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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기호 李起昊
1972년 강원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장편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가 있음. antigiho@hanmail.net
오래전 김숙희는
1
그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제주도 협재해수욕장 부근의 한 펜션 잔디마당에서였다. 그는 마침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숯불 그릴 위에 목살과 새우, 새송이버섯을 올려놓고 가위와 집게로 하나하나 잘게 자르던 중이었다. 장마와 태풍이 모두 물러간 칠월 하순답게 기온은 높았으나 습도는 없었고, 그래서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여덟살, 여섯살인 두 아들은 수영모자를 쓴 채 그의 양옆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펜션 좌측에 마련된 어린이 풀장에서 오전 내내 미끄럼틀과 튜브를 타고 놀았다. 아이들의 어깨와 목덜미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종아리에선 연신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목장갑을 낀 손으로 새우의 껍질을 벗겨 연한 속살만 아이들의 입에 쏙쏙 넣어주었다. 아이들의 한껏 벌린 입과 그뒤로 보이는 연두에 가까운 바다, 어린 풀냄새를 닮은 참숯 연기까지. 그는 마치 그 모든 풍경을 자신이 만든 양, 그 모든 풍경 속에 자신 또한 일정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양, 의식적으로 커다랗게 미소 지으려고 노력했다. 결혼한 지 9년 만에 처음 떠나온 여름휴가였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평상시보다 더 감상적이고 더 특정한 기분상태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바람이나 햇빛 속에 자잘한 멘톨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처럼, 명치 부분에 알코올 묻은 솜이 닿은 것처럼, 무언가 끊임없이 그의 내부에서 화르륵 화르륵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감정상태는 그로부터 채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정반대되는 지점으로, 급하게, 추락하고 만다.
아내가 스칸디나비아풍으로 지어진 하얀 펜션 건물에서 작은 밥상을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밀짚모자에 발목까지 오는 하늘색 긴치마를 입은 아내. 아이들이 먼저 아내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도 가위 든 손을 치켜들어 흔들었다. 아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펜션 현관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펜션 정문 입구에 검은색 승용차 한대가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승용차에서 내린 남자는 두명이었다. 한명은 썬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다른 한명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정장 차림에 무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남자들은 곧장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재민씨 되시죠?”
썬글라스를 쓴 남자가 물었다. 남자는 코팅된 신분증을 내밀며 자신들은 서울지방경찰청 장기미제 전담팀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썬글라스를 쓴 남자가 그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다가 말고 잠깐 뒤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그의 곁에 서 있는 아이들을 힐끔 한번 바라보더니 말없이 짧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잠깐 저희하고 같이 가주셔야겠는데요. 확인할 게 좀 있어서……”
그는 들고 있던 가위와 집게를 내려놓았다. 아내가 양손에 밥상을 든 채 그의 바로 뒤편에 섰다.
“무슨 일 때문이죠? 저는 지금 가족하고……”
“이게 시간을 좀 다투는 일이라서요. 가면서 말씀드리면 안될까요?”
남자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고개는 자꾸 두리번두리번 펜션 뒤 바다 쪽을 살폈다. 남자는, 그의 태도나 답변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무언가 다 정해진 일을 하는 사람처럼, 숙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직원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그런 모습은 그에게 충분히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손에 끼고 있던 목장갑을 벗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밥상을 내려놓고 두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내가 그들에게 어디에서 나오셨다고요, 다시 한번 물었고, 이번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천천히 서울지방경찰청 장기미제 전담팀이라고 말해주었다. 정장 차림 남자의 목소리는 중저음이었고, 썬글라스를 쓴 남자와 마찬가지로 친절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그렇게 말한 후, 아내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아내와 짧게 눈을 마주친 후, 별일 아닐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러곤 그들을 따라 펜션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제주시 쪽으로 가는 건가요?”
그는 승용차가 출발하자마자 운전석 쪽 썬글라스를 쓴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아닙니다. 서울로 갈 겁니다. 세시 삼십분 비행기죠.”
썬글라스를 쓴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자신이 신고 있는 슬리퍼와 허리선에 고무줄이 들어간 남색 반바지, 소매가 없는 하얀색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반바지 주머니에 휴대폰과 지갑은 들어 있었다.
