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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왕 후이 『탈정치 시대의 정치』, 돌베개 2014
중국 신좌파는 어디를 향해 있는가
조경란 趙京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jokl21@empas.com
중국 신좌파의 대표격인 왕 후이(汪暉)의 『탈정치 시대의 정치』(성근제·김진공·이현정 옮김)는 그가 2007년에서 2013년 사이에 쓴 네편 글의 모음집이다. 중국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일부를 이미 읽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책 말미에 배치된 서문격의 ‘후기’ 내용이 특히 궁금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전에 제기한 ‘트랜스 시스템 사회’와 ‘트랜스 소사이어티 시스템’이라는 틀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핵심내용은 이렇다. “중국의 시스템 내부에 국제적 지향성을 갖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하고 이를 통해 다른 사회의 요구를 중국의 평등에 대한 실천의 내부로 과감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279면). 여기서 ‘다른 사회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대목은 이른바 ‘중국식 보편주의의 지향’을 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최근 중국의 부상(浮上)은 서양의 식민주의와 그 의미가 현격히 다를 것이라는 프랑크(A. G. Frank)나 아리기(G. Arrighi), 마틴 자크(M. Jacques) 등 이른바 서구좌파 중국문명론자들의 원망(願望)이 어느정도 반영된 듯 하다.
저자는 네편의 글이 모두 ‘중국의 길(中國道路)’에 관한 논쟁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했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조금 다르다. 「탈정치화된 정치, 패권(헤게모니)의 다층적 구성, 그리고 1960년대의 소멸」(이하 ‘소멸’)을 제외하고는 중국모델 구성을 위해 문화대혁명과 경제성공을 이론적으로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 같다. 즉 나머지 세편은 공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성공과 미국의 금융위기라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중국모델에 대한 강한 확신 아래 집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를 구분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다. 중국 지식계에서도 이 양자 사이의 ‘변화’(또는 변신)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우선 「소멸」은 2007년 발표 당시 중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반향이 있었다. 왕 후이는 이 글에서 개혁개방 이후 당의 국가화, 노선투쟁의 종결, 계급 개념의 소멸로 중국정치에서 ‘1960년대의 가치가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탈정치화된 정치’는 정치활동을 구성하는 전제이자 기초인 주체의 자유와 능동성이 부정되는 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 후이가 이 글에서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1960년대의 소멸’이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의 전환’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고, 이 전환으로 무엇이 소실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결국 마오 쩌둥(毛澤東) 시대와 덩 샤오핑(鄧小平) 시대를 연속이 아닌 단절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2010년에 발표된 「중국 굴기의 경험과 그것이 직면한 도전」에서 저자는 양 시대를 단절이 아닌 연속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그가 새삼 압도적 규모의 경제성공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어떻게 다른 사회주의 국가처럼 무너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속하게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는가.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방식을 도입한 때문이 아니라 독립적 주권과 지속적인 이론논쟁 그리고 농민의 능동성, 다수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중성화된 국가의 역할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60년대의 가치’가 소멸된 시대에서 개혁개방이, 예상과 달리 ‘중국모델’이 거론될 정도로 성공을 거두자 재빠르게 그 요인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자임한 해석이다. 개혁개방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사회주의 역사 내부에서 이미 싹텄다는 식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앞서 언급했듯 2008년의 미국 금융위기와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이 있다. 왕 후이에게 이 두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패권구조가 전환되는 분기점이며 새로운 정치가 창조되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1989년 천안문사태를 통해 성립된 (불명예스러운) ‘6·4체제’로서의 90년대가 종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 후이의 이러한 주장에는 평자가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하나는, 중국의 ‘60년대’를 상징하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둘러싼 문제이다. 즉 문혁의 기본의도를 복구하기 이전에 먼저 거쳐야 하는 분해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이를테면 문혁이 애초에 가졌던 좋은 의도와 달리 왜 갖가지 ‘비상식’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정치적’인 좋은 의도들이 어떤 조건 속에서 훼손되어갔는가.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당시 상황에서는 오히려 ‘정치의 역설’ ‘정치의 과잉’ 측면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왕 후이가 참고한 칼 슈미트에게 ‘정치적인 것’의 의미는 실제로는 피지배자의 도전을 받지 않는 자율을 의미한다). 더불어 저자에게 인간과 혁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앞에서 말한 ‘새로운 정치의 창조’를 위해서라도 인간의 존재혁명은 새로운 물질적 토대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는 현실사회주의를 경험한 나라일수록 체감하는 부분일 터이다. 좌파든 우파든 자기 진영을 혁신하려는 ‘불온한 시도’가 절실하다.
또다른 하나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보는 저자의 기본 태도에서 나타나는 이론적 모순에 관한 것이다. 마오와 덩의 양 시기를 합친 60년의 사회주의 경험이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의 성공으로 귀결되었다는 주장은,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논지를 빌리면, 유럽인들이 근대세계에 부과하는 지적인 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될 경우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고 하면서 다시 유럽중심주의에 빠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조금 비약하면 유럽을 문명과 진보에서 떼어내버리고, 그것들을 중국이 전유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칫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근대성의 탈각이 아니라 위계질서를 전도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이는 왕 후이가 1990년대에 그렇게 비판했던 근대주의 내지 발전주의로 회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환의식’(憂患意識, 군자가 갖는 사회와 문명에 대한 도덕적 근심)으로 가득찬 좌파지식인 왕 후이, 그에게서 갈수록 비판적 지식인의 면모보다는 21세기 사회주의 ‘문명중국’의 재구축에 전력투구하는 이데올로그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아시아는 세계다』(글항아리 2011)에서 ‘조공 아시아’와 ‘혁명 아시아’를 재구성하여 상상한 것이 바로 ‘트랜스 시스템 사회’였다. 하지만 이제 ‘트랜스 소사이어티 시스템’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확실치 않다. 100년 전 위기적 상황에서 캉유웨이(康有爲)는 중국이 강국이 되어 서양과 평등을 이룬 후 인정(仁政)을 펼치게 될 경우, 그 주도권은 중국이 잡아야 한다는 발상을 내보인 적이 있다. 이는 중화주의적 세계관 형성 이래 통합의 주체가 항상 중국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또다른 ‘중국적 보편성’에서 유래한다. 왕 후이의 트랜스 시스템 사회에서, 한나라 통일제국체계의 기반을 다진 동중서(董仲舒), 그의 뒤를 잇는 캉유웨이 류(類) 정치적 대동론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것은 평자만의 편견 탓일까. 중국의 신좌파는 국제주의적 평등주의자인가, 현대판 동중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