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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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金經株

1976년 광주 출생.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기담』이 있음. singi990@naver.com

 

 

 

개명(改名)

 

 

오래전 문득

 

개명을 하고 작명집을 나오는 사람의 표정이 궁금한 오후가 있었다

 

그때 저녁은 빈 교실 칠판에 분필로 북북 흩어놓던 새 때 같은 거

그때 기별은 점집 무녀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죽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거

 

오래전 문득

가계(家系)에 없는 언어로 개명을 한 후

묵은 이름을 잊기 위해

그 이름을 구름으로 옮기고 있을 때

 

어느 문장 속에 떠오르던 내 무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덤의 이름이 끝끝내 생각나지 않는다

그 곡해를

내 피로 흩어진 한 짐승의 동요(童謠)라고 불렀을 때

그때 그 동요(動搖)는

자신의 이름을 떠난 한 짐승의 숲이 되었다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개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단 하나의 곡마단을 생각해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잠든 날엔 저녁 무렵에만 깨어나기로 하고, 이 이름을 잊은 날엔 저녁으로만 만들어진 물병을 뒤집어놓고, 발등에 그린 새의 피를 빼내다가 잠들기로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본 저녁의 계명은

분필로 혼자서 칠판에 북북 흩어놓던 새 때의 분진 같은 거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닥에 가루로 흘러내린

그 모래의 이름을 이제

나는 쓸 것이다

 

나의 가계엔 내 피가 안 통하는 구름이 있다

 

 

 

바늘의 무렵

 

 

바늘을 삼킨 자는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흘러다니는 바늘을 느끼면서 죽는다고 하는데

 

한밤에 가지고 놀다가 이불솜으로 들어가버린 얇은 바늘의 근황 같은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끝내 이불 속으로 흘러간 바늘을 찾지 못한 채 가족은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

 

그 이불을 하나씩 떠나면서 다른 이불 안에 흘러 있는 무렵이 되었다

이불 안으로 꼬옥 들어간 바늘처럼 누워 있다고, 가족에게 근황 같은 것도 이야기하고 싶은 때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그 바늘을 아무도 찾지 못했다 생각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가혹이 있다

 

발설해서는 안되는 비밀을 알게 되면, 사인(死因)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궁녀들은 바늘을 삼키고 죽어야 했다는 옛 서적을 뒤적거리며

 

한 개의 문(門)에서 바늘로 흘러와 이불만 옮기고 살고 있는 생을, 한 개의 문(文)에서 나온 사인과 혼동하지 않기로 한다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줄 때는 그게 누구의 손이라도 눈물이 난다 하나의 이불로만 일생을 살고 있는 삶으로 기꺼이 범람하는 바늘들의 곡선을 예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