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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정대 朴正大
1965년 강원 정선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단편들』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등이 있음. sugarlessciga@hanmail.net
닐 영은 말해보시오
닐 영은 말해보시오 당신네 밴드 미친 말이 추구하는 음악은 도대체 무엇이오 그는 나뭇잎처럼 껄껄 웃었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말발굽처럼 떨어지며 시원한 바람을 보내왔다 추분을 지난 지 한참이 되었지만 지구의 낮은 아직 밤보다 조금 긴 것 같았다 돌고래들은 먼바다에서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삶의 내면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삶의 외곽지대에는 우주를 떠도는 돌덩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돌덩이는 말해보시오 도대체 음악은 무엇이오 시는 무엇이오 돌고래는 말해보시오 미친 말이 검고 커다란 눈망울을 껌뻑이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아주 오래된 지구의 낡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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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닐 영—Neil Percival Kenneth Robert Ragland Young
빠리의 고아들처럼
짐 자무쉬의 인터뷰는 시월에 하는 게 좋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일테면,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월
몽빠르나스 묘지 근처의 한 까페에서
빠리의 고아들처럼
그와의 인터뷰는 내 바람대로 지난 시월 몽빠르나스 묘지 근처 한 이층 까페에서 이루어졌다, 짐의 오랜 친구로서 함께 술을 마시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헤이, 잘 지내? 나를 보자마자 그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창가에 앉은 그는 생각에 잠겨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결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며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을 보면 ‘빠리의 고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프랑스 태생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글쎄 그건 아마도 당신의 머릿속에 만들어진 나에 대한 이미지에서 오는 것일 게다
사람들은 대상을 대할 때 대상 자체만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사실 대상 자체만의 이미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대상은 사실 여러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취사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닉 케이브Nick Cave를 아는가, 닉을 보면 당신과 형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닉이나 내가 풍기는 무국적자의 분위기에서 오는 게 아닐까
나는 닉 케이브의 노래를 가끔 듣기는 하지만 한번도 함께 작업해본 경험은 없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우주의 끝에 있어도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닉과 나는 어떤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닉과 나는 서로 떨어져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평소 시를 많이 읽는다고 들었다, 주로 어떤 시를 읽는지 소개해줄 수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
시에 있어서만은 무척 편식을 하는 편이다, 장 드 파, 파올로 그로쏘, 갱송 등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의 시를 주로 읽는다, 또 가끔은 고전적인 시인들을 읽기도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적인 시인들이 오히려 요즘 시인들보다 좀더 급진적인 면이 있다, 내가 래디컬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시가 씌어질 당시 인류의 보편적 정서보다 그들이 예민하게 한걸음 더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작품의 기본적인 모티브는 대부분 그들로부터 온 것이다
—시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런데 도대체 구원이라는 건 뭘 말하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게 만약에 있다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시 속에 숨겨져 있다
—인류를 왜 구원해야 하는가?
사실 그 질문은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도대체 인류를 왜 구원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인류를 구원할 이유는 없다, 인류가 이대로 망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비통해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파멸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모래 한알의 흔들림에서도 전 우주를 느끼는 자이다, 그는 아주 섬세하게 전 우주를 통찰한다, 시인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노래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전 우주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류를 구원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이란 존재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나는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한다
단 한명의 시인이 구원된다면 그것은 결국 인류가 구원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조금씩 섬세하게 다 다르다, 그런데 왜 그들을 묶어 ‘인류’라는 표현을 쓰는가
그 말은 맞다
이 세상에 같은 인간은 없다, 모두가 조금씩 다 다르다, 그러나 본질적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은 또 거의 같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만이 정교한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말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했다면 이제는 인간이 사용하는 말에 의해 인류는 멸망할 단계에까지 와 있다, 인류의 말은 너무 오염되고 타락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는 말을 통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에 왔다, 어느날인가 인류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인간의 세치 혀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지옥불에서 온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말의 폭력성 더 나아가 불필요성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제 인류는 말의 사용을 자제하고 침묵해야 하는가?
침묵조차도 시끄러운 하나의 말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 아니라 어찌 보면 침잠이다,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의 침잠, 인간의 내면은 무한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내면의 깊이를 획득한 말은 말 자체의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말들이 인류의 대초원을 달려갈 때 하늘의 뭉게구름들은 백양나무와 만나 박수를 치며 백양나무 이파리들처럼 새털구름처럼 아름답게 흩어져갈 것이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빠리의 고아들’이라는 이미지를 한편의 영화로 찍어볼까 한다
그것은 몽빠르나스 묘지 근처 휘날리는 백양나무의 낙엽 이미지로 시작될 것이다, 낙엽들이 떨어지는 수만큼 지상엔 하나둘 저녁 불빛이 켜지고 골목에 가로등이 켜지면 오래된 까페 간판에도 불이 켜진다
까페의 이름을 뭐라 할까, 음, 일단은 <닐 영은 말해보시오>라고 하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길을 따라 리산이 걷고 있다, 방금 골목길을 빠져나온 바랑을 걸친 강정은 허청거리며 리산과는 반대편 거리에서 걸어오고 있다, 그들이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진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둘 다 <닐 영은 말해보시오>로 가고 있다
그들을 이층 까페에서 담배를 피워문 내가 바라보고 있다
까페 한쪽 구석에 마련된 칠판에 옥이 영화의 제목을 적는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인가?
영화를 찍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 한컷이라도 원하는 이미지를 얻어내는 것이다
제목은 그뒤에 오는 것이다, 가령 제목이 <귀신>이면 어떻고 <유령>이면 또 어떤가, 설령 제목이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그 제목들은 일테면, 귀신과 유령과 무용(useless)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
시와 마찬가지로 영화도 단 하나의 장면 혹은 대사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일부를 그저 전달할 뿐이다
영화를 찍는 동안 영화의 모든 것들이 스스로 제목을 찾아갈 것이다
아니면 제목이 알아서 스스로 영화를 찾아올 것이다
—당신의 영화에는 유난히 시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당신 영화는 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가?
시적 상상력이란 말은 허황된 것이다
시와 시적인 것, 비시(非詩)와 비시적인 것의 개념과 경계조차 애매한 상황에서 시적 상상력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예술의 영역에 있어서 감각의 이미지로 구획되던 장르 구분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 더이상 의미가 없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색깔을 듣고 소리를 그리고 시를 냄새 맡는다, 당신이 내 영화에서 시적 상상력의 징후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시적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예술 작품을 대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두가지만 질문하겠다
내가 어떤 질문을 했으면 좋겠는가?
왜 사는가?
난 단순한 존재다
한번에 한가지만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당신은 참 우둔한 것 같다, 하지만 친구니까 한번 봐주겠다
우문에 현답을 하겠다, 일단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다, 태어나지도 못한 존재가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나는 일단은 태어나고 싶다, 그런데 아직은 태어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내 존재 이유를 환하게 밝혀줄 촛불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런 사람이 어두운 지구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가까운 빠리의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는 가능성으로 인해 빛난다
밤하늘의 별이 무수한 가능성으로 빛나듯 말이다
나의 이 고리타분한 비유가 당신의 끝없는 질문으로 인해 다시 새롭게 빛나길 바란다
우리는 아직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모두 허공에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린다 시월의 이파리들처럼, 빠리의 고아들처럼
먼 곳으로부터 하얀 눈발이 검은 말을 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