“아니 저기, 무슨 일 때문인지 말씀을 해주셔야지…… 저는 내일까지 여기 펜션에 예약이 되어 있는데……”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가 말을 끊었다.
“정재민씨, 김숙희씨라고 아시죠?”
정장 차림의 남자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여자가 자수를 해왔어요.”
그는 말없이 미간을 잠깐 웅크렸다. 그러곤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듯 가만히 조수석 시트의 박음질된 부분을 노려보았다.
“아까는 가족분들 앞이어서 자세한 말씀은 안 드렸는데, 김숙희씨와 관련해서 급하게 확인할 게 몇가지 있어서요. 무슨 일 때문인진…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죠?”
그는 그 말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승용차는 막힘없이 해안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2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0년 10월 20일 금요일 밤 열한시 무렵, 청색 1톤 포터 트럭 한대가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 해상공원 인근 방파제 아래로 추락했다. 트럭은 추락하면서 옆으로 한차례 전복된 뒤 차체 바닥이 온전히 하늘을 향해 드러난 상태 그대로 갯벌에 처박혔는데, 마치 시소처럼 짐칸 쪽이 아래로, 운전석 쪽이 위로 향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새벽 두시 무렵, 그 인근으로 드라이브를 나온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사고 트럭을 처음 발견하고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그때까지도 포터 트럭의 전조등은 꺼지지 않은 채 어둡고 컴컴한 밤바다를 은색 불빛으로 넓게, 또 잔잔하게 비추고 있었다. 엔진음은, 파도와 바람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고의 최초 목격자인 남녀 대학생들은 뒤집힌 트럭 운전석 유리창 밖으로 삐져나온 사람의 어깨를 분명히 보았다고 후에 진술했다. 자신들이 방파제 위에서 몇번 저기요, 저기요,라고 소리를 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무섭고 두려워서 차마 근처까지 내려가진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경찰이 도착해 사고를 조사하는 와중, 이상한 점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트럭 안에서는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 한명만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이전 이미 사망한 상태로 밝혀졌다. 혈중알코올농도는 0.29%, 고도의 명정(酩酊) 상태였다. 거기까지는 음주운전에 의한 추락 사망사고의 정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운전석 핸들이나 계기판 등에 충격에 의한 변형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운전자의 흉복부나 다리 등에도 별다른 부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럼에도 운전자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 등이 경찰의 최초 보고서에 기재되었다. 음주운전에 의한 추락사고라는 추론에는 논리적 결함이 없었으나, 그것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결론에는 숭숭 구멍이 뚫린 보고서였다. 경찰은 곧바로 사망자에 대한 부검을 진행하였다.
부검의에 의해 밝혀진 운전자의 정확한 사인은 후두부 손상이었다. 교통사고 사망자에게는 흔히 나타나지 않는 손목과 손가락에 방어흔이 다수 발견되었고, 트럭 조수석에 놓여 있던 사망자의 점퍼 어깨 부근과 등, 손목 부위에서도 다량의 혈흔이 검출되었다. 사망자의 후두부에는 무언가 동그란 모형의 물체로 타격을 받은 듯한, 반달 모양의 정형 손상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수사를 진행했던 시흥경찰서 수사팀의 사건기록을 살펴보면, 부검 결과가 도착한 바로 그다음 날부터 교통사고가 아닌 일반 살인사건으로 전환, 주변 탐문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수사팀은 사망자가 김준수(39세)인 것을 밝혀냈으며, 그가 주말엔 이삿짐센터에서, 주중에는 구로 공구상가와 안산 반월공단에서 계약직 화물기사로 일해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음주운전 적발기록은 없었고, 여타 다른 전과기록도 나타나지 않았다. 간간이 수면제를 복용한 사실은 있으나, 채무관계가 깨끗한 점, 별다른 원한을 살 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 등도 지인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보험은 대물과 자손 모두 연체 없이 납부된 상태였고, 따로 3년 전부터 1억원짜리 사망보험과 다달이 일정 금액을 불입하는 연금저축보험에도 가입된 상태였다. 딱히 보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수사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사망자의 아내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도 맞춰졌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수사팀은 사망자의 아내에게 지난 2년 동안 만나왔던 내연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3
“이게 15년 전 일이라서……”
그는 조사실에 정장 차림의 남자와 마주 앉았다. 남자는 조사실에 앉자마자 명함부터 건넸다. 하준영 팀장. 그것이 남자의 이름과 직책이었다. 조사실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고, 왼쪽 구석엔 커다란 행복나무 화분도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반대편 벽 구석엔 일인용 소파와 공기청정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사실 가운데 있는 테이블엔 노트북과 서류철이 있었고, 테이블에서 네댓걸음 떨어진 벽 앞에는 삼각대를 갖춘 캠코더가 놓여 있었다. 창문 없이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는 방, 그는 불과 세시간 만에 제주도 협재해수욕장에서 다섯평 남짓한 그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이동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스스로 애써 만들어놓은 풍경 속에서 툭, 버려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14년하고도 9개월 전 일입니다.”
