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 신예소설가특선

 

최은영 崔恩榮

1984년 경기 광명 출생.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euni153@naver.com

 

 

 

먼 곳에서 온 노래

 

 

봄학기 강의를 마치고 뻬쩨르부르그에 왔다. 미진 선배가 뻬쩨르부르그 대학원에 입학한 때가 2005년이었으니 이 도시에 놀러 오겠다는 약속을 10년 만에 지킨 셈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곳에 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남는 건 시간이고 부족한 건 돈이었으니, 돈만 생기면 언제든지 미진 선배를 보러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출국 전날 율랴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초록색 롱원피스를 입은 동양 여자가 보이면 나인 줄 알아달라고. “솔직히 내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아 보이니까 율랴가 나를 찾아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율랴는 출국 게이트에서 허둥대는 내 어깨를 잡고 웃어 보였다. 미진 선배가 사진을 보낼 때마다 선배 옆에서 별다른 미소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던 폴란드 여자. 짙은 일자 눈썹, 회색 눈, 얇은 입술 때문에 꽤 차가운 얼굴로 기억했지만, 실제로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주소만 알려주면 알아서 찾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도 율랴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가고 싶으니까 가는 거예요. 소은은 소중한 손님이니까. 그럴 수 있게 해주세요”라며 굳이 마중을 나왔다. “우리 집에서 버스 타고 20분 정도 가면 미진 연구실이에요. 미진이 자주 가는 여름정원은 우리 집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고. 미진이 좋아하는 베트남 음식점도 알려줄게요.” 능숙한 영어는 아니었지만, 알아듣기 쉬운 발음으로 율랴는 천천히 말했다.

“그녀와 얼마나 같이 살았다고 했죠?”

3년쯤. 내가 이 집에 들어오고 플랫메이트로 처음 구한 사람이 미진이었어요. 미진이 연구소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까지 같이 살았으니까요.”

플랫 건물은 미음자 모양이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복도식 아파트였는데, 도넛처럼 가운데가 뻥 뚫린 공간에 정원이 있었다. 율랴의 집은 그 건물 3층에 있었다. 방 둘에 화장실 하나, 거실 하나, 세탁실 하나, 부엌 하나의 작은 공간이었다. 율랴는 현관문 앞에 신발을 벗어놓았다. “미진과 함께 산 다음부터 집에서 신발을 벗어요. 습관이 되니 이게 편해서.” 발바닥에 닿는 나무 바닥이 부드럽고 차가웠다. “여기가 미진 방이었어요.” 그녀가 방문을 열자 은은한 계피향이 났다. 싱글 침대 하나, 오크나무로 만든 커다란 책상 하나, 텅 빈 책장과 삼단 장식장, 옷장 하나가 보였고, 커다란 창으로 늦은 저녁 햇살이 내려왔다.

“한동안 플랫메이트를 받지 않았어요. 이 방도 사람이 반가울 거예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이제 여기가 소은 집입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미진 선배가 3년간 사용했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침대에 누워 미진 선배의 시선으로 벽과 천장을 응시했다.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지만 바로 잠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이미 오전 열시였다. 모스끄바 공항에서 여섯시간 동안 환승 대기를 해서인지, 그 전날까지 학생들 시험지를 채점하느라 잠이 부족해서였는지, 아침에 율랴가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로 깊이 잤다. 부엌으로 가니 식탁에 토스트와 사과, 삶은 계란, 오렌지 마멀레이드가 있었다.

냉장고에 우유와 주스가 있습니다. 커피메이커에 진한 커피가 있습니다. 즐거운 하루!

율랴는 시내 지도에 현재 위치를 별 모양으로 표시하고, 지도 곳곳에 점을 찍은 뒤 설명을 달아놓았다. 미진의 연구실, 미진의 아파트, 베트남 음식점, 여름정원, 정교회 성당…… 그 옆에 몇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까지 적어놓았다.

 

*

 

선배는 리넨 소재의 하늘색 썬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헐렁한 옷이 아닌데도 몸이 작아 자루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담배를 한 손에 들고 골똘히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짧고 가는 머리카락이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먹을래. 너는?” 나도 같은 걸로 먹겠다고 하니 선배가 웨이터를 불러서 러시아어로 주문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서울과 뻬쩨르부르그의 날씨와 서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왜 이리 늦게 왔어? 금방이라도 놀러올 것처럼 얘기해놓고서.”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네가 덮어두고 미안하다고 말할 때마다 무안해진다.”

