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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백상웅 白象雄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 수상. bluepostman@naver.com
불법
저 밭뙈기를 소리로만 듣자면 가지꽃이 한이랑 자리잡고 장맛비에 온종일 멍들고 있는 적막이다. 옥수숫대며 호박줄기 속에서 적막은 범람하고 이내 계곡에서 여울진다. 잎사귀가 팔랑이며 젖은 하늘을 끌어당기는 이 텃밭은 임자 없는 집 마당이다.
누가 허락 없이 고랑을 파서 멀쩡한 마당을 중늙은이로 만들었겠는가. 누가 내려앉은 집의 천장을 밀어내고 들깨꽃을 피워냈는가. 집이 지구의 맞은편에 담벼락 쌓아 창을 내고, 기왓장이 거북이 등짝처럼 두둑에 박혀 발버둥치는데도 땅을 놀리는 것은 오히려 심심한 일이다. 이 동네의 호미며 괭이가 주름을 긁어내 씨앗을 뿌려 마당을 나눠가졌다. 상추며 고추에 찍힌 지문이 죄다 다른 이유이지만, 사람들이 경계를 넘나들며 약도 쳐주고 김도 매주고 하니, 밥상에 오른 것들의 국적은 주인 없는 집 마당뿐인 것이다.
능소화 넝쿨은 그새 장대비를 우지끈 감아 오른다. 밭뙈기에 불어닥친 호박꽃 같은 폭풍을 뿌리가 어찌 외면하겠는가. 문짝 잃은 냉장고는 언제까지 속으로 호박을 키울 것이며, 밭 한가운데 솟은 책꽂이는 언제까지 밭이랑을 포개 꽂아놓을 것인가. 빗물이 밭에 쇠고랑을 채워도 시장통에 내다 팔지도 못할 것들은 한뼘씩 자라난다. 모두 이 동네의 밥상 때문이 벌어진 일 아니겠는가.
뜨끈뜨끈하던 보일러 관에도 빗물이 흘러들어 사라진 방바닥 밑 어딘가에는 금속으로 된 뿌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잎사귀끼리 부딪칠 때마다 천둥소리가 굴러다니고 번개를 불러온다. 이 산맥의 관리들은 게을러서 먹구름이 모두 파종될 때까지 낮잠을 잘 뿐이다. 꿈꾸는 동안에도 집세를 꼬박꼬박 낼 필요 없으니, 누군들 주인 없는 집에 살고 싶지 않겠는가. 또 무허가 텃밭의 재건축을 관장하는 것은 오직 숟가락과 젓가락뿐이니, 장맛비에 장단을 맞춰도 흉보지 않을 일이며 같이 껴서 어깨라도 흔들 일이다.
쥐뿔
손가락만한 쥐가 잡혔다
쥐덫 위에 멸치를 올려놓고 반달을 기다려 마침내 쥐뿔을 얻었다
쥐뿔은 장미꽃 가시 크기부터 갈치 가시 크기까지, 원통형으로 생긴 뿔부터 사슴벌레 뿔 모양의 뿔까지,
크기며 모양이 쥐 울음소리만큼 다양하여,
뿔도장이 되어 이름을 찍거나 호미 대신 흙을 뒤집기도 하는, 날카로운 창날로 제련되기도 하는 유용한 재료다
내가 얻은 뿔은 어린 탱자나무 가시처럼 생겼다
흔히 볼 수 있는 뿔이기에 싼값에 내놔도 살 사람이 없다
근래에는 쥐뿔도 모르는 게 당연한 일로 치부되지만, 예로부터 쥐에게 뿔을 씌워온 것은 인간이다
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손바닥으로 바닥을 칠 때, 아침부터 반찬투정 하거나 그것 때문에 언성을 높일 때, 쌀독에 쌀을 쏟아붓는 순간이나 못을 기껏 박고 다시 빼낼 때,
허공의 울림이 쥐머리 위에 쌓여 뿔이 되는 것인데,
이때 파문은 동굴에서 자라는 뿔처럼 암흑뿐이라, 쥐는 그때부터 구멍에서 숨어살게 되었다
처음에 수컷에게만 생겼던 뿔이 새끼치고 새끼칠수록 후대의 암컷에게도 솟아났다고 하니,
어둠속을 울리는 소리만큼 명확한 유전이 또 어디겠는가
쥐덫에 물려 가죽밖에 남지 않은 쥐, 굶주려서 죽기 직전에 눈물깨나 흘렸을 쥐, 털이 뒤덮인 손가락만한 울음이었을 쥐,
나는 탱자나무 가시 크기의 쥐뿔이나마 열심히 수집해 낮은 울타리를 만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