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
세월호를 이제 그만 잊으라는 사람들에게
이진혁 李振赫
창비 인문사회출판부 편집자 jhlee@changbi.com
내가 나고 자란 대구는 전국에서도 교육열 높기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2003년 2월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진학하게 될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집에서 놀지 말고 학교에 자습하러 나오란 통보였다. 서먹한 공기 속에서 한나절 책이나 읽다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어느날 그 서먹함을 깨고 누군가 말했다. “지하철에 불났대.” 내게 대구 지하철참사는 그 한마디로 먼저 기억된다. 사망자 192명 가운데 92명이 인근에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 지하철역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슬픔이 먼저고 분노가 나중이었는지, 그 반대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꾸 누군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고, 어떤 정신질환자가 불을 질렀다는 게 알려졌고, 승객을 대피시켜야 할 기관사가 마스터키를 뽑아 혼자 달아났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났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그 슬픔과 분노 사이에서 ‘나쁜’ 무언가를 느꼈다. 안도감이었다. 자주 다니던 지하철역이었다. 학교에서 자습을 시키지 않았다면 참사에 휘말렸을 수도 있다. 뉴스에서는 손목보호대로 코를 막고 불길을 헤쳐 나온 소년의 무용담이 거듭 소개됐지만, 나였다면 손쓸 틈도 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난 슬퍼하면서도 살아 있음에 안도했다.
11년이 지난 올해 4월 비슷한 사건이 터졌다. 다 구조됐다던 승객의 사망자 수가 자꾸 늘어났고, 어떤 정신 나간 이들이 평형수를 빼고 짐을 실었다는 게 알려졌고, 승객을 대피시켜야 할 선장이 혼자 달아났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또다시 사실로 드러났다. 침몰하는 배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나도 가만히 있었을 것이고, 구조될 거라 믿었을 것이고, 그렇게 물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그 배 안에 있지 않아도 됐고,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됐다. 다시 찾아온 안도감은 사고 자체만큼이나 비참했다.
11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참사로 불리는 사건이 몇차례 더 있었다. 참사의 물길에서 단 한번도 구조되지 못한 셈이다. 살아남아 안도해야 하는 슬픔을 계속 느꼈다. 내 삶이 행운이 될수록, 그들의 죽음은 점점 평범한 것이 되어갔다. “세월호는 본질적으로 교통사고”라는 말이 섬뜩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오랜만에 대구에 갈 일이 있었다. ‘그’ 지하철 안에서 중년남성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세월호 이야기 제발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피로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다양하다. 여당이 세월호 사건을 정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거나 사건 이후 야당과 시민사회가 지나치게 무력했기 때문이라는 등이다. 이러한 외부의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이 사건에서 애써 눈을 돌리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기억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 ‘잊지 않겠다’던 다짐이 줄을 이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세월호는 200일 넘게 차가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실종자 수는 거의 제자리걸음인데, 당면과제인 진상규명과 피해자 치유 문제를 두고는 설전만 오가는 상황이다. 사건에 대한 관심은 불순한 의도로 쉽게 매도당했다. 관심을 가질수록 깨닫는 건 이 사회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곪아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이미 생사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목소리보다 ‘그만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목소리가 더 크다.
위험한 사회, 구조받지 못하는 사회, 살아남은 자체로 안도해야 하는 사회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기억의 부재는 공감의 부재로 이어진다. 죽음이 일상적이기 때문에 함께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연대를 하려면 공감이 먼저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공감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대화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세월호를 넘어서는 청년들」 중 조세영의 발언,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118면)는 말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01년 9·11테러 이후 죽음을 끊임없이 되살려 기억하는 미국이나 2011년 후꾸시마 원전사고를 되새기는 일본 시민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그들은 매년 그 아픈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 슬픔을 나눈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 치유에 이토록 소극적인데 반해, 그들 시민은 자발적으로 피해자들을 치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억이 공감으로, 공감이 공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공감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겠느냐는 반박이 따르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를 바꿔온 출발점도 공감이었다. 부정선거에 함께 분노하고, 이한열(李韓列)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던 것처럼 말이다.
최승자(崔勝子) 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즐거운 日記』, 문학과지성사 1984)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살아,/기다리는 것이다.” 사회가 너무나도 많이 망가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를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믿는다. “디렉션(direction)하지 말고 리브(live)하자.” “누군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현장에서 일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희망의 조건이 만들어”진다는 말(김성환, 앞의 대화 118면)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기억이 중요하다. 소설가 박민규(朴玟奎)는 세월호를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년 가을호 433면)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이 일을 잊는다면 다음번 참사는 사건조차 되지 못한다. 세월호 사건은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피해자 치유 문제가 특히 그러하다. 긴 진통 끝에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가 출범한다. 그들의 활동이 지금까지처럼 변죽만 울리다 끝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