하준영 팀장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아직 공소시효도 3개월 정도 남아 있는 거구요. 그거 때문에 저희가 좀 바빠졌습니다.”
하준영 팀장은 그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마르고 키가 컸지만, 손등과 목울대 주위엔 굵은 힘줄이 드러나 있었다. 투명한 안경알과 빳빳하게 날이 선 와이셔츠. 수염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날렵한 턱선까지. 장소 탓도 있었겠지만, 그는 하준영 팀장의 얼굴에서 어떤 집요함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이 어쩐지 그를 조금 주눅 들게 만들었다. 윗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솔직히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저희도 좀 당황했습니다.”
하준영 팀장은 테이블에 놓인 서류철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말했다.
“김숙희씨는 그걸 빤히 알면서도 자수를 했더라구요. 3개월 남은 거……”
그는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하준영 팀장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시면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여기 예전 시흥경찰서에서 작성한 참고인 진술조서도 있고……”
하준영 팀장이 그의 앞으로 서류철을 조금 내밀었다. 그는 그 서류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15년 전, 그와 김숙희는 시흥경찰서 형사계에 차례차례 불려가 오랜 시간 참고인 진술조서를 작성해야 했다. 2000년 10월 20일 금요일 밤 여덟시에서부터 이튿날 새벽 한시까지의 모든 행적, 사고가 나던 그날 밤의 기록들…… 그때 그는 저녁 일곱시에서부터 여덟시까지 부천시 춘의동에 위치한 설렁탕집에서 저녁식사를 했고, 다시 밤 아홉시 무렵부턴 부천시 중동에 있는 한 호프집으로 이동, 새벽 두시까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그가 서명한 참고인 진술조서에는 그날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의 전화번호와 설렁탕집, 호프집의 상호가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김숙희는 그날 저녁 일곱시 삼십분 무렵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친정어머니와 쭉 함께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닙니다. 기억은 생생히 납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때도 꽤 오랫동안 조사를 받았는데요.”
그는 서류철을 들춰보지 않고 말했다.
“그 여자도 여기에 와 있나요?”
그가 묻자 하준영 팀장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당시 그들을 담당했던 수사팀은 그와 김숙희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친구들과 호프집 주인, 김숙희 친정어머니의 증언을 모두 듣고 행적 수사와 통신 수사도 병행했다. 하지만 다른 증거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친구들이나 김숙희의 친정어머니는 한결같은 대답만 했을 뿐이다. CCTV도 없었고, 차량용 블랙박스도 상용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증인이나 물증도 나오지 않았다. 수사는 그렇게 넉달 넘게 진행되다가 결국 흐지부지 종결되고 말았다. 사건은 미제 처리가 되었다.
자수를 했단 말이지…… 그 여자가 자수를 했단 말이지…… 그는 엄지와 검지로 인중을 문지르면서 그렇게 몇번 속말을 되뇌었다. 예전에 그는 김숙희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어떤 악력 같은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지겹고 또 한편 섬뜩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일부러 혼잣말로 욕을 해대거나, 대출금의 연체이율 같은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다시 잠잠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이름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용기를 주었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거, 다 말씀드리지요.”
