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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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창비 2014

역사소설의 편견을 넘어선 이야기

 

 

듀나

소설가, 영화평론가 djuna01@empas.com

 

 

166-촌평-듀나_fmt70년대에 MGM 뮤지컬 영화들의 클립을 모아 만든 「이것이 엔터테인먼트다!」(Thats Entertainment!, 1974)란 영화가 있었다. 이 작품이 히트하자 비슷한 구성의 「이것이 엔터테인먼트다! II(1976)란 속편이 나왔는데, 대표적인 뮤지컬 장면들을 1편에서 대부분 써먹었던 터라 뮤지컬이 아닌 다른 장르 영화의 클립들을 몇몇 빈자리에 넣어야 했다. 그중 ‘명대사’ 모음이란 것이 있었는데, 지금 보면 좀 이상하다. 일단, 70년대 사람들이 MGM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 영화광들이 MGM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영화들 사이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정기준이 달랐다. 지금이라면 ‘영화 명대사’를 소개한다면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고전문학 각색물의 대사를 넣지는 않을 테니까. 당시는 ‘고전문학’에 대한 할리우드의 존경심이 아직 상당하던 때였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Pride and Prejudice and Zombies, 2015년 개봉예정) 같은 영화는 꿈도 못 꿨다.

“내가 하는 일은 이제까지 내가 한 어떤 것보다도 훨씬, 훨씬 더 훌륭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취하러 가는 휴식은 내가 이제까지 알던 어떤 것보다도 훨씬, 훨씬 더 좋은 휴식이다”(567면)라는 대사를 처음 들은 것도 그 ‘명대사’ 모음에서였다. 난 그 영화의 제목이 뭔지 몰랐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란 건 그 우울한 자기희생의 선언이 보이스 오버로 떠도는 동안 역시 우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남자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혔다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봤을 때엔 아직 인터넷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지만, 난 그래도 열심히 조사해서 그 대사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잭 콘웨이( Jack Conway)가 감독한 1935년작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었고 남자배우는 콧수염을 밀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로널드 콜먼(Ronald Colman)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영화의 원작이었던 찰스 디킨스의 소설은 우리 집에 있었다. ‘이도비화(二都悲話)’라는 구닥다리 제목을 달고 있어서 못 알아봤을 뿐.

대부분 사람들은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1859, 한국어판 성은애 옮김) 하면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15면)로 시작되는 도입부를 먼저 떠올리지만, 나에게 『두 도시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앞서 말한 마지막 대사이다. 이 소설의 첫번째 독서 역시 맨 처음 접한 그 마지막 대사를 향한 질주와 같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스스로 단두대에 오르는 주인공의 자기희생은 나에게 거의 초자연적으로 보였고 난 무엇이 한 남자로 하여금 그런 불가능한 길을 걷게 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첫번째 독서가 그에 대한 온전한 해답을 주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깔아놓았는데, 정작 이야기는 조촐하게 허겁지겁 끝났고 주인공 씨드니 카턴의 비중 역시 그리 큰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프랑스혁명 무대의 통속물로 보자니 바로 몇개월 전에 내 혼을 단단히 빼놓았던 오르치 남작부인(Baroness Emmuska Orczy)의 『빨간 별꽃』(Scarlet Pinpernel, 1905)이 비교 대상으로 떡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계속 『두 도시 이야기』로 돌아갔던 건 살짝 불만족스러운 첫 독서 때문이었다. 이 주정뱅이 변호사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계속 사로잡고 있었는데 심지어 원작도 온전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어떻게 한다? 그렇다면 세상 너머 어딘가에 완벽한 ‘두 도시 이야기’가 있다고 가정하고 심지어 디킨스의 소설도 그 완벽한 무언가의 반영이라고 친 다음 다양한 각색물과 해석을 통해 그 ‘원본’에 접근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당연히 가장 먼저 본 건 MGM에서 만든 잭 콘웨이의 영화였다. 가장 좋은 영화이기도 했고. 정작 「이것이 엔터테인먼트다! II」에 나왔던 장면은 로널드 콜먼 얼굴 위에 보이스 오버를 깔기 위해 멋대로 편집된 것임이 밝혀져서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각색물이다. 시대극적인 거대함이 가장 잘 살아난 영화이기도 하고. 더크 보가드(Dirk Bogarde)가 씨드니 카턴을 연기한 랠프 토머스(Ralph Thomas) 감독의 영국 영화는 그에 비하면 스케일이 더 작았지만 보가드의 카턴은 자기희생의 여유를 어느정도 즐기는 것 같아 보였던 로널드 콜먼의 카턴보다 더 비극적이었다. 크리스 써랜던(Chris Sarandon)이 씨드니 카턴과 찰스 다네이 모두를 연기한 텔레비전물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카턴과 다네이를 한 배우가 연기해서는 안된다는 콜먼의 원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이렇게 여러 각색물을 거치고 원작으로 돌아가는 동안, 슬슬 나는 카턴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결코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생명을 던지는 사람의 동기가 이해되었을 뿐 아니라, 그런 자기파괴적인 행동이 노골적으로 자아도취적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로널드 콜먼도 카턴의 자아도취를 명백하게 이해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카턴/다네이 12역에 그렇게 매섭게 반대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가 찰스 다네이까지 연기하며 아내와 함께 무사히 빠리에서 빠져나가는 장면까지 찍었다면 카턴이 단두대로 가는 길에 보여준 쓸쓸한 여유는(심지어 그는 동료 사형수 아가씨의 키스까지 받는다) 무척 값싸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나는 처음에 디킨스의 소설을 잘못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무리 프랑스혁명처럼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두 도시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소박한 목표를 가진 소품이라는 것. 이 역사적 사건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청혼할 용기도, 의지도 없는 술주정뱅이가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해주기 위한 핑계라는 것. 그에 비하면 디킨스의 또다른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 1838)나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1849)는 길이로 보나, 커버하는 세계의 크기로 보나 얼마나 대작인가. 물론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두 도시 이야기』와 『올리버 트위스트』는 모두 시대물이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를 역사소설로 쓴 건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당연한 일반론이 도출된다. ‘역사소설’에 대한 엄격한 정의를 만들고 그를 따르는 건 소설의 재미와 깊이를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 아무리 과거의 역사를 다룬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소설이 다루는 역사 속 특별한 개인들의 인간적인 면이라는 것. 그 인물이 실존인물인가, 가공의 인물인가, 그 인물의 행동이 실제 역사인가, 허구인가는 그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질문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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