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기택 金基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등이 있음. samoowon@hanmail.net

 

 

 

커다란 나무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구직

 

 

여러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썬글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되면 미련 없이 걷어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번 입어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정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싸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고쳐주는 세상 아닌가

이깟 수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들이 와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이 있지 않는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