그는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좀더 당겨 앉으면서 말했다.
“한데, 제가 한가지 걸리는 게, 예전에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사실과는 조금 다른 말을 한 게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끝을 흐리면서 말하자, 하준영 팀장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하준영 팀장이 말했다.
“허위진술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러니까 그게 지금도 문제가 되는 게 아닌지. 그게 좀……”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이미 김숙희씨를 통해서 어느정도 확인한 사항이 있으니까요.”
하준영 팀장은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어쨌든 살인과 허위진술은 죄의 무게가 다르지요. 공소시효 기간 자체도 다르고요. 그게 지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하준영 팀장은 그를 보면서 살짝 웃기도 했다.
4
“자 그럼, 바로 그날 밤 얘기부터 시작해볼까요?”
하준영 팀장이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는 허리를 조금 꼿꼿하게 편 상태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고개만 돌려 잠깐 캠코더 렌즈를 바라보았다. 긴장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말들이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나는 이제 아무런 죄도 없다, 그녀가 여기에서 무슨 말을 했건 나는 문제 될 게 없다. 그는 가볍게 호흡을 한번 했다.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그날 밤…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김숙희씨로부터 말이지요? 그게, 호프집으로 걸려온 전화였나요?”
하준영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제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그 여자는 공중전화에서 걸었고요.”
“하지만 그때 정재민씨는 휴대폰이 없지 않았습니까?”
“제 명의로는 없었지만, 회사에서 차명으로 만들어준 휴대폰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유아용 교구 제작업체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승합차 짐칸 가득 자석이 달린 칠판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과일 썰기 27종, 원형 퍼즐과 나무 마라카스, 느티나무 모형으로 만든 숫자 배열판 같은 것들을 싣고 다니면서 일년 단위로 계약되어 있는 경기도 일대 유치원에 납품하거나 대여해주는 일, 그것이 그의 업무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치원 원장들과도 통화할 일이 많았다. 유치원 원장 중에는 노골적으로 납품단가를 부풀리고 계약금액의 일정부분을 다시 차명계좌로 넣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사장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금액 조정을 지시받곤 했다. 그것이 그에겐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휴대폰은, 사장이 직접 개통까지 해서 그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김숙희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그 유치원 중 한곳에서였다.
“혹시, 그 휴대폰 번호 지금도 기억하십니까?”
“018로 시작되는 번호인데, 다 기억나진 않습니다. 그후로 바로 버렸으니까요.”
하준영 팀장은 노트북 자판에 손을 댔다가 다시 뗐다.
“그래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사실 우리한텐 그런 게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이나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 같은 거.”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이 나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네, 좋습니다. 계속해보지요.”
그는 두 손바닥을 반바지에 대고 한번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도중에 받은 전화인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밖으로 나와 상가 계단에 앉아 통화를 했습니다. 꽤 길게 통화를 한 기억이 납니다.”
“그게 몇시쯤이었나요? 김숙희씨한테 전화를 받은 게?”
“밤 열한시쯤이었던 거 같은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럼 사건이 모두 벌어지고 난 뒤, 김숙희씨가 정재민씨한테 전화를 한 거로군요?”
“네… 저도 전화로 처음 알게 되었으니까요… 김숙희씨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그는 하준영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아닙니다. 김숙희씨도 그런 식으로 진술했습니다.”
“한데, 왜…?”
“아, 오해하진 마십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관계 확인차 드리는 질문이니까요. 저희는 김숙희씨 진술서의 신빙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짢으셨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죠.”
하준영 팀장은 정중하게 말했지만, 그는 어쩐지 그것이 사과로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저는 혹시 그 여자가 다른 말을 했나 해서……”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으면 제가 나중에 말씀을 드리죠.”
하준영 팀장이 말했다. 그는 다시 진술을 시작했다.