“정말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이라도 네가 와줘서 좋기만 한데.” 그렇게 말하는 선배의 얼굴 위로 나무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여기서 선배랑 있으니 마로니에공원 담장이 생각나요. 담장 옆에 나무가 있었잖아요. 덕분에 여름에 그늘에 앉아 시원하게 공연할 수 있었고.” 내 말에 선배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퍼졌다. 내가 처음 만났던 선배는 스물다섯살, 노래패 고학번 선배였다.

우리는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 저녁에 마로니에광장에서 공연을 했다.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이 그저 우리의 목소리만으로 노래했다. 광장의 나지막한 담장이 우리의 무대였다. 우리는 담장 위에 올라가 팔짱을 끼고, 가끔은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차츰 어둠에 잠기는 공기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가 섞이는 동안에는 자질구레한 생활로부터도, 몸으로부터도, 무거운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살과 뼈가 점점 무게를 잃어가는 기분, 내 몸이 작은 열기로도 쉽게 상승할 수 있는, 속이 텅 빈 풍등이 된 기분이었다. 가는 끈만 끊어버리면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어. 누구도 나를 속박할 수 없어. 그럴 때면, 내가 아마도 노래 부르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다고, 이렇게 노래 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 야외공연을 했던 4월의 저녁을 잊을 수 없다. 준비한 레퍼토리가 다 끝났을 때, 미진 선배가 계획에 없던 독창을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췄고, 나도 다른 동기들도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맑고 여린 목소리에 강단이 있었고, 멜로디나 가사를 떠나서 목소리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선배의 노래가 날카롭고도 부드럽게 내 속으로 들어오자 내가 겨우 감추고 숨겨온,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내 속의 한 조각이 속수무책으로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선배의 노래는 나를 부끄럽게도, 슬프게도 했다. 선배의 가느다란 어깨를 두 손으로 누르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얹고 싶었다. 그 자그마한 입속으로,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선배의 세계에 한발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었다. 선배와 가까워지기 전의 일이다.

우리는 여름정원을 함께 걸었다. 대리석 분수대 위로 물줄기가 솟아올랐고 바람이 불어 물줄기의 작은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선배와 나를 덮었다. 정수리로 따뜻한 햇살이 내렸다.

“러시아에서 살기 힘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는 똑똑한 축에 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니까 가장 뒤처지는 축이었지. 그게 당황스러웠어. 언어가 안됐으니까. 율랴를 만나지 않았으면 중도에 포기했을 거야. 걔가 날 많이 도와줬어. 우린 여러모로 비슷했지. 성격이 불같은 것도.” 선배의 창백한 팔에 푸른 정맥이 도드라졌다.

“가끔 햇빛도 좀 보고 그래요. 걸어다니는 백설기도 아니고.” 내가 타박하자 “백설기 먹고 싶다” 하고 선배가 길게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나한테 말 안 놔? 수현이 같은 애들한테는 언니, 언니 하면서 반말하잖아.” 강변까지 걸어갔을 때 선배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때는 학번 차이도 많이 나고, 선배가 저에게는 큰 사람이었거든요. 어른처럼 보여서 함부로 말 놓고 그럴 수가 없었어요. 선배가 다감한 사람도 아니었잖아요.”

다른 선배들은 나를 귀한 새내기로 대접해줬지만 미진 선배만은 예외였다. 선배는 내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내가 동아리방에 들어가면 안녕, 다음에 보자, 같은 말도 없이 가방을 싸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길을 걷다 마주쳐서 인사를 건네면 굳은 얼굴로 가벼운 목례만 하고 나를 피하듯이 걸어갔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선배의 그런 행동이 그저 낯가림 심하고 말주변 없는 사람의 최선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선배 그때 왜 그랬어요?” 내가 묻자 선배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내가 오래도록 사랑하고 미워하고 오해했던 선배의 얼굴.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벤치에 앉아 네바 강 위로 일렁이는 햇살을 바라봤다.

 

*

 

“미진 잘 만나고 왔어요?” 율랴가 물었다.

