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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재훈 李在勳
1972년 강원도 영월 출생.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등이 있음. ipoet@hanmail.net
말벌들
물길을 다스리지 않았다
대신 날았다
허공을 향해 매일 목청껏 부르짖었다
붉은 새 한 마리
내 울음을 채간다
햇살이 내린다
가득 내린다
투명한 햇살 사이를 날아다녔다
언제 저렇게 운 적이 있었을까
앵앵,
타인들도 모두 도망갔다
울다 지치면, 낯선 몸을 찾았다
참을 수 없는 모멸을 가득 쏟아놓았다
비가 내렸고 습도가 높았다
높은 곳에서 듣기 싫은 울음이 들렸다
그럴 땐 슬픔을 탐했다
결정적으로 영혼을 판 적도 있다
소금 가득한 물 위를 날아
독침을 질질 흘렸다
황홀하게 죽는 것처럼, 황홀하게
봄바람이 불자 온몸이 노랗게 익었다
영혼까지 맑았다
갈대 사이에 안개가 있었고
안개를 헤치면 꽃이 보인다
달콤한 꿀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말벌들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붉은 얼굴,
벌에 잔뜩 쏘여 퉁퉁 부었다
잉잉대는 소리 들린다
나는 증명받고 싶지 않았다
고백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말인가
먼 불빛 먼 창에서
안개 흩어지는 소리
나무 부서지는 소리
앵앵, 들린다
쿠스코
어머니, 저는 거품에서 나왔나요. 바다의 사람은 아니지요. 웅덩이의 사람이지요. 누나는 넋을 불러 모으려 들창을 열다가 저를 보았대요. 사부작사부작 벽을 갉아먹고, 시멘트 가루를 입가에 묻히며 나왔대요. 기록되지 않는 출발이었대요. 어머니 제겐 왜 아리랑을 불러주지 않고, 이방의 민요를 불러주셨나요. 첵첵첵. 저는 리듬이 좋아요. 구슬픈 산조(散調)보다 발코니에서 꼬냑을 먹고 몸을 흔드는 게 좋아요. 울지는 않을게요. 대신 선비처럼 수염을 기를게요. 또 어머니처럼 성경을 읽을게요. 포도주를 마시고 어머니의 피를 생각할게요. 골목은 늘 좋아요. 절정이 없는 골목들. 도시의 적막만이 제 발길을 잡죠. 비행기는 싫어요. 콘도르를 탈래요. 거칠게 노래할래요. 먹고 토하면서 천상을 꿈꿀래요. 풀지 못한다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전할게요. 저는 매일 세모로 살아요. 쓸모없이 각만 세우는 제 이성이 유일한 보람이에요. 쿠스코는 가본 적 없어요. 오래된 제국의 문명이 골목처럼 남아 있다죠. 그래도 마냥 좋아요. 숙명처럼요. 이곳과 저곳이 문제는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배꼽이 간지러워요. 배꼽에서 수염이 나오려나 봐요. 앞니를 인간의 낙서 가득한 벽에 갉아야 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