“그 여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김숙희는 그때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구요, 뭔 소리인지 하나도 안 들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호프집 밖으로 나왔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편을 죽였다구요, 제가. 그녀는 일정한 목소리 톤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남편에게 방금 막 밥을 차려주고 나왔어요, 지금 남편의 옷을 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잠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굳은 듯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 어, 소리만 몇번 냈을 뿐이었다. 그녀가 먼저, 그럼 이만 끊을게요,라고 말했을 때, 그제야 그는 황급히 잠깐만요, 잠깐만요, 끊지 마요, 끊지 말라고요,라고 빠르게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에 상가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통화를 했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하던가요?”
하준영 팀장이 물었다.
“더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하곤 상관없는 일인데… 어쨌든 미안하게 되었다고… 뭐 그런 식의 말을 하면서 자꾸 전화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정재민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 그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하준영 팀장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김숙희씨가 어떻게 남편을 죽였다, 이런 걸 정재민씨한테 말한 건 아니었군요?”
“네. 그건 저도 나중에… 경찰 조사를 받다가 알게 된 사실이고요.”
잠깐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준영 팀장은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가 무언가 더 다른 말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김숙희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말했는지 알 수 없었고, 또 그것이 불안했다. 진술을 하면 할수록 그 불안이 더 커졌다.
“그러면 그때 정재민씨는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김숙희씨한테?”
하준영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때, 좀 경황이 없어서…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일단 친정어머니한테 가 있으라고……”
“그럼 이미 그때부터 말을 맞추기 시작한 거군요?”
“아닙니다. 그건 그다음 날 제가 따로 그 여자를 만나러 가서 그렇게 한 겁니다. 처음엔 그냥 친정어머니한테 가 있으라고 한 게, 그게 전부입니다.”
하준영 팀장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숙희씨는 정재민씨 말에 얌전히 따르던가요?”
“처음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어서… 제가 좀 화를 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이죠? 아, 이건 김숙희씨 진술서에 이렇게 씌어져 있어서……”
그는 잠깐 하준영 팀장이 한 그 말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그 말을 했던 당시, 그의 감정들이 선명하게, 무언가 물컹거리는 이물감과 함께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그런 말도 했습니다.”
하준영 팀장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노트북 자판을 몇번 두들겼다. 그는 얌전히 그런 하준영 팀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김숙희씨를 많이 좋아하셨나봅니다.”
“네?”
“정재민씨가 그때 김숙희씨를 많이 아낀 거 같다고요.”
“아, 네……”
그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건 누가 봐도 저하고 관계된 일처럼 보일 테니까요… 저하고 상관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좀 불안했던 게 맞습니다.”
“하긴, 그럴 수 있죠. 그건 누가 봐도 정재민씨와 연관있는 사건으로 보이긴 하죠.”
“저는 그냥 전화를 받은 죄밖에 없는데도… 갑자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때 경찰들은 그렇게 생각했고요.”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하준영 팀장은 정말로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물렁거리는 이물감 또한 사라졌다.
5
하준영 팀장은 조사실 밖으로 나가 얼음을 띄운 차가운 커피 두잔을 가져왔다. 그는 차가운 컵 표면에 이마를 갖다댔다.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준영 팀장은 자리에 앉기 전, 그에게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년 전에 끊었다고 대답했다. 하긴, 요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무슨 짐승 취급하니까요. 하준영 팀장은 그렇게 말했다.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그의 몸에선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자, 그럼 또 시작해볼까요?”
하준영 팀장이 그렇게 말하자, 그는 다시 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빨리빨리 끝내야 정재민씨도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시죠. 어쨌든 이렇게 협조해주신 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는 잠깐 제주도에 남아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한테는 무슨 일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할 순 없겠지. 회사 일, 예전 회사 일 때문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 이전 이야기를 해보죠. 사건 이전의 이야기. 혹시 사전에 김숙희씨로부터 무슨 다른 이야기를 들으신 건 없었습니까?”
“다른 이야기라면 어떤?”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남편이 죽었으면 좋겠다든가, 남편 욕을 심하게 했다든가 하는.”
하준영 팀장은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딱히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도 좀 기분 나쁜 얘기일지 모르지만, 혹시 정재민씨가 김숙희씨 남편 얘기를 먼저 꺼내신 적은 없었습니까?”