“네. 연구실 근처에 갔다가 여름정원에 들러서 강변까지 걸어갔다 왔어요.”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 여자가 메뉴판을 들고 와서 율랴와 러시아 말로 대화를 나눴다.

“누구냐고 물으시네요. 미진 동생이냐고. 그래서 미진 친구라고 말했어요. 어제 서울에서 왔다고.” 여자가 나에게 러시아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미진과 닮아서 가족인 줄 아셨대요. 뻬쩨르부르그 여행 잘하라고. 밤에는 지하철 타지 말라고. 위험하대요.” 나는 고맙다는 말을 러시아말로 전했다. 볶음국수와 스프링롤을 먹고 우리는 천천히 율랴의 플랫으로 걸어갔다.

“이젠 미진과 왜 싸웠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율랴가 말했다. “상처 될 말 실컷 해놓고, 눈앞에서 그녀가 죽어도 눈물 한방울 안 흘릴 자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증오한 적도 있었어요. 이민 가방에 짐을 싸는 그녀더러 빨리 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쳤어요.” 율랴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 있어요.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율랴. 그녀가 저더러 말했어요. 율랴 덕분에 러시아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고. 몇번이나 그 말을 했어요. 정말 고맙다고.” 그 말을 듣고 율랴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둘 다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하다보니 오해가 많았어요. 문화도 달라서 미진이 농담이라고 한 말이 나에게는 모욕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지요. 그건 미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둘 다 의지할 데가 없는 처지여서 날마다 붙어다녔어요. 그러다보니 기대하게 되고 그만큼이나 실망하게 된 것 같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지막에 왜 그렇게 싸웠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작은 싸움들이 쌓여서 그렇게 된 것 같기는 한데, 왜 기억나지도 않을 일로 그녀를 그렇게 몰아세웠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당신에게 미안한 게 많을 거예요. 나도 그녀를 알아요, 율랴. 다혈질이잖아요. 감정을 꾸며 말할 줄도 모르고.”

“맞아요, 맞아.” 율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일이 많았을 거예요. 한국어랑 러시아어는 완전히 다른 말이니까. 폴란드 사람이 러시아어를 배우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겠지요. 늦은 나이에 언어를 시작해서 더 어려웠을 테고, 자존심도 셌으니까. 그때는 그 자존심이 그렇게나 거슬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 때문에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율랴의 부엌 식탁에서 오렌지주스에 탄 보드카를 몇잔 나눠 마셨다. 대화가 자주 끊겼고,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율랴가 말했다. “소은은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이야기 자주 들었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녀는 벽에 걸린 말린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소은. 어린애들은요, 어른이 한 말을 다 진짜로 믿고 받아들여요. 평생 그 말과 함께 살아가는 거지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가 저에게 말했어요. 너는 쓸모없는 계집애야. 덩치만 큰 계집애. 눈에 띄지 않고 싶었는데도 자꾸만 몸이 커졌습니다. 웅크리고 다니면 조금이라도 작아 보일까 해서 구부정하게 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사라지고만 싶었습니다. 러시아 남자가 청혼했을 때 도망치듯 그와 결혼해서 여기로 온 건 그런 이유였지요. 그가 저를 무시하고 저에게 이유 없이 욕을 해도 그 사람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저와 결혼까지 해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봅니다.” 율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결국 그와 헤어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미진이 집을 보러 왔어요. 같이 살기로 하고, 밤마다 이 식탁에 앉아 이야기했지요. 미진이 러시아에 온 지 1년밖에 안돼 어려운 점이 많을 때였습니다. 저에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기꺼이 들어줬어요. 같이 이민국에도 가고 학교에도 가고, 미진이 러시아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제가 대변인처럼 말해주고. 미진은 저에게 고마워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저는 저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제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제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저를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

 

*

 

도스또옙스끼 생가 앞에서 선배를 보았다. 선배는 군청색 반바지에 흰 라운드티셔츠를 입고 검은 배낭을 멘 채 벽에 기대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선배의 머리칼 속에 숨겨진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 깃든 표정이 아이 같았다.

