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김신용 金信龍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버려진 사람들』『개같은 날들의 기록』『몽유 속을 걷다』『환상통』『도장골 시편』등이 있음.
벚꽃 아래
한낮의, 성당 마당의 벚꽃 그늘 아래
휠체어에 앉은, 요양원에서 부축받아 나온, 중풍의, 치매의 노인들이 노래자랑을 하고 있다
노래는, 반신불수의, 굳은 기억의 관절을 풀어주는 치료요법이겠지만
소풍 나온 어린아이들처럼 즐겁다. 입가에 침은 흘러내리지만
캄캄한 기억의 갈피에서 ‘동백아가씨’가 걸어나오고
불쑥, 뜬금없이 웬 ‘기미가요’까지 튀어나와, 벚꽃 그늘을, 의치의 크로마뇽인처럼 웃게 만들지만
부풀어오른 벚꽃 그늘은, 파란만장, 무의탁의 구름처럼 떠 흐른다
아, 저 묘비명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들판의 제비꽃이나 엉겅퀴로는 읽을 수 있으려나?
그러나 노래는…… 꽃그늘에 인공호흡기처럼 매달려 있어
그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한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아
의족을 짚은 듯 자꾸만 삐걱이는 노래 따라, 손뼉 박자를 맞추어주고 있노라면
세상과 불화의 이물질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돋고 있는 듯한, 그 무균질의 웃음들이 하르르 하르르 떨어져내려
의치의 크로마뇽인 같은 봄의 그늘에, 하얀 치아처럼 반짝인다
한낮의, 햇빛 환한 성당 마당의 벚꽃 그늘 아래
물방울 춤
흐르는 냇물에 한 다리를 들고 서 있는 백로를 본다
저 껑충한 키에 외다리라니! 물음표 모양의
가시관을 쓴, 무슨 천형처럼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표정은 오선지에 음표라도 떨어뜨리는지 골똘하다
물 밑의 불립문자들이 지느러미라도 파닥이는지
오로지 한가지 생각만으로 무념무상이다
그 반가사유는, 맺힌 물방울처럼 곧 떨어질 듯 아슬해 보이지만
무대 위의 발레처럼 우아해 보이기도 한다
물의 백지에 묵언의 긴 편지를 쓰는 물방울의 펜촉 같기도 하다
그 사유의 부리는 불확실한 생의 언표 위에만 머무는 것 같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말해질 때처럼,
오래 물에 담겨, 차가워진 발을 바꾸어 다시 물을 딛는다
여전히 해독할 수 없는 껑충한 키에, 외다리이다
그러나 물 바깥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한쪽 발의 체온은
면벽의 물거울에 비친 얼굴에 발그라니 핏기를 돌게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의 恒念이다
물음표 모양의 가시관이 白勞처럼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