조금 느슨해져 있던 마음이 일순 팽팽하게 당겨졌다. 최대치로 당겨진 고무줄이 탁, 끊기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는 하준영 팀장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여자 남편 얘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그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 여자하고 거의 헤어진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저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헤어진 상태나 다름없다는 게 어떤 건지 잘……”
“그냥 띄엄띄엄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그해 들어선 거의 한달에 한두번 볼까 말까 한 정도였고요. 제가 여러번 헤어지자는 말도 먼저 했습니다.”
“그 얘기는 김숙희씨 진술서엔 없는 내용이군요.”
하준영 팀장은 노트북 옆 서류철을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든, 그게 사실입니다.”
그는 커피에 떠 있는 얼음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그냥 한달에 한두번 만나서 자는 사이?”
“네… 비슷합니다.”
하준영 팀장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무슨 다른 문제라도?”
그는 하준영 팀장이 물은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른 문제, 다른 문제…… 그는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했다.
난 아이들이 너무 싫어요.
오래전 김숙희는 그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억지로 떠밀어서 하는 일 같기도 하고……
하늘반이던가 샛별반이던가, 그가 납품계약을 맺고 있던 송내동 소재 한 사립 유치원의 교사였던 김숙희는, 그의 승합차 조수석에 앉아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납품계약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아 그가 각별하게 공을 들이고 있던 유치원이었다. 그는 김숙희뿐 아니라 다른 유치원 관계자들 모두에게 친절했다. 김숙희는 퇴근길에 몇번 집 앞까지 태워다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집 앞에 도착해도 쉬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때가 많았다.
저한테 왜 이러시죠?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이상한 여자로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냥 씨익 웃으면서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쪽이 좋아서요. 네번째였던가, 똑같은 질문을 그녀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생각과는 다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말해도 별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 또한 몇개월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와 꼬치구이집에서 술을 마시고 처음으로 모텔에 간 날이었다. 그녀는, 모텔에 가더라도 새벽엔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남편이 걱정한다고 말했다. 결혼을 했어요? 그가 술 취한 눈을 끔벅거리면서 물었다. 네, 2년 전에요… 아니, 나이가 몇살인데요? 스물여섯이요. 스물네살에 결혼했어요. 그녀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일찍도 했네… 한데, 왜 미리 얘기 안했어요? 그가 상체를 건들거리면서 물었다. 묻지 않았잖아요, 그런 얘기. 그녀는 높낮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하긴. 그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곤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조금 이상한 여자였습니다.”
“이상했다면 어떤?”
“결혼했다는 말도 안한 채 저를 만났고… 처음부터 서로 대화도 잘 안 통했습니다. 엉뚱한 말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있기도 하고……”
그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런 문제들 때문에 헤어지자고 말한 건가요?”
“그게 전부는 아니었고요…”
그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 여자가… 저하고의 관계를 남편에게도 모두 말했다고 하더라구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하준영 팀장은 무언가 생각난 듯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아, 네. 김숙희씨도 그런 말을 했군요.”
“그 여자가 그런 말도 진술서에 썼습니까?”
“네, 몇번 남편한테 반복해서 말했다고.”
그는 왼손으로 한쪽 뺨과 입술을 쓱 문질렀다. 오른손은 살짝 주먹을 쥐었다.
“그 말을 남편에게 했다는 걸 알고, 헤어질 결심을 했습니다. 꺼림칙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김숙희씨 남편 때문에 말이죠?”
하준영 팀장이 물었다.
“팀장님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거 같습니까?”
“저요?”
하준영 팀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고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준영 팀장이 다시 말했다.
“저 역시도 정재민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 같네요.”
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업을 하는 처지에…… 어쨌든 좀 불안했던 게 사실입니다. 언제 어느 때 그 여자 남편이라는 사람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김숙희씨 남편한테 따로 연락을 받으신 건 없고요?”
“네, 잠잠하더라구요…… 그 여자하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자라고 들었는데,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고… 그런 얘기를 그 여자가 몇번 한 기억이 있습니다.”
하준영 팀장이 다시 서류를 보면서 말했다.
“김숙희씨도 그런 말을 썼습니다. 남편이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고, 그게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고.”