우리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고 조용히 도스또옙스끼의 집 안을 걸어다녔다. 괘종시계는 그가 죽었던 시간에 맞추어 멈춰 있었고, 벽에는 그가 그린 그의 자녀들 초상이 붙어 있었다. 그가 평생을 빠져 지냈던 룰렛 기구가 전시된 곳도 있었다.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도스또옙스끼의 집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나를 한번 보다 했다. 그의 초상화 앞에서 우리 둘은 한참 서 있었다. 우리가 함께 살 때, 선배의 책상 위에 있던 그 초상화였다. 학번 차이도 많이 나고,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해서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했던 우리 둘을 도스또옙스끼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묶어줬었다.

선배가 도스또옙스끼의 소설을 공부하러 러시아로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선배가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길어봤자 7년 안에는 끝날 유학생활이라고는 했지만, 그 말이 말 그대로 들리지 않았다. 언제고 선배를 다시 볼 수 있다고 되뇌면서도 깊은 마음속에서는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선배가 러시아에 가기 직전까지 3년을 같이 살았다. 선배가 집을 나가기 전날, 아르바이트비를 크게 헐어서 장을 보고 선배가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만두, 김밥, 콩나물국, 잡채, 두부 샐러드에 맛탕, 수박화채를 만들어 상에 내놓았다. 커다란 김밥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선배를 보면서 이 사람이 타국에 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선배가 떠난 텅 빈 방에 앉아 남은 잡채를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고기도 못 먹는 사람이 러시아에 가서 뭘 먹고 다닐지 막막하게 걱정했을 뿐이다. 그런 그럴듯한 걱정으로 나의 깊은 상심과 슬픔을 덮고 속이는 일에 나는 익숙했다.

 

선배와 처음부터 가까웠던 것은 아니다. 5월 축제기간까지도 선배와 직접적으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노래패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으러 가게 되면 선배는 나와 꼭 다른 테이블에 앉았고, 홈커밍데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홈커밍데이 뒤풀이가 열린 술집 지하에서 선배는 내 옆 테이블,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었다. 선배의 옆에 앉고 싶었지만, 술집에 들어가는 순서대로 얼떨결에 80~90년대 학번 선배들 사이에 끼어 앉게 됐다. 자기를 86학번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나를 보자마자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변리사 신경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을 직업으로 소개하는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자 옆에 앉은 여자는 95학번 국문과 선배였다. 그녀도 지갑에서 명함을 내밀었는데, K신문 기자였다.

그날, 술자리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이상했던 것 같다. 졸업생 선배들은 술을 빨리 마셨고 자기들끼리 날선 농담을 주고받았다. 농담이 아니라 공격 같다고 느꼈지만, 말투나 분위기를 봐서 이해한 것이지 선배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을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노선이니, NL이니 PD니, 배반이니 하는 말들을. 나중에는 서로 쌍욕을 섞어가면서 빈정대기 시작했는데, 99학번 선배들이 뜯어말려야 할 정도로 분위기가 격해졌다. 우리 테이블의 선배들은 그게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 우리 노래패에 기가 센 애들이 많이 들어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술만 마시면 치고 박고 싸우고.” 기자 선배가 말했다.

“결기가 있었지. 요즘이야 취미로 노래나 부르는 동아리로 변질됐지만.” 변리사 선배가 말했다. “예전에는 대학생이라면 지성인이었어. 요즘 애들, 머리에 물이나 들이고 손톱칠이나 하고 대중문화에 찌들어서 지들 선배들이 이뤄놓은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르고.”

“그러게 말이에요, 형, 우리 학교 여자애들 보셨어요? 계집애들처럼 몰려다니면서 선배보고 오빠라고 하질 않나. 우리 노래패도 단단하게 이끌어줄 남자애들이 안 들어와서 결국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나도 여자지만 여자애들은 뭉칠 줄도 모르고 도무지 조직이라는 걸 이해 못하잖아요.”

“소은이라고 했나?” 기자 선배가 말했다. “너도, 우리 후배라면 그런 여성적인 태도는 좀 버려야 할 것 같다. 말투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나도 여자지만, 사회에 나와보면 참 융화가 안되는 여자들이 많아. 툭하면 삐지고, 불평불만에. 우리 대학 여자들이 좋다는 게 뭐야. 제3의 성이잖아. 여자지만 다른 여자들의 열등함은 지양해야지. 네 선배니까 이렇게 말해주는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 없으면 사회 나가서 욕먹는다, 너.”

