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절망의 미니멀리즘

최승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로 『얼굴 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등이 있음. dasungumi@gmail.com

 

 

최승자(崔勝子)가 살아온 삶은 시인의 신화 하나를 거의 완벽하게 구성한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교수와 싸우고 교실을 뛰쳐나와 출판사의 견습생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중퇴학력으로 인문학 대가들의 글에 붉은 볼펜을 휘둘러 자주 말썽을 일으키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두해 사이를 두고 같은 시기에 등단하여 훗날 저마다 한국시단에 봉우리를 하나씩 이루게 되는 이성복, 최승호, 김혜순, 황지우 사이에서 최승자는 자기 내장을 다 드러내는 사람의 선연한 말을 비수처럼 내던져 잊어버릴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었다. 자신을 배설물로, 잉여물로 규정하는 그에게는 감출 것이 없었다. 그는 번역으로 생계의 수단을 삼았다. 주로 예술가들의 자기고백에 해당하는 산문들을 직역에 가깝게 옮기면서도 낱말 하나하나에 생기를 주어 독자적인 문체를 확보했으며, 이 문체로 인간비평이자 문명비평인 반투명 색조의 산문들을 썼다. 그러나 번역은 그를 지치게도 했다. 네번째 시집 『내 무덤, 푸르고』(1993)가 준비될 무렵부터 그는 섭생치료에서 점성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비서들을 섭렵하고 거기 심취했다. 최승자 자신은 자아를 찾아서라고 말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존재가 잉여물이 아닐 수 있는 세계를 찾아서라고 말해야 할 이 정신적 여행에서 그가 무엇을 찾았건 그것은 다시 그를 새로운 암시로 얽매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는 단칸셋방과 고시원을 전전하면서 그 생활을 내팽개쳐두는 방식으로 살았지만, 버려둔 생활이 그의 삶에 더욱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그의 고난은 이 땅에서 남자들의 사랑과 후원을 얻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의 재능을 팔아서 살아야 하는 여성의 불행을 대표했다. 다섯번째 시집 『연인들』(1999)이 출간될 무렵 최승자는 극심한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타로카드의 상징체계에 깊이 의지한 이 시집은 그러나 최승자표 시의 가치를 불신하게 하지는 않았다. 새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은 『연인들』 이후 요양원과 세속세계를 오가며 살던 시인이 짙은 안개 밖으로 나오면서 내놓는 그 정신적 모험의 보고서이다.

말은 줄어들었고, 문장은 짧고 단순해졌다. 독기는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슨 말이든 말을 하면 시가 되게 하는 재주는 여전하고, 어쩌면 더 발전했다. 짧은 호흡을 타고, 독립성이 강하고 투명한 말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어서 명사문이 아닌 문장들도 명사문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 문장과 어휘들을 보며 관념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최승자 자신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구상을 말할 때 그 대상은/어느덧 추상으로 변해버리고 또 어떤 때는/추상을 말할 때, 살과 뼈다귀를/감쪽같이 다 달여 먹어치운, 그러나/여전히 구상인 것일 때가 왔다”(「새 한 마리가」). 그에게 관념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구별이 없어진 “때”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들이 본디 모습을 되찾아 의미로 충만하고, 이제 더이상 기호가 아닌 말들이 그 의미와 온전하게 결합하는 어떤 자리에 자신이 들어섰다고 시인은 믿고 있다. 물론 이 본디의 사물들 속에 아파트와 자동차를 비롯하여 이 문명의 무서운 기계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폐허가 되어 무너져가는 모습으로 이따금 나타난다. “전 아파트 군단이” 비에 젖어 있는 어느날 “하늘 한 판이 허수이/무너져 내린다”(「하늘 한 판이 허수이」)고 시인은 쓴다. 자신이 한번도 누리지 못했거나 오래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없어져버린 듯한 자리에서 최승자는 이렇게 말이면서 동시에 사물인 것들을 만난다. 우리가 어느날 잠 깨어 일어나 이 자본주의의 ‘주어 없는’ 욕망들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아침을 맞게 된다면, 아마 우리도 이 시인처럼 사물을 볼 것이다. 그러나 최승자는 자신의 시상(視像)을 이 문명의 대안으로 제시할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서 구상과 추상의 결합은 통시성과 공시성이 하나인 시간(또는 무시간)에 대한 인식으로 귀결된다. 오래된 것들과 덜 오래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현재의 공간에서 다시 만난다는 이 생각은 지금 이 시간의 깊이를 말하기보다 아무것도 해결한 것이 없는 역사의 허무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 태초의 문제와 그 얼버무림은 지금 이 세계의 문제와 얼버무림으로 남아 있다. 대안은 역사를 전제로 하는데 역사는 어떤 문제도 해결한 적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 문명이 멸망한 뒤에나 만나게 될 세계를 ‘멀리 쓸쓸하게’ 바라보면서, 자기 시를 그 세계로 옮겨놓고 싶어할 뿐이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이사 가고 싶다”(「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풀밭이 꽃밭의 욕망을 떠나보내고 쉬는 자리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니 떠나보내고가 아니라 떠날 때까지라고 해야 할 것 같고, 그 풀밭의 휴식이 가능하다면 거기서 치유될 것은 최승자나 그의 시가 아니라 욕망을 병으로 앓는 우리들의 삶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최승자는 싯구와 싯구들 사이에 괄호를 이용하여 그 말을 하게 되는 순간의 직관을 기록해두는 형식을 자주 취한다. 물론 이 직관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고 있는 욕망의 하늘이 늘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벌써 “허수이” 무너져버린 것이나 같음을 꿰뚫어보는 시선이며, 왕성한 문명 한가운데서 그것이 멸망한 뒤에 남게 될 사물들의 앙상한 뼈대를 투시하는 시선이다. 그러나 이 직관이 그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이 뒤표지에 자신의 심경을 적으면서 인용한 타니까와 惴따로오(谷川俊太郞)의 시 「슬픔」이 암시하듯이, 욕망이 잠들고 마음이 무시간에 이르렀어도, 시간 속에서 늙어가는 시인에게 저 잔인했던 욕망에 대한 한은 남아 있다. 그가 직관했던 세계의 앙상한 뼈대를 말하기에 알맞도록 그 역시 뼈대로만 남은 말들은 그의 피폐한 심신이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새들은 모두가」에서 “事物들의 새파란 시선이 움트는” “작은 이슬 제국”에 “詩人들도 아스라이 끼어”든다고 말할 때의 이 “아스라이”는 사실상 그 절망적인 거리와 함께 자기정화의 절망적인 방법을 함축한다. 그러나 최승자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또다른 종류의 자기정화가 아니다. 그는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대답을 끝까지, 물론 쓸쓸하게,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