그는 하준영 팀장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왜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지. 마음속에서 자꾸 그런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만나긴 만나신 거네요?”
하준영 팀장이 물었다.
“그 여자가 연락하고,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그때만 만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유지된 거다?”
“남편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 같았고…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좀 무감각해지더라구요. 힘든 일도 아니었고……”
그는 그렇게 인정했다.
6
“사건 이후에는, 그러니까 그날 밤 이후에는 어땠습니까? 그뒤로도 좀더 만나신 게 맞지요?”
하준영 팀장이 물었다.
“한 육개월 정도 더 연락 오고… 몇번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잠깐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슬슬 피로감이 몰려왔다.
“힘드셨겠네요?”
하준영 팀장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혹시, 김숙희씨한테 왜 그랬느냐고,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그뒤에 따로 물어보시진 않았습니까?”
그는 그 질문에는 바로 대답했다.
“묻지 않았습니다.”
“그뒤에 전혀 그런 말들이 두분 사이에 오가지 않은 겁니까? 그냥 말다툼이라도?”
“대화를 하고… 말다툼을 하고… 그런 관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준영 팀장은 말하지 않고, 그가 더 얘기하기를 기다렸다.
“만나면 바로 자리를 피하고… 제가 먼저 그랬습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냥 제가… 그 여자가 좀 끔찍했습니다. 사건이 터진 직후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끔찍했다?”
“아니, 혐오스러웠다고 하는 게 더 맞겠네요. 혼자 그 여자 생각만 해도 그랬습니다.”
“남편을 죽인 여자라서?”
하준영 팀장은 짧게 짧게 물었다.
“그냥 죽인 게 아니지 않습니까? 술 취한 남편 뒤통수를 파이프 렌치로 내려치고… 트럭까지 혼자서 밀어버렸다는 게… 그게 어디……”
“트럭이야 뭐, 중립 상태에 있으면…”
“나중에 시흥경찰서에서 조사받으면서 알게 됐는데, 그 여자 남편은 별문제도 없는 사람이더라구요. 성실하고, 주말에도 일 나가고……”
하준영 팀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저는 그 여자한테 아무 말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이유건… 저는 그냥 그 여자가 혐오스러웠어요. 그 여자 손만 닿아도 축축한 기분이 들고… 그랬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소리가 좀 높아진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때까지 쥐고 있던 오른손 주먹을 슬쩍 풀었다.
그가 하준영 팀장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뭐라고 하던가요?”
“뭘 말입니까?”
“그 여자는 왜 남편을 죽였다고 하던가요?”
“아, 그거요?”
하준영 팀장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였다.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수치심 때문에 그랬다고. 뭐, 이번에 자수하게 된 것도 다 그거 때문이라고… 진술서에도 그렇게 썼더라구요.”
7
“자, 이제 대충 마무리를 하면 될 거 같네요.”
하준영 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의자등받이에 기댔다. 커피 속 얼음은 이미 다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컵에서 흘러나온 물기만이 테이블에 작은 원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원의 둘레를 무너뜨렸다.
“아 참, 한가지 더.”
하준영 팀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서류철을 뒤적거렸다.
“여기 있네.”
하준영 팀장은 서류 한장을 꺼내들었다. 그는 다시 두 손을 무릎 위로 가져갔다.
“2002년 7월 중순쯤 말입니다. 그때 김숙희씨로부터 돈을 받으신 적이 있지요? 육천만원.”
하준영 팀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건 어떤 성격의 돈입니까? 서로 원래 어떤 채무관계가?”
“아닙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럼 이 돈은……?”
하준영 팀장이 다시 한번 서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이게, 적은 금액의 돈은 아닌데……”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잘 생각나지도 않았다.
“돈을 보내면서 김숙희씨가 따로 연락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습니까?”
“네…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땐 이미 제가 직장도 나오고, 휴대폰 번호도 바꾼 후라……”
“정재민씨도 그 돈을 받고 따로 김숙희씨한테 연락하진 않으셨구요?”
“네…”
하준영 팀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시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그럼, 정재민씨는 이 돈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는 꽤 길게 침묵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저는… 그 여자가 저한테 미안한 마음에 보낸 돈이라고… 또 어떤 미련 때문에 보낸 돈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돈을 쓰셨군요?”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한번 깨물었다. 그러면서 또 잠시 침묵했다.