“남자애들이 편하기야 하지. 우리 때는 후배가 마음에 안 들면 세워놓고 빠따로 두들겨 팼어. 그게 다 교육이었지.” 변리사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지랄.”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미진 선배가 우리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변리사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랄이라고 했습니다.” 선배가 대답했다. 옆옆 테이블에서 말싸움을 하던 선배들도 우리 쪽을 보고 조용해졌다. 하, 변리사 선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하늘 같은 선배한테.”

“말도 못합니까.” 선배가 답했다. 그 말을 하는 얼굴에 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미진아, 경석이 형이 새내기 예뻐서 좋은 말씀 해주시는 거잖아. 형, 아시잖아요, 미진이가 좀 예민한 거. 미진아, 사과드려. 경석 형께, 다른 형들께도 사과드려.” 기자 선배가 말했다.

“학번이 벼슬입니까? 해마다 나타나서 제일 어리고 만만한 여자애 붙잡고서 주정하는 인간도 제 선배입니까? 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하셨어요? 이 작은 영역에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서야 후련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 운운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차라리 독재가 편할 거야.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시잖아요, 솔직히. 씨발, 이 더러운 꼴을 꼭 쟤한테까지 보여야 합니까? 전 이제 그러기 싫어요, 싫습니다.”

“넌 항상 이렇게 감정적이었어. 그게 네 약점이고, 그걸 극복 못하면 너 사회생활 못해.” 기자 선배가 말했다.

“김연숙씨, 여자인 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습니까?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 여자 후배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남자가 될 수 없어.”

가방을 싸들고 밖으로 나가는 선배를 따라 나도 부랴부랴 책가방을 멨다. 길가로 나가니 선배는 이미 로터리 쪽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미진 선배.”

선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선배.”

앞으로 가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선배는 이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웃는 게 아니라 우는 얼굴이었다. 책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넸다. 선배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 길을 건너 앞으로 걸어갔다. 울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말을 걸지 않았을 텐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선배가 우리 노래패의 학생운동 전통을 끊었다고 비난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던 학생운동이 급속도로 무너지던 시기에 선배는 노래패 생활을 했다. 엄격한 선후배 문화, 남학생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행부, 상명하복식 문화에 선배는 하나하나 문제제기를 했고 기존 구성원들은 그런 선배에게 질려버렸다. ‘형들’이 물려주신 전통을 하나가 되어 지켜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들이 보기에는 문젯거리도 아닌 일을 붙잡고 기존의 운동방식까지 비판하는 그녀를 고운 눈으로 봐주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한다.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평등한 관계맺음, 여성주의 교육을 주장하는 선배가 동아리를 떠나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말을 들으면서도 선배는 동아리에 붙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집불통에 독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던 선배도 고작 이십대 초반이었을 뿐이다. 여러 사람의 미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해주는 동료가 없는 내부에서의 투쟁은 대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 그날 로터리 횡단보도에서 스물다섯 선배가 흘렸던 눈물은 분노가 아니라 그때까지 누적된 외로움이었으리라고 지금의 나는 짐작한다.

“아마 선배가 러시아 가고 나서 석달 뒤였을 거예요. 노래패 문 닫은 게.”

“그랬던 것 같다.” 선배가 답했다.

“대놓고 우리를 책망한 선배도 있었어요. 대부분은 실망한 내색도 안했지만. 그 사람들의 추억이 담긴 공간을, 제가 너무 손쉽게 없애버린 것 같았어요.”

“어쩔 수 없었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세상이 변했으니까.” 선배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자기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도스또옙스끼 생가 뒤뜰을 천천히 걸었다. “5월의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 대학에 와서야 토론할 수 있게 된 스물, 스물하나의 아이들이 그게 너무 아프고 괴로워 노래를 불렀어. 어떤 선배들은 노래가 교육의 도구이자 의식화의 수단이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 노래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고 생각해. 나만은 어둠을 따라 살지 말자는 다짐.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행복.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해. 나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조회시간에 태극기 앞에서 부르는 애국가 같은 게 아니길 바랐어.”

