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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태형 金泰亨
1970년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함. 시집 『로큰롤 헤븐』『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등이 있음. offoff@korea.ac.kr
밀주
차창룡 형에게
잘못 마시면 눈이 멀지도 모른다 했습니까
금주령이 내린 어디 구자라트 주에서는
백여명이 하룻밤에 모두
짓끓던 목숨을 잃었다지요
사람을 속이는 그런 술을 찾아온 건 물론 아니겠지요
늙은네들이 모여앉아 마시는 허연 밀주
투박한 대접으로다 한잔 받아들고 싶었습니다
모두 즐겁게 몇잔을 더 돌리는 동안
아무래도 나는 그 한잔 술에 그만 눈이 멀 것만 같습니다
발음이 서로 다른지 시장통 사람들도 잘 모르네요
그런 술은 사라졌다는 이도 있네요
우연히 지나치다 들으니
가끔 그런 술을 만들어 먹는 집이 있기는 있다는군요
저기 어디 골목을 돌아 내려가면 된다는데
우르르 모여서 가지는 말고
한 사람씩 꼭 조용히만 가보라는군요
파는 게 아니니 그저 한잔씩 얻어 마시라는군요
그런 술을 내게도 권하셨지요
눈이 멀어 오도 가도 못하고
그만 앉은자리에서 미쳐버릴지도 모를 그런 밀주를
나 역시 한잔 들이켜고 싶었습니다
몇대를 이어 집안 구석구석 군내 나는 그런 기억들을
세찬 바람만이 넘어가던 저 돌들의 언덕을
나는 두 눈을 바치고서야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을 또 어둠처럼 보게 될까요
제대로 된 밀주라면 정말 사람을 알아보겠지요
그런 밀주라야 어디 한번 목숨 걸고 마셔보지 않겠습니까
두고 온 신발
살림살이 다 내놔봐야 작은 나무상자 하나뿐이라는 듯
헌신 깁는 사내가 언덕 위에 앉아 있다
손으로 한 땀씩 꿰매고 있는 낡은 신발을 본다
끈 떨어진 신발을 여기까지 들고 왔다
비좁은 신발장 구석에서
몇 계절 냄새마저 다 빠진 쌘들 한짝
이 먼 힌두사원 앞까지 싸들고 왔다
떨어진 끈 하나 고치는데
이곳저곳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제는 버려도 될 만한 신발을
굳이 여기까지 와서 고치고야 마는
나도 참 궁벽하지만
뭐라도 하나 고쳤다는 게 어딘가
신고 갔던 슬리퍼는 이제 필요 없다고 하자
언덕 위의 사내는 흔쾌히 거두어갔다
다음날 그의 나무상자 앞에
내 슬리퍼가 한짝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옆에서 맨발인 채 자고 있던 아이에게는
너무 크고 헐렁하겠지만
또 굳이 신고 다녀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저 슬리퍼를 신고서 앉아 있을 것이다
검은 진흙으로 질척한 언덕 아래를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잠시 두고 온 것만 같다
어디선가 지친 몸 쭈그리고 앉아서
길 가다 말고 다시 신고 있어야 할 그 슬리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