“한동안 쓰지 않다가… 사업을 시작할 때, 그때 썼습니다… 되돌려달라고 하면 나중에 돌려줄 마음으로……”
둘 사이에 또 한차례 침묵이 흘렀다. 복도에서 누군가 황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는 아시구요?”
하준영 팀장의 질문에 그는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그게 김숙희씨 남편 보험금이더라구요. 원래 1억원쯤됐는데, 보험회사에서 그 정도 돈만 지급했나보더군요. 사고가 복잡하니까… 그건 모르고 계셨군요?”
그는 그런 돈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뭐, 좋습니다. 김숙희씨도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진술서에 쓰지 않았으니까,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겁니다.”
하준영 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서류철 안에 넣었다. 탁탁, 하준영 팀장은 서류철을 테이블에 두들기기도 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계속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자,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하준영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하준영 팀장은 그와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이거, 제주도에서부터 어려운 발걸음 해주시고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짧게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나중에 더 필요한 사항 있으면 그때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뭐, 김숙희씨가 진술서에서 단독범행인 걸 스스로 밝혔으니까, 크게 염려하실 건 없을 겁니다.”
“네.”
“자, 이제 그럼.”
둘은 다시 한번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천천히 조사실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8
경찰청 정문을 빠져나오다가,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있었던 7층 조사실을 올려다보았다. 사위는 이미 어두워져 은빛 건물 층층마다 주황색 형광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유리창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 건물 어딘가에 그 여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또 예전처럼 그의 어깨를 부여잡는 어떤 악력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한동안 그 악력을 느끼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경찰청 앞 왕복 8차선 도로를 건너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오늘 중으로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간 뒤 아내에게 전화할 생각이었다. 아내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는 게 조금 힘들겠지만, 착한 사람이니까, 회사 일이라고 하면 이해해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그는 문득 3년 전 겨울 그 여자, 김숙희를 만난 것을 떠올렸다. 3년 전 일이었지만, 그는 마치 15년 전의 어떤 하루처럼 새까맣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는 멍한 눈빛으로 신호등을 바라보며 계속 그날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김숙희와, 그가 운영하는 유아교구업체 사무실 인근 커피 전문점에서 만났다. 김숙희가 회사 앞에서 전화를 걸어와, 그래서 나가게 된 것이었다. 그는 피하고 싶었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편, 그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생각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어서, 그는 다시 그녀가 보내준 돈을 떠올렸다.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것이겠지, 그것 때문이겠지.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날, 김숙희는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삼십분 남짓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을 뿐이었다. 거의 12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예전에 비해 놀랄 만큼 몸이 불어 있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검은색 패딩 점퍼에 청바지, 갈색 스니커즈를 신은 모습이었는데, 볼살도 그렇고 어깨선도 그렇고,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쳤으면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변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또 기분이 상했다. 살이 찌다니. 어떻게 살이 찔 수가 있지… 그는 그녀와 마주 앉은 상태에서 계속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저한테… 그때 왜 그러셨어요?
그녀는 커피 전문점에서 나오기 직전,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저한테 그때 왜 그러셨어요? 무표정한 얼굴로 두번.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말도 듣지 않은 것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보다 일찍 커피 전문점에서 나왔고,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은행 창구에 들어가 현금 삼백만원을 인출해왔다. 그는 그 돈을 은행 봉투에 담아 그녀의 패딩 점퍼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더이상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의 손을 막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서 있는 그녀에게 잘 가요,라고 말한 후 다시 회사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그녀의 살찐 어깨와 허벅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밑단이 터져 있는 그녀의 오래된 패딩 점퍼를……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 기분이 상했지만, 그는 한동안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루하고, 살찐.
그는 신호등에 따라 길을 건넜다. 여름휴가철 탓인지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그는 길을 건넌 후, 다시 한번 경찰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저 건물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 남루하고 살찐, 그리고 모든 것을 자백한……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조금 혐오스러웠다. 그 생각을 잊으려고, 그는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