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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글항아리 2014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사는가
류동민 柳東民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rieudm@cnu.ac.kr
삐께띠(Thomas Piketty) 방한으로 정점을 찍은 듯한 열풍의 뒤끝에서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장경덕 외 옮김)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어느새 새삼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많고도 많은 한국 경제학자 중에서 촌평 수준 이상의 진지한 반응을 보인 이들은 이른바 진보적 입장을 제외하면, 자유주의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어색한 극보수적 입장뿐인 듯하다. 요컨대 유례 드문 대중적 관심 한편에서 대다수의 경제학자는 침묵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는 주로 삐께띠의 이론을 실증적으로 한국에 적용해보는 작업을 한 반면, 후자는 주로 이론적 비판에 몰두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글에 관심을 가질 만한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는 현실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을 테고, 후자에 동조할 독자라면 현실이야 어떻게 나오건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하고 해석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을 테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구도 아닌가? 가까이는 지난 봄날의 비극적 사건으로부터 멀리는 독재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사회의 많은 논쟁에서 되풀이되는 지형에 다름 아니다. 이리하여 한쪽은 냉소적 절망의 늪에 빠지고, 다른 한쪽은 자기편만 보며 밀어붙인다.
경제적 불평등의 담론이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 되지 못한 채 고작 베스트셀러를 둘러싼 호들갑에 그칠 때, 정작 지은이가 추구한 담론과 감싸안으려 한 대상은 잊히고 만다. 어느 독재자가 대중에게는 ‘빵과 써커스’만 던져주면 된다고 했다던가. 어쩌면 우리는 빵에 관한 얘기조차 써커스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역본으로도 800여면에 이르는 『21세기 자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삐께띠와 그의 동료들이 엄청난 양의 투하노동을 들여 세가지 변수의 크기에 관해 만들어낸 역사적 데이터 분석이다. 먼저 자본소득분배율, 즉 생산된 부가가치 중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몫, 다음으로 자본/소득 비율 혹은 재산/소득 비율, 즉 소득에 비해 축적된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를 나타내는 비율, 마지막으로 자본수익률(이윤율)에서 경제성장률을 뺀 값이 그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어느 경제에서 이 세가지 변수의 값이 커졌다는 것은 그만큼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뜻이다. 노동에 비해 자본은 점점 더 많은 몫을 가져가고, 소득을 모아 따라잡아야 할 재산의 양은 점점 많아지며(내 연봉을 몇년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는가로 바꿔 생각하면 알기 쉽다), 땀 흘려 일해서 버는 소득의 증가속도보다 재산이 자기증식하는 속도, 즉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삐께띠가 다룬 이십여개 나라에서 이 세가지 변수의 최근 백여년 동안의 추세는 대체로 U자형 곡선 모양으로 그려진다. 즉 매우 높았던 상태에서 출발하여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후의 회복시기에 크게 하락했다가, 흔히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1970년대말 이후부터 다시 상승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19세기말 수준으로까지 불평등이 악화할 수 있다는 경고가 뒤따른다.
역사발전에 무슨 법칙이 있다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건만,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정보와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말의 흐름을 반대로 꺾어 조금이라도 대등하게 흐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믿는다. 최고권력자가 며칠씩이나(그러니 몇시간은 좀 나은 셈일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심지어는 죽었다는 사실조차 ‘유고’ 따위의 모호하고도 일방적인 말로 표현되는 곳. 그곳이 오래전 우리가 힘겹게 떠나온 사회였다면, 지금 여기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 권력을 가진 자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꾸며낸 화면이나 걸러진 몇마디 추상적인 어휘로만 알 수 있으되, 힘없는 자들은 여차하면 개인 채팅방조차 열어서 보여줘야 하는 곳, 적어도 그러한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역사의 발전이리라.
“경제학자 못지않게 사회과학자이고 싶다”는 삐께띠의 책을 데이터와 그래프로 가득 찬 경제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상상력의 소산으로 읽어본다. 글로벌 자본세(global tax on capital)라는 대안은 세금이라는 수단을 통해 불평등을 고치겠다는 의미 못지않게 재산보유에 관한 투명한 데이터를 확보함으로써 정보의 흐름을 아래로 틀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삐께띠가 능력주의라는 최소한의 매개를 이용하여 궁극적으로는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출할 것을 역설한다는 점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진 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일은 세금을 몇퍼센트 더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재산상태와 형성과정이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는 사태이니, 그 원리에 있어서는 ‘윗분’의 동선이나 심기를 ‘아랫것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 삐께띠가 시론 삼아 제안하는 글로벌 자본세의 면세점(免稅點)은 빚을 뺀 순자산이 100만 유로, 원화로는 10억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이 세율 인상으로 말미암아 잃게 될 근로의욕을 걱정할지 말지는 가치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지만 종합부동산세가 ‘세금폭탄’으로 집중포화를 맞던 시절 반대여론의 상당 정도는 실제로 세금을 내지 않는 이들에게서도 나왔음을 기억한다면, 민주주의 원칙을 옹호하는 동시에 가치있는 명제를 추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소득세의 역사가 실상은 한세기 남짓밖에 안된다는 현실을 상기한다면, 의지적 낙관이 그저 힘없는 자의 자위만은 아닐 것이다.
삐께띠는 사람들이 ‘숫자’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경제적 상태에 관한 정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도록 하자는 것, “숫자를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가 책의 마지막 문장인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21세기 자본』의 제안은 구체적인 내용 그 자체보다는 훨씬 더 큰 목표를 갖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사회를 ‘보수’하려는 이들에게 이 책이 불쾌한 진짜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