청록색 호수다
식탁 위 가없는 접시엔 갓 뽑은 몇그루 나무들
뿌리째 눕혀져 있다
채소를 먹으면 귀가 청명해지고 목이 길어진다지만
오늘의 나는 중요하다
곧 물 먹으러 온 저 코뿔소가 접시에 놓일 것이다
인류의 범위는 절벽 위 산양에서부터
이에 피가 끼는 식인종까지라는데
그중에 나는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겠을 땐 자신을 제일 앞에 두라고
혀를 제일 앞에 두라고
그들은 전쟁터에서 해먹기 좋은 30초 요리책을 펴내고
그토록 소중하다 하므로
붉은 나팔꽃 같은 아침부터 육식을 해야 한다
식탁이 딛고 있는 바닥은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