선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정교회 성당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성당 맞은편 까페로 들어갔다. 해가 쨍쨍할 때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는데, 비를 맞고 서늘한 실내에 들어서니 한기가 들었다.

“글은 잘돼가?”

“잘 안되고, 무섭고.”

“뭐가 무서워.”

“한번만 실수해도 기회를 영영 잃을 수 있으니까. 가장 두려운 건 변명도 못할 만큼 나쁜 작품을 쓰는 거예요.” 얼마 전, 망친 소설을 발표하고 부끄럽고 두려워 울지도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인터넷에는 바로 악평이 올라왔고, 그 단정적인 평가는 글을 쓰는 내게 달라붙어서 너는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매 발표마다 적어도 안타를 쳐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나 나름대로 성실하게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결과가 파울이면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공을 치기 전까지 내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네가 보여줬던 소설 생각난다. 나 러시아 오기 전에.”

“선배가 그거 보고 관두라고 했었죠. 굳이 어려운 길 찾아가지 말라고, 편하게 살라고. 자기는 19세기 소설 공부한다고 러시아로 가면서.” 내가 웃었다.

“네가 쓰는 글에 내가 나오니?”

“무슨 글을 쓰든 선배를 생각했어요. 잘 살펴봐요. 다 자기잖아.”

“건강은 어때?” 선배가 물었다.

“이제 약 없이도 지내요. 햇빛 많이 보고, 잠 많이 자고. 이제 정말 괜찮아.”

내가 많이 아팠을 때 선배는 거의 매일 내게 메일을 썼다. 약이 잘 듣지 않아요,라고 메일을 쓰면 나도 그 약을 먹고 이겨낸 사람 알아, 프로작은 좋은 약이야, 약의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대,라고 바로 답했다. 내가 메일을 확인하지 않으면 선배는 국제전화를 했다. 소은아,라는 말 한마디에 참지 못하고 울기만 한 적도 있었고, 회복할 수 있다는 말에 그런 번지르르한 소리 할 거면 전화 끊으라고 덜덜 떨며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나는 내 병을 지독한 구취로 기억한다. 아무리 이를 닦고 샤워해도 그 냄새가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고, 화장실까지 걸어가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때도 있다. 스스로에게 잔인하리만치 근면했던 삶의 태도도 그 병 앞에서는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옷 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치의 체력과 정신력이 소진되었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병원 복도에 서서 밖을 보면 길 건너 마로니에공원이 보였다. 마로니에공원 담벼락 위에 앉아 여한 없이 노래를 부르던 스물, 스물하나의 나와, 항우울제 부작용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 스물넷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 마로니에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기억, 그 노랫소리, 웃음을 나는 잃었다. 실수로 꼬리 칸을 자르고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처럼, 예전에 내가 나라고 알던 사람을 나는 잃어버렸다. 스물의 나는 스물넷의 나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두운 레일 위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선배도 러시아에서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였지만 나에게 선배의 어려움은 말 그대로 남의 일일 뿐이었다. 세상 제일 아프고 괴로운 건 나였으니까, 내 눈에는 내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기심에는 선배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도 없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런 나를 그치지 않고 사랑해준 선배에게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해야 마땅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회중석이 없는 정교 성당이어서 거동이 불편한 이들 몇명만 벽에 붙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신자들은 모두 서서 미사를 봤다. 선창자가 노래를 시작하면 나머지 신자들도 함께 노래 불렀다. 작은 성당인데도 천장의 돔 때문에 노랫소리가 깊게 울렸다. 선배는 맨 뒤에 서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곡을 불렀다. 키리에 엘레이손, 크리스테 엘레이손, 키리에 엘레이손. 정교회 신자도 아닌 선배가 어떻게 미사곡을 부를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선배의 목소리가 섞여 내 마음을 두드렸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자비를 주소서. 선배는 내게 가까이 붙어 노래를 불렀다. 천둥 치는 소리, 굵은 빗줄기가 성당의 지붕을 두드리며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리에 엘레이손, 크리스테 엘레이손, 키리에 엘레이손. 나도 사람들을 따라 더듬더듬 그 노래를 따라 했다. 선배와 내 목소리가 그 울림 속으로 아무렇지 않게 섞여 들어갔다.

