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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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朴濬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음. mynameisjoon@hanmail.net

 

 

 

자취

 

 

한해살이풀이 죽은 자리에 다시 한해살이풀이 자라는 둑과 겨울 동안 살을 굳힌 숭어와 단단한 살을 파며 부리를 벼린 겨울새들의 천변(川邊)을 마주하면 적막도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다만 낯선 소리라도 듣고 싶어 얇은 회벽에 귀를 대어본 새벽녘에는 서로의 무렵에서 기웃거리던 우리의 허언 같은 것들로 더없이 소란했다.

 

 

 

쑥국

 

 

방에 모로 누웠다 나이 들어 말이 어눌해진 아버지가 쑥을 뜯으러 가는 동안 나는 저녁으로 뜯어오는 쑥에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한다 내가 남도에서 자란 얼굴이 검고 종아리가 두꺼운 사내였다면 된장 대신 도다리 한마리를 넣어 맑게 끓여냈을 수도 있다 낮부터 온 꿈에 당신이 보였지만 여전히 말 한마디 없는 것에 서운하다 서향(西向) 집의 오후 볕은 궂기만 하고 나는 벽을 보고 돌아누워 다시 잠이 오거나 신발을 끌며 들어올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