비가 그치고 성당을 나와서 우리는 폰딴까 운하까지 걸어갔다.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이 지나갔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왜 배를 탄 사람들은 육지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걸까. 우리는 운하 근처의 작은 담 위에 앉아서 운하의 맞은편, 이삭 대성당의 금빛 돔을 구경했다. 길가의 가로등이 켜지고, 지나가는 유람선도 전구의 불빛을 켰다.

“네가 다시는 그렇게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배가 말했다. “네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네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소은아.” 선배는 선배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를 슬프게도, 부끄럽게도 했던 목소리로. 나를 보며 노래를 부르는 선배의 얼굴이 예전처럼 환하게 빛났다.

선배는, 지금의 내 나이가 되지 못했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나는 카세트를 끄고,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멀리에서 누군가 폭죽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이 운하 위로 흘러내렸다.

선배의 심장은 2009년 여름밤, 아무 이유 없이 정지했다. 논문심사를 앞두고 있었고, 평소 만성적으로 피로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건강상의 문제도 없었다. 서른두살의 객사였다. 순간적인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므로 아무 고통도 없었으리라고 의사는 말했다고 한다. 고통 없는 죽음이었다는 사실이 아무런 위안이 될 수 없을 만큼 선배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선배는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선배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치를 떨고 선배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장례식장에 와서 말문을 잃었다.

내 손에는 율랴가 준 선배의 사진 몇장이 들려 있었다. 여름정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선배, 도스또옙스끼 생가 벽에 기대어 율랴를 기다리는 선배, 네바 강변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웃고 있는 선배, 어느 까페 테라스에 앉아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선배, 폰딴까 운하 옆 길가에 서서 유람선을 탄 관광객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선배. 율랴의 시선으로 본 선배의 모습을 나는 이리저리로 좇았다.

잘 가요, 선배. 나는 언젠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던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고, 선배를 보내고 나 또한 그 얼굴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대한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도.

안녕, 소은아.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나에게 인사하는 선배에게 나는 웃어주지 못했다.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말라는 선배의 말이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잔소리처럼 들렸다. 내가 겨우 병에서 벗어나고 있을 때, 무리를 해서 한국에 왔던 선배에게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선배는 언제나 어른스러운 사람이고, 나는 미숙한데다 아프기까지 한 덜떨어진 인간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선배의 애정 없이는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없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랬다.

나에 대한 선배의 끝없는 관심과 조언이 고마웠지만 그 고마움만큼이나 불쾌감도 커졌다. 선배가 ‘나’의 테두리를 짓밟고, ‘나’라는 공간을 무례하게 침입하는 것 같았다. 선배는 멀리에 있으면서도 내게 너무 가까웠다. 나는 나의 가장 추한 얼굴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선배의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으니까.

 

*

 

“이런 얘기하면 이상하겠지만.” 율랴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미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유학을 후회한다고 했어요. 자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살던 친구가 아프게 됐다고. 저는 그게 그녀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는 자책했습니다. 버스비 아끼고, 외식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하고, 돈을 모아 뭘 하려나 했더니 어떻게든 방학에 한국에 들어가려고 그랬다더군요. 그냥 친구 만나서 밥도 해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곁에 있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대요. 한국에 다녀오더니 친구가 많이 좋아졌다고, 그 좋아진 모습 보고 돌아와서 마음이 덜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소은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지는 중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엄연한 환자였고, 웃는 얼굴로 선배를 대할 수가 없었다. 다음 여름에는 뻬쩨르부르그로 놀러오라는 선배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진이 저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어요?” 율랴가 물었다.

“율랴 당신이 특별하다고 했어요. 당신이 미진을 도와줘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라, 그냥 특별했대요. 당신 같은 사람 본 적 없대요, 그녀는. 그리고……”

“그런 말을 했나요.”

“그리고 율랴는 그 사실을 모른다고. 그게 마음 아프다고 했어요. 당신이 저번 밤에 저에게 이야기했었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산다고. 그 이야기 듣는데 그녀가 바로 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어요. 아니야, 율랴, 그렇게 이야기하며 한숨 쉬는 것 같았어요.”

율랴는 붉은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식탁보를 만지작거렸다.

“곧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버스 타고 20분만 가면 미진 집이니까. 그냥 전화 한통 하고, 저녁이나 같이 먹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녀 마음이 풀리지 않았을까봐 두려웠어요. 조금만 더 용기 냈다면 그녀가 죽기 전에 먼저 연락할 수 있었겠지요. 다시 예전 같은 친구가 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이렇게까지 후회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녀가 내 연락을 기다렸을까, 그렇게 헤어져버려서 내내 슬프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녀는 율랴가 지난 일에 매여서 고통받길 원하지 않아요.”

“미진이라면 그렇겠지요.”

율랴는 식탁 위에 놓인 선배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미진, 네가 보고 싶어.” 율랴는 선배 사진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말했다. “너를 자꾸만 잊어가. 이제 네 모습, 잘 기억나지 않아, 미진.” 나는 선배의 이름을 부르는 율랴를 안았다. 율랴의 몸은 크고 따뜻했다. 그 품에서 나는 율랴를 안아주는 선배를 느꼈다. 율랴, 율랴, 그렇게 가버려서 미안해,라고 내 몸 속에서 율랴를 위로하는 선배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97학번 김미진’이라고 적힌 테이프였다. 오디오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멀리서 자동차 클랙슨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헛기침하는 소리, 도레미파솔, 음계를 고르는 소리가 났다. 율랴가 오디오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아, 아, 저는 노문과 97학번 김미진입니다. 선배님들이 이번에 우리 노래패에 녹음기를 사주셨습니다. 녹음해서 들으면 자기 목소리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더 연습해서 노래, 잘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선배가 말을 끝내자 노래패 애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새내기, 노래 한번 불러봐, 네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선배는 노래를 시작했다.

 

빈 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사라져

 

스무살, 나의 어린 선배가 아무것도 모르는 투명한 목소리로 「녹두꽃」을 불렀다. 뻬쩨르부르그의 어느 작은 플랫 한 귀퉁이에서, 여전히 내 마음을 울리는 소리로 노래했다. 나와 율랴는 오디오 앞에 나란히 앉아서 선배가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선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배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꽃다지, 장사익의 노래를 불렀고 밥 말리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도 불렀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나 라틴어로 부르는 성가도 들어 있었는데 무슨 노래를 부르든 누구의 노래를 부르든 그 노래는 그대로 선배의 노래가 됐다. 말할 때는 허스키하던 목소리가 노래만 부르면 맑고 부드러워졌다. 선배의 노래에는 아무런 기교가 없었다.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힘을 써서 노래하지도 않았고, 그 흔한 바이브레이션도 붙이지 않았다. 선배는 호소하지 않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도 건조했고, 뜨거운 노래를 부르면서도 담담했다.

자제심이 무너질까봐 그동안 차마 그 노래들을 듣지 못했다. 선배가 죽었던 뻬쩨르부르그에 발을 딛는 것도 두려웠다. 잘 쌓인 접시처럼 내 감정이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들이 다 무너져서 내 속을 찌르고 어지럽히지 않기를 바랐던 결벽이 있었다. 그때 내 손을 잡아주었던 사람이 율랴였다. 율랴는 내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내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나와 함께 살 때의 선배에 대해 쓰면, 율랴는 자신과 함께 살 때의 선배에 대해 썼다. 둘 다 선배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나에 대해서, 율랴는 율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폴란드 여자에게 나는 일기를 쓰듯 지난 일년간 메일을 써왔다.

오토바이가 차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났고 가끔씩 냉장고가 웅웅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던 율랴와 내가 언제부턴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노래는 선배와 내가 함께 부른 「녹두꽃」이었다. 스물셋의 나와 스물여덟의 선배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곱고 가장 뜨거운 마음을 그 시에 담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병자도, 선배가 망자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가 아직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율랴와 내가 마주 앉은 거실 바닥으로 부드러운 맞바람이 불었다. 율랴처럼 나도 선배를 잊어가고 있다. 이 노래를 선배와 함께 불렀을 때의 마음이라는 것도 이제는 희미하기만 하다. 선배가 떠나고 반년 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까운 마음도, 선배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그리움도 옅어졌다. 노래가 끝나고 공테이프가 회전하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율랴가 나를 보고 애써 웃고 있었다.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유람선 난간에 기대서 다리와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주기로 했다. 그건 율랴와 나의 첫번째 여행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